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있지만 떠난다]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여운

떠나 있지만 떠난다 #3



오카야마岡山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라시키 미관지구倉敷美観地区를 떠올린다. 일찍이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이곳은 여전히 90여 곳의 창고 건물이 남아있어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알맞은 햇살에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기자기한 상점가들 사이로 구석구석 나 있는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해가 지고, 하나 둘씩 켜지는 가로등에 운하는 더욱 빛난다.


구라시키 미관지구


오카야마현 남쪽에 위치한 코지마児島는 일본의 청바지 산업이 시작된 곳이다. 1960년대 일본 최초로 청바지 생산에 성공했다. 한때 일본 대부분의 청바지를 이곳에서 만들었고, 그때 에드윈 같은 일본 고유 청바지 브랜드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진 스트리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코지마 역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와슈잔鷲羽山 전망대였다. 세토내해瀬戸内海와 세토대교瀬戸大橋를 볼 수 있다는 전망대. 정상에 올라서서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병률 작가의 책에서 봤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와슈잔 전망대에 오르는 길


여행을 가면 나는 그렇게 부지런해질 수가 없다. 매일 알람이 울리면 손으로 주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은 뒤 기계적으로 알람을 꺼 버린다. 그리고는 아 10분만 더!!를 외치던 내가, 여행만 오면 글쎄 한 번에 눈이 번쩍 떠지고 단번에 이불을 박찬다.


현에서 현을 이동하는 날에는 열차에서 하루를 보낸다. 오카야마현에서 돗토리현鳥取県으로 이동하는 열차 안. 책 읽거나 잠자거나 (대부분 잠자는데 시간을 보냈다) 멍하니 창문 밖으로 휙휙 일정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을 쳐다보고 있거나.


갑자기 눈이 내렸다. 응? 눈이라니? 난 당연히 도쿄보다 아래에 있어 덜 추울 것으로 생각했다. 춥기는커녕 돗토리 사구가 있어 오히려 따듯하고 건조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도쿄보다 사계절이 훨씬 뚜렷하다고 한다. 나이를 한두 살씩 먹어감에 따라 점점 몸이 약해지나. 어렸을 때는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도 잘만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추운 바람에 뼈가 시리다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직 그대로인지 여전히 흰 눈을 보면 설렌다.


이른 아침. 홀로 사람 없는 사구砂丘를 거닐어 봤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모래 언덕 너머의 파도 소리 뿐. 이윽고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나를 앞질러 뛰어갔다. 그러고는 저 너머의 바다를 보기 위해 모래 언덕을 오른다.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에 코웃음 쳤다.


“그깟 언덕 뭐가 힘들다고.”


몇 분 뒤. 내가 그렇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우습게 보였는데 생각보다 가파르고 거대해서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역시 무엇이든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구나.


돗토리 사구


회상을 하는 사이에 열차는 목적지 히로시마현 후쿠야마福山에 도착했다. 후쿠야마 역에서 버스로 20분이면 가는 도모노우라鞆の浦는 옛 조선 통신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그 외에도 <벼랑 위의 포뇨>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경지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제작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곳에서 6개월을 머물면서 영감을 얻어갔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조선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도모노우라를 방문했던 이방언이라는 사람은 “日東第一形勝(일동제일형승 : 일본 제일의 경치)”이라 칭송했다고 한다. 그 경치를 보고자 제일 먼저 후쿠젠지福禅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절 이방언이 보았던 풍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그물들. 소박한 풍경들.


도모노우라 후쿠젠지


도모노우라 마을의 정경


나는 바닷가 마을에 대한 왠지 모를 로망이 있었다. 부산과 같이 크고 번화한 곳보다는 작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 말이다. 이런 곳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여기 도모노우라도 그렇고 같은 히로시마 현의 오노미치尾道, 도쿄 근교 가나가와 현神奈川県의 가마쿠라鎌倉 같은 바닷가 마을에 갈 때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겨운 느낌이 든다.


내일이면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돌아간다. 항구에 있는 상야등을 중심으로 조용히 마을을 산책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저기 보이는 노란색 건물이 애니메이션 '벼랑위의 포뇨'에 등장하는 집이다




글/사진 정인혜

‘앞으로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라는 생각에 돌연, 평소 동경하던 도시인 도쿄에의 유학길에 올랐다. 여행하며, 산책하며, 사진 찍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다.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37mid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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