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화보시절

단편 기획기사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주 옛날 광고회사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수집하러 부산에 갔었다고, 그곳의 TV에서는 일본 방송이 잘 잡히니까, 여관방에서 일본방송을 보며 자신이 담당하게 된 광고의 모티브를 찾아냈다고, 모티브라는 미명하에 통째로 베끼는 게 성행했었다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광고회사가 아닌 편집디자인 회사에 다녔던 나는 물론 부산에 갈 일은 없었다. 대신 책을 디자인하는 회사이니 만큼 디자인에 도움이 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책들을 슬쩍슬쩍 베끼곤 했다. 벤치마킹이라고 해두자. 디자이너들이 볼 책을 선정하고 구입하는 일은 회사 아트디렉터의 아주 쏠쏠한 재미였다. 샘플을 들고 찾아오는 판매상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이것저것 주문했고, 서비스로 한두 권쯤 얻어 본인이 몰래 보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입하는 책들 중에 <가정화보家庭畵報>라는 일본 잡지가 있었다. 월간 디자인이니 유럽, 미국의 보그, 엘르 같은 잡지를 물리치고, 유일하게 매월 구입하는 책이었다. 깔끔한 디자인과 수준 높은 인쇄가 장점이긴 했지만, 매월 살 정도의 책은 아니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고 “왜 사지?”라는 의문이 항상 따라 붙는 책이었다.


요즘도 일본의 서점에 갈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이 잡지를 찾아본다. 하지만 꼭 사야 하나, 망설이다 내려놓고 만다.


한국의 여러 디자인 분야가 일본을 빼고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 디자인회사에서 일본 잡지 한 권은 사무실의 물통정수기처럼 ‘그냥’ 또는 ‘꼭’ 있어야 되는 구성품 정도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그땐 그랬다. 20년 전 쯤엔 그랬다.


물통정수기의 물을 받아 믹스커피를 타 먹듯 뒤적거리던 이 잡지는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음식과 옷, 집에 대한 얘기들과 전통문화, 여행 등을 주로 다뤘는데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미지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화려하게 어필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두어 번쯤 더 들춰 볼 때 “아~”하며 느껴지는 기품이 꽤 강렬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이미지를 나중에 내가 경험해 본 일본의 여행지와 비교한다면 아마도 교토의 은각사와 가장 비슷하지 않나 싶다. (김성근 감독 인터뷰를 너무 많이 봤나?)


은각사


<가정화보>를 매월 구입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몇 년쯤 더 지나서 은각사에 들어섰을 때 잊고 있던 잡지 속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교토에 이틀간 있었던 나는 금각사와 청수사, 이조성과 기온에 갔었고, 은각사는 교토에서의 맨 마지막 일정이었다. 앞의 아름답고 화려한 곳들과 달리 은각사는 은은하고 고즈넉했다. 마치 <가정화보>에 실린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정원과 료칸들처럼 환상적이었다. 이 풍경에 매료됐던 나는 소박하고 기품 있는 장소를 생각하며 두어 번 더 교토를 찾았지만 교토는 대부분 화려했고, 더 이상 이 도시에서 <가정화보> 속 풍경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정화보> 속 풍경은 점점 잊혀 졌고, 디자인의 패러다임은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스타일로 옮겨갔다. 교토를 지루해하던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일본 여행은 도쿄의 다이칸야마나 지유가오카 같은 곳에서 그릇을 고르거나 유니클로에서 아들의 티셔츠를 고르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왜 일본까지 가서 유니클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고 있던 <가정화보> 속 풍경을 다시 만난 것은 눈 덮인 다카야마高山에서였다.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는 온천욕을 생각하며 도야마富山 근처의 오쿠히다奧飛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숙소에서 가까운 곳이니 산책이나 하자며 들른 곳이었다. 교토의 기온과 산넨자카를 반씩 섞어 놓은 듯한 기미산노마치라는 거리가 있었고, 거리 위로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온처럼 비밀스럽거나 거만하지 않았고 산넨자카처럼 부산하지 않았다. 꽤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혔다. 도시는 멈춰진 듯 조용했다.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잡지 속 화보로 만들어 두고 싶은 풍경이었다.


눈 덮인 다카야마


술을 파는 가게에서 따뜻한 감주를 한 잔 마시고 느긋하게 걷기도 했고, 에도시대의 관청인 다카야마진야가 보이는 찻집에서 단팥죽을 먹으면서 눈을 구경하기도 했다. 찬찬히 걷다보면 시내를 가르는 개천이 있고 이 개천을 지나는 작은 다리가 곳곳에 있었다. 인구 10만이 안 되는 이 도시는 산책을 위한 도시였다. 작은 도시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굳이 어디를 찾아가지 않아도 곳곳이 아름다웠다.


물론 눈 내리는 풍경이 어디든 아름답지 않으랴만.


미야가와


시내를 가르는 개천의 이름은 미야가와라고 했다. 이 개천을 따라 아침마다 작은 장이 열리는데, 한국의 시장처럼 다양한 채소와 된장, 절임음식과 반찬들 그리고 갖가지 생필품과 기념품을 팔았다. 시장의 초입엔 이 지역의 명물인 히다 소고기를 꼬치로 구워 파는 곳이 있었다. 고베, 마쓰자카와 함께 일본 3대 쇠고기인 히다 규牛를 작은 생맥주 한 잔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히다 규 꼬치를 먹는 내 표정을 진지하게 살피더니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엄지손가락을 올려 주었더니 역시 히다규가 최고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히다 규와 맥주, 내 생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장을 빠져나오니 자동차가 다니는 도시 그대로의 모습이 나오고, 눈 때문인지 큰 도시가 아닌 탓인지 사람들의 걸음은 느렸다. 조심스럽게 걷는 게 아니라 느린 걸음이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듯 나도 여유롭게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오쿠히다 온천에 숙소를 정했으니 다시 돌아가야 했다. 온천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이라는 얘기에 별 생각 없이 들른 곳이었는데 다카야마는 뜻밖의 소득이었다. 책 몇 권과 함께 찾아와서 작은 호텔을 얻어놓고 일주일쯤 지내다 가고 싶은 도시였다. 사실은 “여기서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고의 여행 후유증이었다.



TIP

다카야마는 나고야에서 가는 방법과 도야마에서 가는 방법이 있다.

나고야에서 히다와이드뷰를 타고 게로온천에 들렀다 다카야마로 가는 기찻길이 환상적이지만 매력지수 제로에 가까운 나고야라는 도시가 마음에 걸린다.

반면 항공편이 다양하지 않아 할인항공권을 찾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도야마는 일단 아름다운 도시이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도시 건너로 보이는 일본알프스의 연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도시를 찾은 본전을 뽑을 수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 간스이 공원점은 덤.

이곳의 눈도 엄청나다. 일본의 여름철 비처럼 겨울엔 눈이 그렇게 내리는 모양이다.

다카야마처럼 오래된 거리와 사찰 등을 갖고 있는 도시를 ‘소小 교토’라고 부른다. 구라시키, 히타처럼 익숙한 도시들도 소 교토에 포함된다는데, 다카야마는 소교토의 선두주자쯤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글 김경일

'디자인 회사 DNC'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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