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설국]눈을 기다리며

국경 너머 설국 #1




“동전 세탁기는 저 아래 마트에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냉장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여기에 맥주를 두어도 되겠는걸요.”  


나는 싱크대 옆 창턱을 가리켰다. 유제품까지도 끄떡없어 보였다.  


“고기도 보관해야 할 텐데요.”  

“고기를 쟁여두고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나는 다다미방을 재게 가로질러 이중유리문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야트막한 설산雪山이 펼쳐졌다. 마침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미니 베란다에 좁은 공간이 있었다.  


“여기 두거나, 아이스박스에 눈을 채우면 될 것 같군요.”  

“소오데스까 そうですか.”  


12월의 설국雪國, 니가타였다.




"그것은 애초에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가 아니었고 우리의 진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12월초부터 2월말까지 두 달 반여 동안 이곳에서 조사를 하게 되어 체류할 곳을 사전에 물색해야 했다. 없는 인맥이나마 총동원하여 머무를 곳을 알아봐 달라 부탁하였으나 물 흐르듯 순조롭던 준비는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현지 보존회장에게 직접 허가받은 조사마저 불확실하게 될 것 같다는 전언傳言이 있었던 것이다.  


‘조사라면 3일에서 5일, 길어야 일주일이면 족한데 그토록 길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대로 타당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일부 관계자는 꽤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꺼려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보존회 회장은 영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위 ‘메신저’가 전해준 부정적 기류를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하고 ‘한 번 허가는 허가이고 그도 뱉은 말이 있으니 스스로 뒤집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결론지으며 예정대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천연 냉장고


‘이곳은 추운 곳입니다. 길은 눈으로 뒤덮여 걸어 다니기도 불편하고 밖은 물론이거니와 지내게 될 숙소마저 추울 것입니다.’ 나를 염려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러한 염려가 사실이기를 염원하는 것 같기도 한 말을 듣고 일주일 여정에 맞는 콤팩트한 짐을 싸야 하는 건가 망설인 것도 순간. 15년 만에 가장 큰 트렁크를 구입하는 것으로 나는 준비를 끝냈다. ‘국경을 넘어 저렇게 큰 트렁크를 싸 온 그녀를 일주일 만에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무엇보다 강력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도착 당일 빼곤 머무를 곳조차 없이 세상에서 가장 큰 트렁크를 달고 나는 날아왔다. ‘국경을 빠져나가면 설국이고¹, 눈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아래 행여 눈과의 첫 대면을 놓칠까 창가 좌석을 예약하였으나 12월 초순의 니가타엔 눈이 없었고 짐을 찾기에 이르러서는 택시 트렁크에 나의 짐이 들어갈 것인가 후회하게 되었다.


눈이 없는 시오자와역, 나의 무대


장기투숙이 가능할 저렴한 료칸도 알아보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방 국도가 지나는 고가 옆, 세트장인가 싶은 휑뎅그렁한 빌라 3층에 극적으로 숙소를 얻었고 계약 당일 전기를 연결해 그날부로 나는 입거자入居者²가 되었다.


‘메신저’의 전언은 사실이기도 했고 기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실’의 편린들이 소문이 되는 순간 과장과 곡해가 덧붙여져 실상과 멀어지는 만큼, 두세 단계에 걸친 ‘메신저’의 기우가 양측 간의 오해를 키운 점도 있었다. 통역으로 전달되는 일본어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뱉어내는 나의 표정 가운데 어떠한 진심을 읽어내고자 하는 그의 눈길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꼭 알려야 한다면 돌려서 표현하는 일본인의 특성상 나의 조사를 꺼려한다는 정도의 소식이라면 ‘뉘앙스’만으로도 알아듣고 계획을 접거나 절충안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나는 한국인이었고 못 알아들은 척하고 싶었다. 그것은 애초에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가 아니었고 우리의 혼네³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자아, 그러면 내주來週부터 조사를 시작해 보시지요.”

“있는 동안 일본어도 공부해 보겠습니다.”


추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좋아한다고 말은 했지만 한국처럼 보일러가 없는 방은 서 있거나 앉아 있기 선득했고, 바짝 몸을 뉘이면 한기寒氣는 점차로 코끝을 엄습해 왔다. 나는 전기담요를 장만했고 ‘역시나 춥군요.’라는 말로 선의善意의 코타츠⁴를 무료 렌탈받아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7도의 아침


일 없고 아는 이 없는 이곳을 이렇다 할 일정 없는 여행객처럼 돌아다녔고, 때론 일을 보았고 눈에 띄는 곳과 후미진 곳에 들어가 낯선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깊고 이른 어둠에 잠을 청하거나 어느 밤은 부엌바닥의 냉기를 막아보겠다며 길고 긴 매트를 짜내었다. 날씨는 서울보다 따뜻했고 다만 내일은 눈이 내리기를, 그렇지만 잠든 새 내려버리는 것은 반칙이라며 간간이 커튼을 들추어 보다 잠이 들었다.


다다미방에서 베를 짜다.


같은 구간의 열차를 세 번 놓쳤고 온 세상을 뒤덮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눈은 없었지만, 나는 지나가버린 열차를 보낼 수 있었고 아직 오지 않은 눈을 기다릴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고 그는 틀림없이 올 것이므로.


설국은 거짓말처럼 틀림없는 곳이기에.


기차를 기다리며.


1)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 인용
2) 입주자
3) 本音, ほんね : 본심, 진심
4) 坐式의 상아래 전열기구가 있고 이불이나 담요가 덮여져 상 아래가 따뜻해지는 일본의 난방기구




글/사진(2-6) 겨울베짱이

방방곡곡 베 짜는 조사를 하거나 직접 베 짜는 것을 즐긴다. 눈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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