[카페, 라다크][여행] 밀크티 맛은 변하지 않았다

카페, 라다크 #2

 


Please please please please come.


라다크에 간다는 소식을 전하자 초모가 제일 먼저 한 말이다. 올해 들은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이라며 이번에는 진짜 오느냐고 몇 번이나 다시 묻는 초모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초모는 내가 라다크에서 얻은 것 중 가장 귀하게 여기는 소중한 인연이다. 나의 라다크 이야기에는 확실히 낭만적인 구석이 많지만, 사실 여행자도 현지인도 아닌 경계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퍽 고된 일이었다. 라다크에서 지내는 동안 얻고 누릴 때보다 버티고 견뎌야 할 때가 더 많았다. 우리는 자주 외로웠다. 초모는 그럴 때마다 가족처럼 곁에 있어 준 고마운 친구다. 라다크를 떠올리면 초모와 함께 보낸 찬란한 계절들이 장면 장면 줄줄이 딸려온다.



십 년 전 초모는 가족을 지킬 사람이 자기뿐이어서 너무 힘들다고 말하며 자주 울었다. 이렇게 똑똑한 애가 산골 오지에 처박혀 가족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것이 영 못마땅해서 방법을 찾아볼 테니 같이 한국에 가자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래서 몇 년 뒤 초모가 대학에 가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델리에서 만난 늦깎이 대학생 초모는 혼자 나는 독수리처럼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까맣게 어린 동기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델리에 들를 때면 초모의 기숙사 방에서 지냈다. 혼자 지내는 방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도 그 방이 정말 좋았다. 코딱지만 한 방 한쪽에 놓인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가 얼마나 안락했는지, 한여름에 힘겹게 돌아가던 천장의 선풍기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방 안에 차린 살림살이로 소꿉놀이하듯 끓여낸 밀크티는 얼마나 달콤했는지, 초모가 쟁취한 소박한 자유를 얻어 즐기며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라다크에서는 담배도 술도 오빠 몰래 하느라 늘 전전긍긍하던 초모가 기숙사 방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모습을 보면 영 생경하기도, 멋지기도 했다. 초모는 그럼에도 가족 걱정을 놓지 못했다. 강인하고 현명한 그녀는 결국 자기가 가진 힘과 지혜를 가족을 위해 쓰기로 했고, 지금은 라다크로 돌아와 가족 곁에 머물고 있다. 어째서인지 초모의 귀향은 포기나 희생이 아닌 혁명처럼 느껴졌다.



입국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뒤통수 너머로 마중 나온 초모의 얼굴이 보였다. 델리가 아닌 라다크에서 초모를 만나는 것은 십 년 만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초모의 환영 인사가 “웰컴 투 라다크”가 아닌 “웰컴 백 투 라다크”여서 기뻤다. 초모는 그새 오너드라이버가 되었다. 차에 짐을 싣고 보조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은 그녀의 옆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데려가 주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초모가 문득 듬직하게 느껴졌다.


초모는 그리운 친구들의 소식을 한 명 한 명 들려주었다. 어떤 친구는 일찍이 결혼해서 일곱 살짜리 딸이 하나 있고, 어떤 친구는 벌써 아들이 둘이라고 했다. 어떤 친구는 레 시내에 근사한 바를 열어서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벌었고, 또 어떤 친구는 이혼 후 하루하루 술에 의지하며 산다고도 했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니 흘러간 시간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칠 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새로 지어진 경기장, 제법 정돈된 도로, 현대적인 상가 건물과 삐까뻔쩍한 5성 호텔들이 눈에 띄었다. 시내에 단 하나뿐이던 주유소도 몇 개나 더 생겼다. 거리 곳곳에 못 보던 조형물들도 여러 개 보였다. 레 – 스리나가르 로드와 레 – 마날리 로드가 만나는 교차로에는 싱게 남걀의 거대한 기마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라다크의 분위기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지만, 싱게 남걀은 라다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니 레로 진입하는 입구를 장식할 만했다. 그러나 조악한 두루미 모형과 깡통 로봇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했다. “두루미가 라다크의 명물이래. 나도 몰랐던 사실이야.”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초모가 덧붙였다.



메인 바자르에 들어서자 ‘I ❤ LEH’라고 쓰인 조형물 앞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대비를 이루며 새빨간 하트가 번쩍번쩍 빛났다. 사진 찍는 사람들의 표정도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이지 기분이 이상했다. 칠 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라다크의 관광산업은 지난 2년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았다. 여행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외국인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기며 인도인 관광객이 주요 고객으로 자리 잡았고, 상권도 이동했다. 곰파와 모스크, 힌두사원 등 볼거리가 많은 메인 바자르, 커다란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포트 로드가 인도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반면, 배낭여행자들이 뿜어내는 낭만이 넘실대던 창스파 로드는 완전히 활기를 잃었다. 온종일 호객에 열심인 카슈미르 상인들의 목소리도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앵무새처럼 “헬로, 마이 프렌드. 쇼핑 쇼핑?”하고 말을 걸어오는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리운 장면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날마다 드나들던 창스파 최고의 맛집 ‘차이니즈 볼’도 사라졌다. 장사가 잘 돼 가게를 확장했는데 지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라다크를 떠났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초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창스파에 있는 양첸네 게스트 하우스도 그사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리웠던 그 집은 다행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빠루 게스트 하우스는 라다크에 올 때마다 지내는 고향 집 같은 곳이다. 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니 새로 지어진 객실 건물이 보여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양첸네 가족이 지난 시간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소담한 정원을 지나 가족이 머무는 집의 부엌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몰래 가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으나 분주히 움직이는 양첸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양첸!”하고 외쳐버렸다. 나를 발견한 양첸이 두 팔을 번쩍 들며 꽥 소리를 질렀다. 연락도 없이 칠 년 만에 찾아든 손님을 보고 그녀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양첸의 고운 얼굴도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말씨도 여전했다.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칠 년 전만 해도 키가 내 어깨에도 닿지 않는 작은 소년이었던 양첸의 작은아들 빨던은 콧수염 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 일을 도우며 구직 활동 중이라고 했다. 생글생글 귀여운 그의 미소는 여전했지만, ‘구직 활동’이라는 말에 어쩐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어렸을 때 키가 겨우 이만했는데. 머리통도 내 주먹만 하고.” 옛날에는 빨던의 머리통을 곧잘 쓰다듬곤 했는데, 이제는 영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침 먹어야지?” 양첸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뜨거운 버터티, 밀크티, 블랙티까지 무려 세 종류의 차를 차례로 내오더니 갓 구워낸 라다크 전통 빵 캄비르와 폭신한 오믈렛, 살구잼과 버터로 이루어진 소박한 라다크식 아침 식사를 금세 차려냈다. 칠 년이 지났지만, 양첸이 끓여낸 밀크티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글/사진 춘자

춘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전세계를 누비며 도착한 땅에 그 다음을 위한 씨앗을 뿌리는 봄의 아이. 꿈, 가능성, 도전, 연대,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일, 현대인에게 의미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모든 말을 사랑한다. 현실이 되는 꿈, 결과를 낳는 가능성, 성공을 위한 도전, 함께 성장하기 위한 연대, 남이 아닌 진짜 내가 되는 일을 추구한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를 썼고, 곧 젠젠과 함께 쓴 『카페, 라다크』를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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