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의 장면들]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1

몽상의 장면들 #3



#1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0루피면 마실 수 있는 짜이를 뒤로 한 채 익숙한 메뉴가 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한국과 다를 바 없는 가격의 카푸치노, 카페라테를 시키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흔하게 하던 행위들 - 카카오톡, 페이스북, 친구와 가족에게 안부 전하기. 스피커에서 흐르는 음악은 해발 5,359m 카르둥라Khardung La를 지날 때 내 귀에 꽂혔던 Bonobo의 . 애플 뮤직 플레이리스트 중 유난히 마음에 든 음악이었다.


비 내리는 도로는 교통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양손 가득 내일의 양식이 들려 있었지만, 호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가까운 거리여도 그곳 역시 해발 3,500m의 고산이었다.



레Leh에 처음 도착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만큼 나 자신이 비루해졌던 날이 또 있었을까.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며 쉬운 단어의 뜻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멍청해지고,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체중을 실감했다. 무기력함에 눕고만 싶은 기분, 비 오기 전 땅이 날 잡아 끄는 기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다가 그대로 기어가고 싶은 기분.


거기서 마노즈와 하씨를 처음 대면했다. 그들은 여행사 대표와 드라이버였다. 악수와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고 지프 위에 힘차게 짐을 얹는 사내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다 시내 구석의 어느 호텔 앞에 내려섰다.


무의 경지.


라다크에는 생명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날것의 흙과 산뿐이었다. 죽음을 환희처럼 느껴지게 하던 바라나시 화장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것들만 존재하는 공간. 그곳 호텔에 도착하자 웰컴 짜이와 흑인도 백인도 아닌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좀 누워. 그래야 해. 누워야지 걸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자.”


흰 천이 정갈하게 펼쳐진 침대를 보며 인도의 침대가 이상하게 깨끗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위로 쓰러졌다. 낯선 냄새와 공기와 환경을 관찰하다 그렇게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몇 시간을 내리 잤다. 겨우 일어났을 땐 타이레놀과 고산병 약 한 알이 손끝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1층 레스토랑으로 걸어가던 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여든 살쯤 된 노인이라 생각했겠지.



라다크에서의 보름. 그 시간은 어쩌면 태초를 닮은 듯 막연한 땅, 불가해한 요소들이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곳에 관한 기억이다.


생명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곳곳에 살아 있는 생명을 보며 무엇보다 질긴 생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는 자극을 받았다. 매 순간, 매 시간이 무한히 의미 있었고, 전혀 무의미했다.


그곳에서 난, 시간이 날 때마다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글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하고 때론 푸념이 되기도 했다. 그 글들은 죽어 있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무한한 보류 같은 느낌이었으나 결국, 내 몸 구석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내 영혼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아침 드실래요?”


놀라서 시계를 보니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어떤 것도 몸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어떠한 계획도 없이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약을 먹고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으로 컨디션을 조절한다. 분명 춥지 않은데 핫 패치를 붙이고 파시미나 머플러를 두르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두꺼운 이불을 덮는다. 5시부터 8시까지 뜨거운 물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그 시간에 맞춰 샤워를 해야 한다. 고산지대라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고 징그러운 벌레 같은 게 없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땅이 날 잡아당기는 것처럼 하염없이 늘어져 눕고 싶은 생각이 든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끝이 저릿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오늘만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고 추스르며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다. 이제 괜찮아 진 건가, 식당에 내려가자마자 문 앞에까지 번져 있는 음식 냄새에 차마 더 들어갈 수가 없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들고 바깥공기를 마시며 앉아 있기로 한다.


메슥거린다. 어지럽다. 토마토를 가져와 설탕을 조금 뿌려 먹는다. 치킨 요리가 보여 몇 입 물고 나니 몸이 한결 낫는 것도 같다. 블랙 티까지 한 잔 마시고, 아빠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가져다주는 약을 한 알씩 받아 들고 삼켰더니 더 좋아지는 것도 같다. 근데 막상 누우니 정말 너무 피곤하다. 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 하루 종일 먹고 잔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피곤할 수 있을까. 눈을 뜨고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또 자야겠다.


2017년 7월 21일. 라다크에서 보낸 날들의 시작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2


레를 둘러싼 고성. 화려한 양식의 건축물을 많이 본 사람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흙덩어리 산과 고개 넘어 또 흙산, 그 흙으로 만든 집, 왕궁, 곳곳에 버려진 쪼개진 돌, 사람들의 표정, 개들의 표정, 그 가운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와 쪼(야크와 소 사이에서 태어난 동물)를 보며 ‘소! 쪼!’를 외치기 바쁜 우리들. 여기저기 불경을 써 놓은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바람에 날리고 그걸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매년 라다크로의 길이 열리면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오는 사람들.


7시간 조금 넘게 직항기를 타고 뉴델리에 도착해 다시 국내선으로 변경, 한 시간가량 산을 넘고 구름을 뚫고 히말라야 산자락을 지나 도착한 이곳은 온통 흙 천지다. 마치 인류 최초의 도시를 연상케 한다. 상상 속의 소돔과 고모라. 흙먼지와 추위와 더위가 공존하고 조금만 빨리 움직여도 심장박동수가 100을 훌쩍 넘는 곳. 그럴 땐 숨이 차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다. 보이지 않던 핏줄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보는 이마다 걱정을 하게 만든다.


라다크는 원래 왕국이었다. 그리고 독립국이었다. 1960년 인도 정부에 편입되었고, 현재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에 속해 있다. 티베트와 중국과 인도 경계에 있어 어느 누구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으며, 고산지대의 척박한 땅을 오래도록 지켜 온 사람들이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보이는 동물은 야크와 파시미나 염소뿐이고, 멀리서 보면 돌처럼 새카만 야크들이 해맑은 사람들의 등을 따라 옆으로 걷고 있다. 이방인들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일 년에 딱 3개월 정도. 반면 노마드들의 행적은 유난스럽지가 않다.



매번 여행길에 펭귄클래식 한 권을 들고 간다. 나의 아이팟에 들어있는 음악처럼 소중한 책들이다. 그것들로 인해 나의 여행은 감미롭고 새로우며 또, 지루하지 않다. 이번 라다크 여행엔 (어쩌면 아무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앙드레 브르통의 추천이 곁들여진 쥘리앙 그라크의 책을 가져 왔다. 그의 책은 1900년대 중반 프랑스의 서늘한 문필가들의 글을 닮지도 않았고, 날것의 예술이 부유하던 시대상과도 닮은 듯 달랐다.  


“풍경의 수상쩍은 침묵은, 갑자기 멈추었다 주저하듯 다시 시작하는 바와, 그것의 불균등한 간격이 낳는 기이한 유예의 느낌 때문에 한층 더 뚜렷이 감지되었다. 그을린 듯한 하늘 아래, 잠든 습기와 미지근한 빗속을 자동차는 한결 조심스레 나아가며 이 의심스러운 여행 위로 틈입의 덧없는 뉘앙스를 던졌다.”


라다크에서의 독서는 황홀한 착각과도 같은 시간이다. 읽고는 있지만 읽고 있지 않으며, 눈은 글씨를 훑어 내려가지만 산소가 부족한 뇌는 단어를 이해하지도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루 평균 7, 8시간 오프로드를 달렸다. 대부분의 끼니는 숙소에서 차에 실어준 런치박스로 때우거나 골짜기에 가끔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오믈렛(상상과는 상이한 모습이다)을 먹거나 하며 해결했다. 운이 좋으면 중국식 달걀 볶음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식사는 살기 위한 수단일 뿐 어떠한 미식 행위도 아니고, 먹는다는 감각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지나가는 소를 보며 얘, 너 맛있게 생겼다, 중얼중얼거렸다. 난 정말 간절하게 너의 업진살을 먹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미안하고, 또 불경스럽지만. 이 나라에서 도축은 금지행위다. 만약 누군가 그 소를 잡아먹었다면 곧바로 감옥행이다. 금기와 위계와 질서가 살얼음판처럼 존재한다.


흙처럼 쭈그리고 앉아 흙을 뭉개는 사람을 봤다.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는데, 그럼 이곳 사람들이야말로 본연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이겠구나. 온갖 편리한 것들 사이에서 사는 나는 신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사는 걸까. 인간성이 파괴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그들은 눈 뜨지 못한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안타까운 인생이다. 그들 눈에 나는 어떨까? 역시나 불쌍한 존재일까? 세상에서 가장 극적인 자연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눈을 하고서, 다 똑같이 되기 위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찾고. 의아해 보일지도 모른다.


모두 같은 눈,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제시한 눈을 가지기 위해 애쓰며, 타인이 말하는 정상을 포기 못 한 채 온갖 후회로 살아가는 삶.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맞게 사는 방식을 새로이 만들지 못하는 삶.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왕궁에 다녀왔다. 흙더미 안에서 나와 비슷한 눈, 코, 입, 얼굴 형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눈빛도, 어색해하는 표정도, 미묘한 생김새도 나와 참 많이 닮았다.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 걸까? 나는 무엇을 보고 사는 걸까? 제대로 보지 못할 바엔 눈을 감고 지내는 것이 나을까?  


“삶에는 고지告地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특권적인 아침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평소보다 길어지는 한가로운 서성임을 통해 한층 더 위중한 어떤 음이 울리는 것이다.”


라다크에서 독서는 황홀한 시간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데 문장을 옮겨 적다 보면 어쩐지 이미 이해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 과정이 보고 있으면 어떤 의미가 읽히는 듯한 라다크의 살풍경과 많이 닮아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현재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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