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집]도쿄 이곳저곳 : 10년 만의 도쿄 여행

도쿄 특집호 #6



내 환상 속의 도쿄 여행 이미지. “홀로 도쿄에 여행을 간다. 아침 식사로 오늘의 커피와 두꺼운 토스트 두 조각, 스크램블 에그에 소시지, 버터와 딸기잼. ‘다방 모닝 세트’를 앞에 두고 잠시 숨을 고른다.”


눈을 감고 어느 한적한 일본 동네 다방에서 여행 에세이 『도쿄 싱글 식탁』에 등장하는 다방 모닝 세트를 먹는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눈을 뜨면 모닝 세트 대신 아이 둘이 내 앞에 있다. 나 혼자 책임져야 하는.


도쿄는 10년 만이었다. 잘 생각해보니, 여행으로는 처음이었다. 도쿄에서 1년 어학연수를 하고 3년 동안 출장 다니긴 했지만, 여행으로 간 도쿄는 처음이었다. 그래, 처음은 다 서툰 거야.


공항에서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신주쿠로 향했다. 기차는 역시 편하고 쾌적한 교통수단이다. 교통비가 엄청난 일본에서 왕복 4,000엔짜리 티켓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 호텔 그레이서리 신주쿠에 체크인했다. 친절한 호텔 직원은 무려 30층 최고층 트윈룸을 줬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얼굴을 빳빳이 들고 “좋은 방 주세요”라고 애교 섞어 말한 것이 효과가 있었나? 호텔뷰는 환상적이었다. 도쿄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 8층 테라스의 고지라 머리도 인상적이다. 몇 시간(?)에 한 번씩 포효하고 저녁에는 조명도 반짝반짝. 특별히 고지라 같은 괴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신주쿠라 접근성이 좋고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선택한 호텔이다.




미리 맛집을 검색하는 철저함도 좋지만 직접 가서 고르는 재미도 있다. 도쿄의 첫 식사는 단지 간판이 눈에 띄어서 들어간 숙소 근처의 <스시 마미레>라는 초밥 집이었다. 미소시루(된장국)도 공짜가 아니라 따로 파는 가게였다. 아, 내가 왜 미리 저렴하고 맛있는 집을 알아두지 않았던가. 초밥이 비싸서 적게 시켰더니 아이들이 모자란다고 난리. 결국, 900엔짜리 튀김을 시켰는데 이것도 양이 너무 적었다. 우리의 위를 뭐로 보고……. 오오토로도 먹고 좀 비싼 초밥을 먹긴 했지만 4,500엔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여행 첫 식사인데 돈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 없었다. 다른 초밥 집으로 향했다. 이런 순간에는 판단이 매우 빠르고 거침없는 편이다. 저렴할 것 같은 회전 초밥 집에 들어가 원 없이 배불리 먹고 나왔다. 메뉴 대부분이 105엔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와 커스터드가 듬뿍 들었다는 에클레어를 샀다. 한국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에만 가면 꼭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마신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초밥 집을 두 군데나 다녀오고도 입가심이라며 에클레어(크기도 우리 딸 팔뚝만 하다)를 먹는다. 한국에서는 과자나 빵을 거의 먹지 않으면서. 왜 그런지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서울 타워를 보면서 감흥이란 걸 느낀 적이 있었나? 그런데 도쿄 타워를 보면 왜 가슴이 두근거릴까? 맥주나 빵과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걸까? 저녁에는 역시 일본 방송을 보며 맥주를 홀짝이는 것이 제격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완벽한 여행 첫날이 저물었다.



둘째 날에는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 선미를 만나 오다이바로 갔다. 오다이바는 도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소설가 김영하는 오다이바를 “유럽을 재현하되, 유럽에서 불쾌한 요소는 다 제거하고 환상만을 남겨둔 곳, 근대 이후 일본이 제창해 온 탈아입구脱亜入欧의 쇼핑몰 버전”이라고 말했다. 왜 오다이바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확실한 대답을 못 하는 나. 어떤 사람은 오다이바를 ‘일본 관광지의 끝판왕’이라고까지 부른다. 너무 인공적인 면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장소임이 틀림없다. 그저 막연했던 느낌을 정리해 준 김영하 작가의 통찰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1월이라 약간 쌀쌀한 날씨, 오다이바에 있는 온센 ‘오오에도 온센모노가타리’에 갔다. 유카타로 갈아입고 간단하게 족욕을 했다. 족욕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이들 성화에 닥터 피쉬 체험도 해서 묵은 각질 제거도 했다. 사십 평생 다른 종種과 공생관계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처음이었다. 나는 너의 배를 불리고 너는 나의 발을 아름답게 해주었구나. 내 몸의 불쾌한 요소를 제거해 준 물고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압권은 역시 식당가 겸 상가. 아니, 이런 별천지가! 마쓰리에 간 기분이었다. 10년 전의 일본과 다른 점은 확실히 한국어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라무네 파는 곳에는 ‘사이다’라고 적혀 있고 한글로 ‘라무네’라고도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놀고 싶다. 종일 돈만 쓰겠지만.




셋째 날은 신주쿠 근처에서 이세탄 백화점의 데파치카(백화점 지하 음식매장)에 갔다. 포도를 송이째 말린 특이한 건포도를 샀다. 천재 시인 이상이 좋아하는 멜론을 팔았다는, 긴자의 백오십 년 된 과일가게 센비키아에도 송이째 말린 건포도를 판다지? 맛은 상상 이상. 포도도 곶감 말리듯 말리면 이렇게 되는 건가? 언젠가는 일본의 유명한 데파치카를 다 돌아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무계획적으로 세워본다. ‘마쓰야 긴자’ 데파치카에 가면 맛있는 도시락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황금 정보도 가지고 있었지만, 긴자에는 발도 못 들여놓았다. 센비키아에 가서 송이째 말린 건포도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는데! 계획이 바뀐다. 다음에 도쿄에 오면 오다이바가 아니라 긴자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매일 긴자를 돌아다니고 싶다. 미술용품 전문점 세카이도 구경을 하고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쿄를 즐기려면 5박 6일은 너무 짧다. 1년쯤 더 살아봐야 하는데….


이날 저녁에는 올해 우리 출판사가 발간한 에세이집 『한 번쯤 일본에서 살아본다면』에 참여한 작가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나고야에서 올라와 주신 작가님도 있었고, 가마쿠라에서도 와 주시고 했다. 난 선물로 라면 두 개씩 드렸는데 지역 특산물에 비싼 과자를 선물로 받아서 너무 황송했다. 즐거운 셋째 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넷째 날에는 신주쿠역에서 하토버스HATO BUS를 탔다. 일본판 시티투어 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5일 동안 날씨가 좋았는데 하필 버스 타는 날 비가 주룩주룩. 당연히 이층 버스 지붕을 덮어 줄줄 알았더니 지붕을 닫으면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냥 비옷을 입고 타야 한단다. 순간 갖은 짜증이 다 몰려와서 가이드 없을 때 막 투덜거렸다. 아니 이렇게 내리는데 비를 맞으며 투어인지 나발인지를 한단 말이야! 환불이 되긴 하지만 가장 고생한 기억이 나중에 가장 많이 남는다는 사십 인생 터득한 바가 떠올라 그냥 타기로 했다. 손님은 딱 우리 가족 세 명. 교통비 비싼 도쿄 땅에서 전세 버스를 타보는구나. 그것도 이층 버스를 전세로.



어떤 건물에서는 서양인들이 발레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진기한 장면이로다. 가히 이층 버스가 아니면 절대 보지 못할 구경거리다. 자동차 회사 ‘혼다’ 본사 건물 앞을 지나갔다.


“잘 보시면 유리창이 벽보다 다 안으로 들어가 있잖아요. 지진이 나도 유리가 건물 바깥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혼다 회장이 이렇게 건물을 만들라고 했답니다.”


혼다 소이치로? 음, 어쨌든 대단한 발상이다. 막상 투어가 시작되니 가이드의 뛰어난 언변과 나의 맞장구가 척척 잘 맞아서 가이드의 잡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속속들이 연이어 풀려 나왔다. 아이들을 위해 실시간 통역이 조금 힘들었다. 가이드의 긴 설명에 이은 나의 지극히 짧은 통역이 아이들에게도 의아했을 것이다. 내내 모질게 내릴 줄만 알았던 비도 우리가 내릴 즈음에는 그쳐 있었다. 인상 쓰며 탔다가 웃으면서 내린 하토버스. 다음에는 3시간짜리 하토 버스 투어에 꼭 도전해 보고 싶다. 비는 제발 안 왔으면 좋겠다.



다섯째 날에는 한국 출판 관계자라면 반드시 가줘야 한다는 다이칸야마 츠타야를 방문했다. 한동안 출판인뿐만 아니라 책과 서점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에게 다이칸야마 츠탸야는 핫 키워드였다. 1층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코코아) 서점 2층으로 가면서 한 카페를 가로질러 갔다. ‘오, 분위기 좋은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니 유명한 북카페 Anjin(안진) 이었다.『도쿄의 북카페』라는 책을 보며 나중에 도쿄에 가면 꼭 가봐야지 했던 그곳이었다. 아, 여행을 너무 준비 없이 다녀왔나?


다이칸야마 츠타야는 신간뿐 아니라 예전에 나온 책이라도 인기가 있으면 매대에 진열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서점 안에서 조용하게 책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언가 한국과 다른 분위기였는데 좀 더 안정적이고 책을 소중히 다루는 느낌이랄까.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해지는 도쿄를 원 없이 감상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도시는 환상적이었다. 도쿄에서 살다 왔다고는 해도 내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며 즐거움과 새로움이 가득한 도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오래 살다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제는 그냥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지 뭐. 특별한 감흥이 없어.”


도쿄에서 생활하는 친구 선미의 감각과 여행 온 나의 감각의 격차는 하늘과 땅 사이 공간쯤 되는 것 같다. 여행자는 온몸의 세포가 “모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겠어!”라는 의지로 충만해 있으니까. 그런 자세가 아니면 여행은 안 가느니만 못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도쿄라면 가까운 거리에 기분전환 가능한 절대공간이 존재한다는 기쁨까지 추가된다. (가까워도 자주 못 가는 건 함정) 한국은 내게 그저 일상을 보내는 특별한 감흥 없는 (사실 미치도록 지루한) 공간이니까.


내게는 추억이 있기에 도쿄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가보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완전한 미지의 세계라 해도 좋을 곳이니 꼭 한 번 가보라 하고 싶다. 도쿄 여행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뭔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 놀라운 장소,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도시의 바람을 맞으며 한 뼘 더 성장하는 내 마음속 그 무엇, 그런 기대감. 10년 만의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지 벌써 3년이 다 되간다. 나는 오늘도 도쿄 여행을 꿈꾼다. 홀로 어느 한적한 공간, 오늘의 커피와 두꺼운 토스트 두 조각,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





글/사진 최수진 세나북스 대표

책을 기획하고 만든다. 일본 여행을 좋아한다. 만든 책으로 『한 번쯤 일본에서 살아본다면』 『일본에서 일하며 산다는 것』 『프리랜서 번역가 수업』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일본어로 당신의 꿈에 날개를 달아라』가 있다.
banny74@naver.com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