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3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3월

 


1.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강혜빈, 김승일 외



며칠 전 책장을 정리했습니다. 유통기한을 초과한 화장품을 버렸고 어디선가 불필요하게 집어 온 팸플릿을 하나씩만 가지고 있기로 했습니다. 뜻밖에 구겨진 띠지가 많이 나왔습니다. 책을 읽을 땐 벗겨서 책장 안에 던져두었다가 다 읽고 나면 도로 입혀 두거든요. 그런데 읽은 지 한참 지나 저의 자리를 잡은 책에도 알고 보니 띠지가 있었더라고요? 책을 사자마자 띠지부터 버리는 분들도 있다고 하지만, 저는 집어 온 그대로가 아니면 어쩐지 불안합니다. 책은 한 권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꽉 찼다고 생각했던 책장에 빈칸이 많이 생겼습니다. 기준도 개성도 없는 배치이지만 책장 값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책장을 더 들일 공간도 없습니다.) 시집들은 여전히 책상 위에 있습니다. 최근 리뷰에서 한 다짐처럼 시집은 손닿는 곳에 계속 두어볼까 합니다. 마침내 시집에 관해 쓸 때가 왔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습니다. 시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이 나에게 있을까? 어떤 서점이 이런 마케팅 문구를 올렸더라고요. “포브스 선정 가장 어려운 장르: 詩”. 농담인데 농담 아니죠. 어떤 시는 몇 번을 읽어도 “시인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되물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은 앞서 소개한 『점심 산문』과 같은 기획으로, 시인들이 점심시간에 쓴 시를 모았습니다. 점심에 쓴 시라고 쉽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요. 누군가 머리 위에 해가 떡하니 떠 있는 시간에 운을 띄우고 행을 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머릿속에 시상이 앞서는지 마주 앉아 시를 쓰는 상床이 앞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좋더라고요. 점심 산책하는 기분이었고요. 사실 시집 속 화자들이 다들 점심 산책을 떠나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또 그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점심 시집』의 시인들이 요즘 주목받는 분들이라고요. 오, 그렇군요, 하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요,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게 작가 소개에 적힌 시집 제목이었습니다. 이들의 시집을 하나씩 찾아 읽기만 해도 앞으로 어떤 시를 읽어야 하느냐는 막막한 질문을 거뜬히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이렇게 점심을 함께했으니 좀 다른 시간에 그의 시집에서 다시 만나보려고 합니다.

어떤 임계점을 지나고 있는지 여기에 쓰는 리뷰에 책에서 초점이 벗어난 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네요. 어쩌면 제가 시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이 아직 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침 책장을 정리한 게 어느 휴일 점심 즈음이었기도 했고요. 참여한 아홉 명의 시인 중 세 명이 각각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습니다. “집에 가서 시를 쓰고 싶어지도록” 점심에 만난다고 하니 친분이 있는 분들 같은데요, 그들이 친하니까 괜히 저도 아는 사이인 듯 마음이 담뿍하게 찼습니다. 혼자 점심을 할 때 젓가락에 자꾸 헛헛함이 짚이는 분들께도 이 시들을 읽어 보시라 권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물맛의 차이점을 느끼는 일과 비슷해서”
_강혜빈, 「다가오는 점심」


“그럼 할머니
나무도, 울어요
또 웃지

나무도 죽겠죠?
그럼

꿈에서 깨면
거의 완성에 가깝지“
_김현, 「겨울밤」


“우리는 버려진 것을 보고도 버려진 것인지 몰라요. 누군가 두고 갔다고 생각해요.”
_안미옥, 「만나서 시 쓰기」



2. 『여름밤 열 시 반』,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사랑이 이루어지려 합니다. 마드리드까지는 약 267km. 그곳은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곳이자 또 다른 사랑의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네 사람을 실은 랜드로버는 밀밭으로 둘러싸인 어느 작은 마을로 피신하고, 그렇게 사랑은 유예됩니다. 그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남편 피에르와 친구 클레르, 네 살 난 딸 쥐디트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 중입니다. 악천후를 피해 찾아온 여행객들로 마을 유일한 호텔은 만실이고 방을 잡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복도에 자리를 깔고 하룻밤을 보낼 처지입니다. 마리아는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십니다. 호텔에 방이 없다니 얼마나 얄궂은 일인지. 피에르와 클레르는 오늘 사랑을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그날 낮,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내와 연인을 쏘아 죽이고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붕 위에 숨었을 거라고, 그를 아는 마을 사람이 이야기하지요. 그때부터 마리아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내와 정부를 죽인 남자의 처지와 서로 사랑에 빠진 남편과 친구를 둔 자신의 처지가 비슷해서일까요? 아니면 남편과 친구의 배신을 견딜 수 없어 술처럼 정신을 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뒤라스의 『여름밤 열 시 반』은 위태위태한 여름휴가를 떠난 네 사람의 하룻밤을 다룬 소설입니다. 마리아는 남편과 친구의 관계를 알고 이 여행을 제안합니다. 그녀는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이며 알코올에 중독돼 있지요. 피에르와 클레르가 마드리드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안으리라는 건 다음 날 폭풍우가 걷히고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사실만큼이나 확정적입니다. 마리아가 흡사 남편과 친구의 밀회가 성사되길 기다리는 듯 보이는 이유는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이지요. 그러나 우연히 로드리고를 찾아낸 마리아는 지금까지 보여준 권태와는 상반된 선택을 합니다.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 로드리고를 빼내어 마드리드로, 아니, 아예 프랑스로 함께 도망치려는 거지요.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을 초대함으로써 예정된 세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듯, 혹은 완전히 파괴하려는 듯 그녀는 위험을 무릅씁니다. 사실 그녀는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태연하고, 어떤 면에선 치밀하기까지 하지요. 마치 지금처럼 권태와 알코올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이요.

소설은 현재 시제 위주로 마리아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인물들에 대한 거의 최소한의 정보만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부분은 독자의 상상과 추측으로 조각이 맞춰지지요. 속도감이 느껴지지만 실제 시간은 작품 속의 시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그게 왠지 모를 불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소설 초반, 소나기 내리는 소도시의 여름밤은 지금껏 제가 읽은 여름에 관한 여러 묘사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탁월합니다. 로드리고를 탈출시키고 동틀 녘을 맞이하는 밀밭에서의 묘사도 그렇고요. 불안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리고 술과 피로, 도무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말갛게 떠오르지 못하는 마리아의 의식은 그녀의 부조리한 행동을 이치에 맞고 공감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폭풍우와 도망자는 배경이었을 뿐, 예정된 시나리오는 이것이었습니다. 배신의 밤(”혼례의 밤”)을 앞두고 마리아는 피에르에게 말합니다.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마리아가 이 혼란스러운 여행을 시작한 것은 결국 그 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_43p.

그녀 덕분에 그가 잠시나마 절박한 절망에서 벗어나, 전쟁이라든가 도주라든가 증오 같은 인간적 행동의 어떤 일반 원칙을 기억해낼 가능성. 그의 고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붉은빛 여명을 기억해낼 가능성. 이런 이유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결국 끝까지 살아가야 할 평범한 이유. _68p.

그녀가 몸에 뿌린 향수는 그녀 자신에 대한 그녀의 절대권,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떠나간 그의 배반, 그녀에 대한 그의 동정심, 이런 것들을 담고 있는, 다시없이 소중한 향수였다. 즉 그녀는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는 향기를 몸에 묻히고 있었던 것이다. _169p. 



3.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지음



글을 쓰거나 말을 하다 보면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 감정 따위를 딱 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낱말이 없을 때가 많지요. 구구절절, 한 마디가 두세 마디가 되고 마침표를 찍고 나면 제대로 표현하긴 한 건가, 이렇게까지 공간(음성) 낭비를 해야 했나 착잡하기도 합니다. 얄팍한 어휘력이 원흉이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의미를 고스란히 품을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문장이 동원되어야 하죠. 그걸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고 화술도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좀 돌려보면, 그러니까 대양 너머 같은 데를 넘겨보면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다른 지형과 기후 속에서 자연스레 다른 문화와 다른 정서를 지니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겐 없는 기표를 사용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는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서 특정한 언어에만 존재하는 단어 일부를 갈무리합니다. 일종의 부재 사전이라고 할까요, 이 책은 당신에게 없는 말을 당신에게 심어주려고 합니다.


포르투갈어에 ‘사우다드(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갈망’, ‘향수’로 풀이하는데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뉘앙스를 풀어 줍니다.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어렴풋하고 한결같은 갈망.” 그러니까 고향을 그리는 사우다드라면, 고향이 사라졌거나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세밀한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셈입니다. 아니면 어떤 이상향, 상상의 세계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요. 이 단어를 보자마자 제가 2년여에 걸쳐 조금씩 읽고 있는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의 화자도 그에게는 현실보다 더 현실인 꿈의 세계에 갈망을 느끼거든요. 페소아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아니 쓸 수 있었는지, 그건 바로 포르투갈어에 ‘사우다드’가 있기 때문에, 혹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우다드’를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언어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까지 다양한 지역의 단어를 어우르고 있습니다. 어떤 말들은 우리가 문장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긴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요, 또 어떤 말들은 해당 문화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특정한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낱말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왜 이런 감정이나 경험을 이토록 깊이 들여다보고 이름까지 붙여준 것일까 절로 상상하게 됩니다. 아주 조금은 언어의 사용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힌트를 얻은 것도 같고요. 하지만 어느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 우리의 언어에 서로 겹치지 않는 귀여운 꼬투리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꽤 비슷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모든 단어를 시각화한 저자의 일러스트입니다.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라지만, 그걸 공통의 언어인 그림으로는 예쁘게 ‘번역’한 실력에 감탄이 나옵니다. 이 책의 정체성이 그림책에 가깝다고 할까요? 루시드 폴의 번역도 아주 좋아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이 책의 원제인 『Lost in translation』과 동명인 영화가 한국에 수입되며 제목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도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로 비슷한 제목이 붙었다는 겁니다. 영화 제목도 썩 좋은 번역이 아니구나 싶긴 했는데, 사실 ‘Lost in translasion’을 우리말로 잘 옮길 방법이 없기는 한가 싶기도 합니다. 참! 한국어도 하나 있습니다. 바로 ‘눈치’인데요, 진짜 외국어엔 번역할 말이 없나 곰곰 생각해 보세요!


트렙베르테르(Trepverter, 이디시어): 상대방의 말을 멋지게 되받아칠 수 있는 말이지만 꼭 뒤돌아선 뒤에야 떠오르는 것을 뜻한다. 그대로 풀면, ‘아래층 계단의 말’.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야간어): 같은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 (그러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 인정과 이해

익트수아르포크(Iktsuarpok, 이누이트어): 누군가가 (누구라도) 오는지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하고 기다리는 행동.



4.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역사 소설과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부합할 수 있을까요? 동지중해의 작은 섬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건국의 기쁨을 맞이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투쟁과 성취의 화려한 불꽃이 가슴을 뜨겁게 달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의 새 소설 『페스트의 밤』을 읽는 내내 무언가를 잃어가는 사람들의 숨 내를 맡는 기분이었습니다. 파묵의 이전 작품들을 읽으며 쌓여 온 감정이 신작에도 영향을 미친 걸까요? 하지만 가까스로 소멸을 피한 민족, 허물어져 가는 제국, 시대에 뒤떨어지는 근본을 지키려고 애쓰는 종교, 무엇보다 페스트로 사랑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 모두를 잃은 인물들을 마주하며 상실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 같습니다.


역사책 속 주인공들이 담담하고 딱딱한 문장으로 서술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 부활하기까지 한다면 실제로 그들이 한 일과 하지 않은 말들에 과몰입하게 되기도 하지요. 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결정이 순전한 우연이나 실수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끊임없이 “만약에…”를 중얼거리며 달라졌을 현재와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요. 『페스트의 밤』은 실제 역사가 지닌 그런 다층적인 매력을 가상의 역사를 통해 재현합니다.


『페스트의 밤』에서 현대의 역사가로 설정된 화자는 이 책이 역사 소설 혹은 소설의 형태를 취한 역사의 기록이 될 거라는 서문으로 운을 띄웁니다. 그리고 엄정한 사료(당시 민게르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오랫동안 방에 갇힌 채 전해 들었고, 나중에는 직접 보고 경험했던 어느 폐위된 왕의 공주가 쓴 편지들)에 기초해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야사와 상상이라는 동력으로 시적인 묘사를 덧붙이고 인물의 심리와 대사를 꼼꼼하게 재현해 냅니다. 역사가 본인의 주관적인 시각까지 거침없이 드러내고요. 무려 800페이지에 가까운 역사 소설을 읽고 있으면 생소한 옛 오스만 제국의 ‘실제로 있지도 않은’ 변방 섬에서 벌어진 비극과 모험에 점점 몰입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인가 상상의 역사인가?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아마 파묵과 동일한 문화권의 젊은 독자들도 느꼈을 이런 혼란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실망하고, 분노에 차 얼른 역사의 장에서 퇴장하길 바라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사소한 선택들의 마법을, 페스트라는 인간을 초월한 힘의 위력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책의 주요 소재는 물론 페스트입니다. 카뮈의 『페스트』가 재난에 내몰린 오랑의 시민들을 통해 인간의 여러 단면을 밀착 취재하였다면, 파묵의 『페스트의 밤』은 민게르섬에 닥친 페스트를 빌미로 알력 다툼을 벌이는 여러 세력의 무능과 기만에 초점을 맞추며 정치적인 비판을 가하는 듯 보입니다. 사악한 중앙 정부와 무능한 지방 정부, 열강의 간섭, 전근대적인 종교, 증오와 차별로 무장한 폭력 집단, 그리고 혁명과 민족주의의 태동, 변질까지 도저히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건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의 매력은 그 수많은 실패와 죽음이 결국에는 ‘사랑’ 때문이었음을 어느 순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묵 특유의 세세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묘사가 처음엔 드물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많아지는 것도 각자 뭔가를 잃은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그즈음 차고 넘칠 정도로 쌓였기 때문인 듯하고요.


끝으로 이 책은 화자인 역사가가 페스트가 물러간 후 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개인사와 엮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에필로그’까지 전부 읽고 나서야 완성된다고 말하고 싶네요. 오르한 파묵이 화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가상의 역사는 이 두꺼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즈음 거의 실제 있었던 일처럼 각인되는데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돌이키는 섬의 과거와 현재가 독자에게 스며든 가상 역사의 기억과 맞물려 그리움을 자극하고 극대화합니다. 그게 정말 묘하고 강렬한 체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편’은 소설 속 소설 파트이고, 에필로그가 이 책의 진짜 소설 파트인 것 같다고 할까요. 다른 분들께서도 파묵이 다시 한 번 써낸 이 역작을 읽고 비슷한 인상을 받으실까 궁금합니다.


하미디예 다리에 도착하자 체력이 바닥났다. 문득 바닥에 쓰러져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중 가장 다채롭고 붐비는 시간에 야자나무와 플라타너스,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 상냥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실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_39p.

항상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인력 혹은 여력이 모자라거나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시간에 잠시의 행복과 위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희미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안는 것임을 총독 파샤나 콜아아스나 누리나 이제는 다 알고 있었다. _348p.

아무도 잊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소리들이 도시에서 하나둘 다시 들리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옛 삶이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믿지 못했다. 가장 큰 기쁨은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 소리, 종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이었다. _695p.




글 신태진

매거진 브릭스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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