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기 좋은 날]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날

꿈꾸기 좋은 날 #1



교토는 참 아름답고, 또 조용한 도시이다. 이따금 마츠리祭り로 온 시내가 떠들썩한 날도 있지만, 그런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화롭게 시간이 흘러간다. 일본의 옛 건물들이나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 탓도 있지만, 교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성도 이에 한몫 하고 있으리라.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성급하게 폈다가 금세 져버린 벚꽃의 흔적을 따라, 아쉬운 대로 봄노래를 세 곡 정도 들으면 도시샤 대학교 이마데가와 캠퍼스에 도착한다. 벌써 3년 째 다니고 있는 학교이자, 백 여 년 전, 순수한 마음으로 별을 노래하고 시를 사랑했던 두 청년 시인이 다녔던 학교. 나는 매일같이 두 시인이 거닐었을 길을 따라 걷는다.


도시샤대학교 이마데가와 캠퍼스의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


도시샤대학교 이마데가와 캠퍼스는 사랑받는 두 시인이 살고 있던 그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19세기 서양 감성의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고, 학생들은 그 사이를 매일 바쁘게 거닌다. 학생들이 바쁘게 다니는 길 한 가운데에는 두 시인의 필체로 쓰인 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시비는 학교와 모두의 일상에 녹아들 듯 아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따금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 한국에서부터 온 사람들이 시비 근처를 에워싸고 있을 땐 바쁘게 걷는 와중에도 반가운 기분이 든다. 나 역시 처음 입학했던 날에는 두 시인의 시비를 보고 신기함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대학생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입학식에 늦는 줄도 모르고 두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더랬다. 하지만 3학년이 된 지금, 시인들의 감성을 깊이 느끼고 여유를 되찾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그저 시비 앞에 놓인 꽃들을 슥 보고는 지나칠 뿐이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듯.


그렇다고는 해도 시비는 늘 나의 생활반경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를테면 전공수업을 하는 교실이라든지, 유학생 담당 교무센터라든지. 모두 시비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도시샤대학교 이마데가와 캠퍼스 건물


오늘은 아침부터 유학생 교무센터에 제출할 서류를 한아름 들고 졸린 발걸음으로 시비를 지났다. 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내야하는 서류가 늘어나는 건지, 서류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말만 적혀 있는 건지. 불만이 치밀었지만 이것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겠거니 생각하며 교무센터의 문을 열었다.


“이거, 서류 잘못됐는데요.”


직원의 말에 나는 어버버, 당황하고 말았다. 첫 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라면 교무센터는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직원은 서류를 몽땅 돌려주며 오늘 안에 다시 작성해 오라며 나를 내보냈다. 순탄치 않은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으로 강의실을 향했다.


“한 명씩 앞에 나와서 문장을 써 보세요.”


간신히 늦지 않게 들어간 일본어 수업이 시작한 지 5분 만에, 나는 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뿔싸, 숙제가 있었지. 일본어 문장을 써 오는 숙제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날로그한 수업방식을 고수하는 교수님은 나를 칠판 앞으로 부르셨고, 분필을 건네며 작문을 해 보라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겨우겨우 써냈고, 교수님은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맨 앞에 앉은 서양인 유학생에게 질문했다. 내가 쓴 문장에서 틀린 것이 무엇이냐고.


“한자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문장이 부자연스러워요.”


간단한 문장을 틀렸다는 분함과 숙제를 기억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부끄러움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그 후에도 전공 수업에서 교재를 잊고 오질 않나, 바닥에 핸드폰을 떨어뜨려 금이 가질 않나, 점심으로 기필코 먹으려던 샌드위치가 품절되질 않나, 이래저래 안도할 틈이 없는 하루였다. 바쁘게 이리저리 오가다 어찌저찌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나는 다시 아침부터 지난 시비 앞으로 돌아왔다.


도시샤대학교 이마데가와 캠퍼스 예배당


시비 앞에는 벤치가 서너 개 있고, 그 앞으로는 벽돌로 지어진 작은 예배당이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밴드가 일주일에 두어 번 연습장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나름 교토에서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건물이었지만, 학교는 종종 교내 동아리들이 이곳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예배시간 외에도 문을 열어주곤 했다. 아늑한 내부에 벌써 열 댓 명이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고 카혼(타악기)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업 끝났어? 고생했어.”


성격 좋고 해맑은 유키 선배가 통기타를 메고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었어? 되게 피곤해 보이네.” 그 말에 나는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줄줄이 읊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이래저래 몸이 지쳤고, 그래서 마음도 좀 지쳤나 보다 말하는 사이, 어느새 유키 선배뿐 아니라 마리에, 슌, 아야네도 악기를 놓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헤에- 힘들었겠네. 가끔은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나도 저번에 시험 보는 날 필통 잊어버리고 갔어요. 그 날 되는 일이 없지 뭐에요.”


그러니까 힘이 나게 연습을 하자. 그렇게 말하고는 다함께 짧게 웃었다. 아마도 오늘 첫 웃음이었다. 조금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좋아하는 노래를 잠시 연습하다, 아직도 서툰 기타를 잠시 쳐보다 가방을 챙기고, 벌써 해가 뉘엿 저물어 가는 예배당 밖으로 나왔다. 예배당 앞에서, 우리는 늘 하듯 잇폰지메一本締め¹를 하고 해산했다.



겨우 다섯 걸음 정도를 옮기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글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도 걸어가야 하겠지. 잠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밤이었다.



1) 잇폰지메一本締め : 모임 등의 마지막에 치는 끝내기 박수




글/사진 정예은

교토 도시샤대학교 문학부 3학년. 하루 일과중 시 쓰는 시간과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