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온천, 대나무의 벳푸]우린 단지 스쳐간 인연이었을 뿐인데

바다, 온천, 대나무의 벳푸 #1



벳푸에 처음 왔던 건 3년여 전의 일이다. 제주도에서 일하던 빵집을 그만두고 규슈에 사는 애인(지금은 결혼한 파트너, G)을 만나러갔다. 우린 현해탄을 마주보는 8층의 원룸에서 밥을 먹다가 '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했다. 나에게는 여행 안의 여행인 셈이었는데 얼떨결에 딸려오는 부록을 펼쳐보는 것처럼 아무 기대도 정보도 없는 결정이었다. G는 온천으로 유명한 벳푸와 유후인 행 고속버스 왕복티켓을 예매했다.


1월 중순 오후 도착한 벳푸는 오래되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관광지로도 유서가 깊지만 길거리엔 서민들의 생활감이 더 짙게 배어있었다. 상점가의 간판은 세월을 먹어 어딘가 나지막한 색을 띄고 그 아래 할머니들이 저녁거리용 야채를 고르고 있었다. 지역에 유명한 국제대학교¹가 있어 젊은 외국인학생들도 눈에 띄고 물론 겨울온천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도 줄지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 전체적으로 관광객은 관광객, 온천하려면 온천해라 우린 우리의 일상을 살리라는 쿨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중학시절을 보낸 온양온천이 떠올라 그 쿨함이 은근 푸근했다.


우린 역 근처의 값싼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밖에 나왔다. 해가 일찍 떨어져 사위가 어두워지자 상점가 뒷골목의 향락가에 하나둘 불빛이 켜졌다. 배가 고파져 요기라도 할까 기웃거리면 담배연기 자욱한 선술집이거나 불온한 물랑루즈같은 곳이라 몇 번이나 골목을 맴돌게 됐다. 결국 밖에 카운터가 나와 있는 집에서 엄청 짠 라멘을 먹었다. (서서히 알게 되었지만 일본라멘은 짠맛이 꽤 강한데다 벳푸가 있는 오이타 현이 규슈에서도 가고시마 현과 더불어 요리가 짜다.) 짠 라멘은 러시아의 위스키처럼 찬바람 속에서도 몸을 확 덥혀왔다.


상점가를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열려있는지 어떤지 미묘한 커피집의 간판을 발견했다. 나카무라 커피. 아래엔 “since 1949”라 쓰여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왼쪽은 테이블 홀, 오른편엔 카운터 홀이 있었고, 카운터엔 단골손님 한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백발의 마스터가 작은 스토브를 끌어다주었다. 금빛 액자가 즐비한 텅 빈 공간에 갑자기 클래식이 울려 퍼졌다. 커피 한잔 마시려한 것뿐인데 주인할아버지를 분주하게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린 그냥 커피를 주문했고 조금 미지근한 커피가 유럽식 커피 잔에 담겨 나왔다. 손님이라곤 마스터의 한가한 동네단골 몇몇이 전부일 것 같은 이 조금은 진부한 가게가 어떻게 70여년을 이어온 걸까. 커피 집을 나와 돌아다니니 벳푸의 많은 상점이 별 다르지 않았다. 가게도 간판도 주인도 가늘고 기일게 서로에 기대어 장사라기 보단 어떤 풍경을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관광객들은 환락가나 선술집, 온천이 아니면 어디에서 ‘관광’이란 걸 하고 있는 걸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고급 료칸이나 호텔에서 미식을 즐기거나 옆 마을 유후인의 흥청대는 관광지에 가는 것 같다. 역전의 재미없는 도미토리에 짐을 맡겨놓은 우린 이 늘어나지 않는 밤거리를 어찌 할 수 없어 한잔 걸치기로 했다. 벳푸역의 기차선로 아래 의심스런 분위기의 상점가를 따라 걸으니 아까의 카페처럼 영업을 하고 있는지 확신이 가지 않는 바가 나타났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뜬금없는 장소였다). 용기를 내어 들어가니 빔 프로젝트로 쏘아올린 J-pop 아이돌의 공연 영상 아래 카운터의 통통한 남자가 두어 명의 여자 손님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어? 누군가와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


주인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손님이 들어와 놀란 모양이다. 아, 아니요. 쭈뼛대자 재밌는 놈들이네 이런 곳에 다 오다니 하는 듯이 주인사내는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묻는다.


“혹시 아이돌 좋아해?”


아, 아니요…. 거짓말이라도 아이돌 팝을 좋아한다고 할 순 없었다. G는 클래식 마니아에 나는 닐 영이나 밥 딜런 계이니, 우린 어쩌자고 이런 무서운 오타쿠 클럽에 들어오게 된 걸까. 사내는 난 엄청 좋아해! 라고 말하며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정확히 생각나진 않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일본 술을 록으로, 따뜻하게 각각 마셨던 것 같다. 술은 꽤 세서 저녁으로 먹은 라멘 이상으로 몸을 덥혀왔다. 오타쿠 맨은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어서 오토시²라며 무언가를 내왔다. 두부를 짓이겨서 포도와 섞은 부도우노시라아에ぶどうの白和え였는데, 이 기상천외한 메뉴는 고급 료칸에서 내오는 반찬 이상으로 깊고 섬세한 맛이 났다. 보통은 두부에 야채나 해초, 고구마 등을 섞지만 포도가 들어가자 반찬도 아니고 디저트도 아닌 것이 이 기묘한 장소와 잘 어울렸다. 이 ‘부도우노시라아에’라는 요리는 삼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이렇게 벳푸는 부록집의 작은 코너처럼 가볍게 스쳤지만 뭐라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으로 인상이 오래 남는 도시였다. 인생의 알 수 없는 흐름으로 올해 4월부터 대나무공예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의 애인과 벳푸의 오래된 아파트에 이사하게 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예전의 내 자신이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벳푸의 가게주인들보다 더 입을 벌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린 부동산을 몇 번이나 드나든 끝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대신 바다가 완전히 보이는 5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을 빌리기로 했다. 여름에 해변에서 불꽃축제가 열리면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보듯이 하늘을 보리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바다가 보이는 동쪽에서 아침 해가 떠 자고 있는 방안에 햇살을 사정없이 퍼부을 때, 주방 쪽 베란다에서 서서 멀리 산등성이 여기저기 하얀 온천열기가 퐁퐁퐁 솟아오르는 것을 볼 때, 여긴 벳푸이지, 실감하게 된다.


벳푸는 이방인으로 왔을 때, 조금 시큰둥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조금 지내다보면 반대로 두루뭉술한 그 태도가 지역민에게도 관광객에게도 평등하여 따뜻함마저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 묘한 도시와 얼떨결에 연을 맺게 되었지만 어쩐지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다이닝. 4월 초의 벳푸는 아직 추워 등유난로를 때야했다.


바다가 보이는 침실. 예전에 살고 있는 시골집의 짐들을 열 번에 걸쳐 5층까지 들어 나르고 소주 마시듯이 카페인을 들이켜고 있는 나.
맑은 날엔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선명하다.


주방 베란다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 산 쪽의 온천이 날이 좋으면 퐁퐁퐁, 흐린 날엔 펄펄 날린다.


대나무 공예 온천가방. 백화점의 생활 잡화 특별전에서 학교의 대선배가 판매하고 계셨다.
위의 손잡이는 대나무를 구부려 만드는 디자인이 많지만 이 분은 직조가 유명한 쿠루메라는 곳에서 조각 천을 싸게 구입하여 이용하셨다.



1) 리츠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교, 줄여서 APU. 학생의 반 정도가 외국인이다.
2) お通し : 서비스로 나오는 기본안주.




글/사진 윤민영

한국에서의 별명은 차쿠리. 일본에선 미-짱. 규슈 오이타현의 벳푸에서 바다가 환히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 대나무가방을 들고 대나무공예를 배우러 다닌다. 대나무가 있는 마당에서 댓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벗삼아 슥슥 작업하면서 늙어가고 싶다. 조선 시대 장인들처럼 편안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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