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생활의 유혹]어디에나 있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홍콩, 생활의 유혹 #1



이른 아침. 거리에 너부러진 잔해들로 지난밤의 광기를 짐작해본다. 눅진한 간밤의 광기와 서늘한 아침 기운이 뒤섞인 소호의 어디쯤. 해가 중천에 뜨도록 거리의 계단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취객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바로 그곳에는 그런 취객처럼 새삼스럽지 않은 불청객들이 허다하다. 몇 놈은 약에 취한 채로, 몇 놈은 짓밟혀 객사 당한 채로, 또는 짓이겨지거나 절단당한 채로 짙은 갈색의 몸뚱이를 거리에 기대고 있는 바로 그 불청객들. 아니다, 그놈들은 어쩌면 불청객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보다 오래 이곳에서 연명했을 테니 터줏대감이라고 하는 편이 공정할지도 모르겠다.


Conduit Road에서 SOHO까지 내려가는 동안 원한다면 10번 이상 놈들과 하이파이브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내가 처음에 홍콩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놈들의 존재 자체였다. 밤을 수놓는 마천루가 즐비하고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이곳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누구도 나에게 놈들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가 화려한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저 쪽 어딘가에는 네온사인이 닿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뒷골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이 영리하고 음흉한 원시 생명체와 이 도시에서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낮이면 사체들이 즐비하고, 밤이면 활동하는 녀석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존재감이 분명 작지 않은 데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덕분에 나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것들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가장 짧은 구간에서 여러 놈과 마주하고 싶다면 이런 곳을 찾으시라.


그렇다. 놈들은 바로 바퀴벌레다. 이곳의 바퀴벌레는 우리가 자랄 때 보아오던, 기껏해야 어른 손톱만 하던 독일바퀴가 아니다. 이곳의 바퀴는 몸집부터 압도적이다. 길거리에 떨어진 초코파이가 바퀴인 줄 알고 기겁한 적도 있으니, 과장을 좀 보탠다면, 아이 주먹만 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항상 그렇게 확대되어 보이는 진기한 경험을 한다) 실상은 어른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 정도의 크기다. 미국바퀴라고도 하고, 먹바퀴라고도 하는 것 같다. 둘은 분명 다른 이름을 가진 이종(異種)이지만 내 눈에는 그놈이 그놈이다. 징그러운 놈, 그리고 좀 더 징그러운 놈. 조용한 방안에 단둘이 남겨졌다면 녀석이 부웅하고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날갯짓, 아, 그렇다, 놈은 비행을 할 수 있다. 바로 이 특기사항 덕분에 녀석은 단순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위협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내가 처음으로 홍콩에 이사 왔을 때 우리는 새로 지은 아파트의 첫 입주자였다. 아파트는 굉장히 세련되었고 최신식 설비들이 갖춰진 데다, 무엇보다 깨끗했다. 재래시장이 있는 동네였지만 내 집은 새 아파트고, 새 파이프고, 최신식 관리를 하는 곳이니 바퀴벌레 청정지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건 오산이었다.


이런 아파트라 하더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아파트 복도에서 난 놈과 독대를 했다. 10층이 넘는 그곳에 어떻게 올라왔는지까지는 따질 여력이 없었다. 좁은 복도에서 내 집과 엘리베이터를 앞뒤로 두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녀석을 지나쳐야 했고, 다시 돌아 나가기에는 뭔가 굴욕적이었다. 내가 가진 지혜를 총동원해서 타개책을 마련하고 있을 때 갑자기 놈이 부웅하고 날아오르더니 내 바지에 들러붙었다. 오 마이 갓. 꺅하는 단말마의 비명. 마음껏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행여 벌린 입으로 날아들까 봐 두려웠다. 그 뒤는 블랙아웃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들어와서 나는 정신병자처럼 놈의 구제방법을 연구하고 집착했다. 그러고 나서 수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행스럽게도 놈이 집안을 휘젓고 다니지는 않는 곳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어서 아직도 벽에 들러붙은 김 조각 따위에 가슴이 철렁하긴 하지만.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입주하기 전에 연막식의 해충약을 살포하고 하수구를 포함한 집안의 모든 구멍에 테이프칠을 하며 물 샐 틈 없는 방어작전을 펼치는 정도의 노련함마저 체득하고 있다.


하지만 놈은 이 도시 어디에나 있다. 날마다 걷는 거리에 있고, 부호가 사는 초호화 아파트에도 있고, 식당에도 있고, 싸구려 호텔에도 있다. 홍콩에 오게 된다면, 급한 용무로 찾아 들어간 이름 모를 빌딩의 비좁은 화장실에서 놈들과 조우한다고 해도 너무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길 바란다. 적어도 급한 용무를 마무리할 정도의 담력은 기르고 오시길. 굿 럭.




글/사진(4) 최 kay / 사진(1-3) 신태진

서울에서 마케터로 활동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2011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여행 칼럼을 기고하거나 동화를 쓰면서 밤하늘의 달이 자신을 스토킹 한다고 믿는 다섯 살 난 딸과 함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의 공동저자이다.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