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겨울왕국 몽골의 연말과 새해

겨울왕국 몽골의 연말

 

1년 전 비행기 창문으로 마주한 끝없이 펼쳐진 설경. 〈겨울왕국〉의 엘사는 이런 곳에서 살겠구나. 그것이 나와 몽골의 첫 만남이었다. 흔히들 몽골 하면 푸르고 넓은 초원을 떠올린다.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도. 하지만, 한국에서 비행기로 불과 4시간 남짓 떨어진 이곳의 겨울이 이토록 길고 혹독하다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밤이 되면 더 기괴해 보이는 울란바토르 제4 화력발전소

 

‘-40°C까지 떨어질 수 있다’라는 말로 몽골의 겨울을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냉수와 아아만 마시던 내가 차를 끓이게 되었고, 뜨거운 국물 요리를 선호하지 않던 입맛은 어느새 국밥을 찾아 헤맨다. 원래도 다양하게 섭취하지 않았던 채소와 과일 종류가 급감한 것은 물론이다. 난방이 시작되면 유해물질 가득한 공기가 하늘을 채운다. 극도로 건조하다 보니 코에서 피가 나기도 한다. 맨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면 동상에 걸릴 수 있다. 모자 없이 활보하면 머리통이 부서질 수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들다. 이것이 내가 지난 1년간 몽골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월동 준비는 중앙난방이 재개된 9월에 진즉 마쳤지만, 4월까지 이어질 이 극한의 계절만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여기와 똑같이 그다지 할 게 없는 남반구는 적어도 나돌아다니는 데 제약은 없었는데.

 

그렇게 북반구에서 맞이할 연말과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도시 ‘셀렝게(Selege)’로의 기차 여행이 결정되었다.

 

이 조명 온도 습도…. 완벽해!


강추위와 어마 무시한 교통 체증을 뚫고 겨우 제시간에 도착한 우리를 반겨준 오래된 기차. 내부의 열기와 노란 조명이 은근 괜찮아 보였다. 어딘가 촌스럽고 조악한, 몽골스러운 인테리어마저도 꽤 마음에 들었다. 야간 기차가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살았던 여행의 설렘이 잠시 되돌아왔다. 우리는 새벽 2시가 넘어가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몽골 전통 가옥 게르(Ger), 화로가 꺼지면 모두 얼어 죽는 것이다.

 

9시간을 달려 도착한 셀렝게는 역시나, 몽골의 여느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대와 현대가 절서 정연한 듯 묘하게 무질서하게 공존하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무미건조한 미관까지. 감상이 끝나갈 즈음 시내에서 약 30분 떨어진 게르 캠프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다. 여독을 풀고 어묵탕과 떡볶이를 해 먹었다. 천막 한쪽에 빔을 쏘아 〈아바타〉 1편을 감상했다. 늦은 밤 꺼져버린 화로에 불을 다시 지피는 데는 2시간이 걸렸다. 차디찬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담던 휴대폰의 눈이 감겼다.


장작을 태우고 쥐포를 구우며 긴 저녁을 보낸다.

 

다음날엔 어느 동산에 올라 새하얀 눈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러시아 땅을 구경하고, 나무가 나름 울창한 숲에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술만 팔던 면세점 구역은 그 구조마저도 몽골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란 게 있기는 했을까? 흩날리는 싸라기눈이 풍경을 더 괴이하게 만든다.

 

눈으로 경계가 희미해진 몽골-러시아 국경 지역


이젠 뭘 해도 흥미가 사라져버려서 이곳의 모든 게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여기가 나를 시큰둥하게 만드는 것일까. 장소보다도 동행한 이들과 보낸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기차와 게르 안에서 별것도 아닌 것에 웃고 떠들며 장난치던 순간들. 각자 1년 후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이곳의 무미건조함을 이겨내기 위한 추억 만들기가 아니었나 싶다.

 

셀렝게 여정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 정확히 24시간 후, 우리는 동쪽 어딘가로 향하는 해돋이기차를 타기 위해 다시 만났다.


 

겨울왕국 몽골의 새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뒤뚱뒤뚱 미끄러운 길을 내달려가는 내 꼴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몽골을 닮아가는 인생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곳에서는 기대되는 것이 1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불꽃놀이 한번 보겠다며 허둥지둥 서두른다.

 

울란바타르 시내 수흐바타르 광장

 

광장에 적당히 모인 사람들과 의외로 볼만했던 불꽃놀이는 무려 자정이 넘어 시작되었다. 이것 또한 몽골스럽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동영상은 길게 찍지 못했다. 이번엔 정말 얼어버린 손가락을 자를 뻔했다. 장갑 속으로 입김을 불어넣고 박수도 쳐가며 감각을 소생시켜본다.

 

아침 6시, 해돋이 기차에 탑승했다. 샌드위치와 샴페인이 칸마다 제공되었다. 그러고 보니 새해 해돋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참고로 외국인 열차 값은 몽골인의 3배인 $45. 일본인 단체 관광객과 백인 몇 명도 보였다. 얼굴에 새해 기운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눈 덮인 땅이 지나쳐갔다. 여름엔, 믿기지 않게도 초록색 풀로 가득한 초원이 된다.


동트기 전 모여든 사람들

 

약 2시간 후,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기차가 정차했다. 벗어둔 털양말과 털 신발을 주섬주섬 신는다. 모자는 두 겹에 장갑은 필수다. 이곳에선 어디 한 번 나갈 때마다 꽤나 품이 든다. 나는 겨울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직도 변함이 없는데 몽골에서 인지 부조화를 경험한다. 남극이 이런 느낌일까? 꽁꽁 얼어버린 땅에 휴대폰을 고정하고 일출을 담기 위해 타임랩스를 켰다. 휴대폰이 꺼지지 않기를. 새해 첫 소원이다.

 


장관(壯觀)까지는 아니었다…

 

오전 8시 40분쯤,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층 커진다. 나는 짧은 감탄 뒤에 손가락이 점점 무뎌짐을 느꼈다. 땅의 냉기가 신발을 파고들어 온다. 후딱 기념사진을 해치우고 얼른 따뜻한 기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 와중에 몽골 사람들은 우유를 하늘에 뿌리며 새해 소원을 빌었다. 모두 모닥불 앞에서 언 몸을 녹이며 한 번쯤은 볼만 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아마 내년엔 아무도 해돋이 기차를 타지 않을 것 같다.

 

말 타고 온 사람, 차 타고 온 사람, 기차 타고 온 사람 모두 모였다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몽골의 인상은 제각각이다. 이곳에서 보내게 될 또 다른 1년도 모두가 다르게 기록하겠지. 나에게 잿빛의 땅으로 남을 몽골. 그만큼 이 겨울이 너무나 강렬하다. 짧게 스쳐 가는 여름이 아닌 겨울에 한 번 와 보시라.

 

어쨌든 2023년도 ‘무탈’하게 보내기를. 실은 이게 제일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렵다. 마지막으로, 셀렝게 행 기차 안에서 개발새발 휘갈겨 쓴 편지 내용처럼 1년 후에도 원하던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기를.






글/사진 김정화

인류학을 공부하며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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