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두바이 통신원][여행] 두바이의 어느 콘서트

내 맘대로 두바이 통신원 #4

 


Scene 1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OOO군을 소개합니다!!!”


피아니스트 등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사회자였는데 어느새 관객이 된 이를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건넨다. 곧이어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두 박자 동안 숨을 고른 후 연주를 시작한다.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건반 위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선율에 집중한다. 당연히 한눈파는 것도 금물이다.


어느덧 연주가 끝나고 피아니스트는 건반 위에 손을 그대로 둔 채 다시 한 번 두 박자 동안 숨을 고르고 의자에서 내려와 관객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굴리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딱 한 명이었던 관객은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심사위원으로 변신해 방금 들었던 연주에 대한 감상과 보완했으면 하는 점을 이야기한다.


피아니스트는 나의 아이, 그리고 사회자이자 관객 겸 《미스터 트롯》의 장윤정에 빙의한 심사위원은 나다. 아, 바쁘다 바빠.




피아노 한 번 배워볼래?

한국에서 지내던 시절, 일반 어린이집에 다니며 영어 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던 아이가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헬로, 바이, 예스, 노 정도가 전부였다. 급할 때 화장실에는 갈 수 있도록 ‘토일렛’이라는 단어를 알려주고 등교시켰을 정도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육 개월가량에 접어들자 신기하게도 아이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문법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 할 말 해가며 살 수 있을 만큼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됐다, 이제 됐어. 첫 관문을 넘었으니 평생 가는 취미 하나 만들어줄까?


이런 생각으로 지난여름 아이의 손을 잡고 집 근처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기쁨을 찾는 제 아빠처럼 우리의 아이도 그 관심과 재능을 이어받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이가 인생 첫 악기인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날로부터 석달 남짓 지나고, 아이는 피아노 학원이 주최하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아빠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는 싶지만 연습은 하기 싫다던 꼬마. 그랬던 아이가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니 무언의 압박을 느꼈던지 내가 이제 연습해야지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스스로 피아노 앞에 앉기 시작했다. 


이때 연주가 한두 번에 끝나버리느냐 아니면 오래도록 지속되느냐는 오로지 나의 리액션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회자 역할을 했다가 관객이 되고 이어서 심사위원까지 소화해 가며 분위기를 몰아간다. 1분짜리 연주를 듣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참으로 번잡스럽긴 하다. 그래도 제 방문 뒤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외치는 소개 멘트를 듣고는 마치 진짜 피아니스트처럼 멋지게 거실에 등장해 그 옛날 유럽의 귀족들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은 포즈로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칭찬에는 배시시 미소를 짓는 아이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백 번, 첫 번을 더 해야 한대도 난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두바이 전통거리에서의 음악회

콘서트 무대는 알 시프(Al Seef)라는 거대한 오픈 에어 쇼핑거리 한 편에 마련되었다. 알 시프는 두바이 크릭(Creek)이라 불리는 운하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과거, 두바이가 진주를 채취하고 팔아서 먹고살던 시절에 진주조개잡이 배들의 거점이었다. 오늘날의 두바이는 부르즈 칼리파며 버즈 알 아랍으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모던한 미래 도시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아직까지도 크릭 주변에는 소박했던 어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알 시프 또한 두바이 전통 거리를 콘셉트로 하여 만들어진 곳. 전통적인 건물 사이로 난 미로 같은 좁은 길을 헤매며 크고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 크릭을 따라 자리 잡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앉아 전통 요리를 즐기며 반짝이는 수면에 반사되는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고 오가는 전통 배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알 시프가 선사하는 선물 중 하나다.


알 시프에서는 두바이 크릭을 바라보며 전통음식을 즐길 수 있다


겨울이 가까워져 올 즈음이었다. 두바이에서는 더위 걱정 없이 바깥 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기. 콘서트는 늦은 오후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선선해진 이 도시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 일찌감치 목적지에 도착했다. 크릭을 바라보며 점심식사를 하고 좁은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상인들이 매대에 펼쳐놓은 물건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이면 흥정도 해보았다.


알 시프에서


그 와중에 붙임성 좋은 우리 아이는 물건 파는 아저씨 한 명을 사귀어서 아직 내가 사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은 물건을 자기가 엄마를 설득해서 돌아올 테니 다른 사람에게는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았더랬다. 아이가 무언가를 사달라고 졸라도 예정에 없던 쇼핑은 가급적 하지 않는 나이지만, 그날의 날씨, 그날의 알 시프, 그날의 몽글몽글한 마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특별할 것 없어도 너무나 귀했던 오후를 보냈다.


알 시프의 골목


콘서트, 아니, 피아노 학원의 학예회에 가까운 행사는 크릭 바로 옆에 세워진 야외무대에서 진행되었다. 이 순간을 위해 놀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매일 연습을 했던 아이는 잔뜩 긴장한 듯,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무대에 올랐으나 침착하게 연주를 잘 마무리했다. 간단하고 짧은 곡 하나를 연주하는 것일 뿐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왜 그리 떨렸을까. 우리의 아이는 언제 이렇게 훌쩍 자라 저 멋진 무대에서 의젓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까.


크릭의 야외무대에서 아이의 콘서트



우리의 알 시프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어른의 시간에 비해 아이의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저 멀리 달아나버리는 내 아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멀어지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아쉬워 가끔은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알 시프. 원래부터도 두바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지만 아이의 콘서트 이래, 그곳은 더더욱 사랑스럽고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알 시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전통거리 골목에 울려 퍼지던 내 아이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글/사진 이유미(여행하는가족)

“엄마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마흔 넘어 받은 질문이 고마워 눈물이 다 났습니다. 아이에게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오래 간직해온 저의 꿈을 한 자 한 자 펼쳐보려고 합니다. ‘여행하는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travellingfamil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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