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서 보낸 사계]한 잔 술, 심장을 녹이다

들에서 보낸 사계 #5



겨울 참 좋다. 현관문만 열면 엘사 언니가 꽁꽁 얼려버린 겨울왕국이 펼쳐지고, 새벽녘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에 놀라 잠이 깨도, 농부는 겨울이 좋다. 요즘 아웃도어 의류가 얼마나 잘 나오는가. 이깟(?) 추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정 추우면 집을 안 나가면 그만. 기름값이야 이럴 때 쓰라고 그 새벽부터 들에 나가 일하지 않았겠는가!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기 전 가까스로 깨달은 것이 ‘시간’이다. 인생을 깊게 만드는 것이 시간이고, (한정된) 내 시간을 주는 것이 가장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겨울이 시간을 주었으니, 그 추위까지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낮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잠들어 있는 오디오를 깨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아니다. 나에게는 끝없이 시간을 달라고 보채는 두 아이가 있다. 아내가 인근 초등학교에서 바깥양반 노릇을 할 동안 나는 두 아이와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하고 이별한다. 하늘에서 바닷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철새들이 삼각대형으로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자면 그렇게 재밌을 수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들을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는데, 애쓰는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멍하니 하늘을 볼 수 있는 잠깐의 여유가 좋다.



눈이 온다. 어른이 되고, 운전을 하면서부터 눈은 그리 반가운 게 아니었다. 눈이 만들어내는 설경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만드는 불편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눈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눈을 좋아하게 됐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의 소리는 행복 그 자체이다. 손발이 꽁꽁 얼어도 집에는 절대 그냥 안 들어간다. 뭐가 그리 좋을까 싶다가도, 어느덧 눈밭에서 뒹굴던 유년시절의 나를 만나게 된다. 동상 직전의 손으로 들어가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인자한 배를 내어주셨다. 그때 할아버지의 품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어른들이 많이 있다. 우리 아이들을 포함해도 평균 나이가 70세는 넘을 우리 마을, 그분들을 생각하니 겨울이 좋다는 내 생각이 이기적인 느낌이 든다. 평소에도 할 일이 별로 없고, 겨울이 되면 생존 이외에는 아무 일이 없는 분들. 찾아주는 이도 없는 그들이 느끼는 겨울은 얼마나 고될까. 다행히 낮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도 같이 해 먹고, 여러 놀이를 즐기신다. 하지만 난방비 아끼려고 냉골이 된 방안에서 긴 밤을 보내기 얼마나 외롭고, 고될까. 그분들 어깨 펼 따뜻한 봄이 오면 좋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술 익는 향기가 있는 산사원이 떠올랐다. 포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이다. 전통술 제조업체 배상면주가에서 만든 문화 체험 센터인 이곳은 여러 가지 매력이 있다. 전통술의 역사,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가양주 문화관도 좋고, 넓지는 않지만 고즈넉이 걸을 수 있는 정원도 좋다(산사원은 ‘산사나무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곳은 문화관 지하에 있는 술 판매 장터와 정원 입구에 있는 술 숙성 공간 세월랑이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술이 아주 많다는 것이고, 그곳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판매 장터에서는 배상면주가에서 나오는 신선하고 다양한 술을 마실 수 있다. 입장료를 내면 잔을 하나 주는데, 그 작은 잔은 얼마든지 많은 술을 담을 수 있다. 주말에 단체로 와서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부러운 일이지만, 가족과 함께 움직이는 나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들어서면 행복해지는 것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술은 어떤 맛일까? 저 술은 어떤 향일까? 이걸 다 먹으면 어떻게 될까? 갖은 모양과 갖가지 말로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그들 앞에서 어느덧 나는 웃고 있었다.



처음 산사원에 갔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원에 먼저 들렀다. 뭐든지 보는 것으로 배우는 게 익숙한 나는 그곳을 보고 느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판매 장터로 향해 출근도장을 찍는다. 거기서 여유롭게 몇 잔 하고 정원에 들어서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늘 경쟁하듯 바쁘게 살았는데, 여기서는 좀 천천히 가도 괜찮을 것 같다. 세월랑에서는 500여 개의 항아리에서 저마다의 속도대로 술이 익어가고 있는데, 겉으로 보기엔 다 똑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빨리 가려 애쓰지 않아도 다 같은 게 아닐까.



정원에는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와 다양한 한옥 건물이 있다. 과하지 않다면 마루에 걸터앉아 한 잔 술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원의 끝에 우곡루가 있는데, 2층 누각에 오르면 세월랑을 포함한 산사원 전경과 그 뒤로 펼쳐진 운악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단풍 좋기로 유명한 운악산이라 가을도 좋지만, 눈 쌓인 정원과 산을 볼 수 있는 지금이 더 좋다. 추우면 술 한 잔 마시면 되고, 그래도 추우면 한 잔 더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눈과 비, 찬바람 다 맞고 오랜 시간을 견뎌 내 앞에 온 술은 이리저리 치여 얼어붙은 내 심장도 녹게 만든다.





글/사진 농촌총각

인생의 절반에서 새로운 기회가 한 번은 더 올 거라 믿는 농부. 좋은 책, 음악, 영화, 사람들로 가득한 문화창고를 꿈꾸고 있다.
mmbl@naver.com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