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8월

2022-09-13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8월

 


1. 『로마로 가는 길』, 김혜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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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산 지 7년이 넘었습니다. 남편은 여행 가이드로 일하고, 나는 막 첫 번째 책을 냈지요. 하지만 코로나19와 함께 들이닥친 절망이 여태껏 우리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내재화되는 듯합니다. 각자 고민이 깊어가던 시기, 남편이 운을 띄웠습니다. 우리 순례를 다녀올까? 길고 긴 순례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걸으며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로마로 가는 길』의 저자 김혜지 님은 남편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입니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를 거쳐 로마 바티칸까지 이어지는 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 두 사람은 이탈리아 구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토스카나 구간만 열흘 동안 걷기로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열흘, 내친김에 로마까지 마저 걷기로 하지요. 다른 순례자들이 그렇듯 이 부부에게도 걸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니, 삶이 그들에게 걸어야 할 의무를 지워줬습니다. 줄이고 줄여 10kg에 맞춘 배낭, 막연한 기대, 그보다 훨씬 선명한 불안과 두려움을 어깨에 얹고 떠나라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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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지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인간과 걷기는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걷기는 가장 기본적인 이동 방식이며, 나아가 세상과의 접촉, 사색, 환기 몰아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꼭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순례길이라는, 걸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습니다. 내가 찾는 해답이 신보다 걷는 행위에서 먼저 주어질지 모른다는 희망. 저자가 서두에 밝힌 ‘걸어야 했던 이유’는 간결하지만 독자를 설득하기에 충분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나 아직 자신이 걸어야 할 ‘순례길’을 찾지 못한 미아라면, 이 책에서 사소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길 바랄 것입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길을 잃은 것만 같은 혼란 속에서 시작한 순례. 그래도 저자는 여정을 퍽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저자가 감정의 폭이 넓다는 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희로애락을 문장으로 옮길 때만큼은 여러 번 정제하고 다듬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독자로서는 오히려 그쪽이 제 감정을 이입하기 좋았습니다. 이건 문장력의 힘이기도 하지만, 타국에서 생존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문제를 맞닥트리고 그걸 이겨 나가려는 작가의 의지가 투영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종이에 찍힌 말, 단어가 아니라 책장 위를 흐르는 목소리로 들려오는 거지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오랫동안 살던 나라에서 순례길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루트에 있는 몇몇 도시는 이미 가 봤던, 혹은 너무 좋아 몇 번이나 여행했던 곳입니다. 보통 하루에 2~30km를 걷는 낯선 상황 속에서 낯선 공간까지 맞닥트리게 되면, 기록의 형태는 어쩔 수 없이 감정에 기반을 둔 인상 묘사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잘 알거나 그 분위기에 익숙한 지역을 걸으며 조금 더 안정적인 시각으로 여정을 서술합니다. 생소한 이탈리아 소도시에 관한, 그 나라에 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디테일한 정보를 덧붙여 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꼭 순례가 아니더라도 그곳을 여행해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매일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나는 부부를 매번 새벽 안개가 맞이합니다.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가 줄지어 걷는 토스카나 평원은 희끄무레한 천국처럼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마치 제가 쥔 질문과 원하는 답 중 몇 가지는 거기 어느 밑동 옆에 묻혀 있을 거라는 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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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지


사진과 글은 다른 방식의 기록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현실로 찾아와 과거의 나 자신을, 그리웠던 순간을,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기록하지 않은 모든 것은 흩어지고 결국엔 잊히기 마련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_129p.

순례길에서 배낭은 단순히 짐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나를 순례자라고 말해주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 배낭의 무게감이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낯선 사람들에게 거리감 없이 다가설 수 있는 매개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_198p.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를 알았다. 걷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괴롭지만 황홀경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_266p.



2.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파리 리뷰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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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국 문학지 〈파리 리뷰〉에 실렸던 단편 선집. 그러나 이 멋진 제목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열다섯 편의 단편이 실렸으니 열다섯 문장이 필요할까요? 그조차 부족할 것 같네요.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뚜렷한 경향성은 없습니다. 주제도, 분량도, 심지어 장르조차도 서로 다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보르헤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


각 단편 뒤에는 그 단편을 추천한 작가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일종의 작품 해설이고, 때로는 팬레터이며, 한 편의 완결된 에세이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읽으면서도 해설이 궁금해 자꾸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책의 백미 자체가 열다섯 편의 해설일지도 모릅니다. 번역가의 서문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원제인 『Object Lessons』이 ‘작가들이 추천하는 단편’이라는 콘셉트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처음 이 책을 엮은 〈파리 리뷰〉에서도 해설을 기존에 발표된 단편들을 재발견하는 트리거이자 하나의 명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해설 부분에 접은 페이지가 꽤 많았고요. (밑줄을 긋는 대신 책장을 접어서 표시해 둡니다. 어느 쪽이든 헌책방에 되팔 일은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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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만큼 페이지터너급의 서사를 자랑하던 「궁전 도둑」. 제목처럼 어렴풋한 읽기를 하게 되는 시적인 문장에 가슴이 아릿하던 「어렴풋한 시간」. 여름에 관한 아름다운 묘사로 이 계절에 잘 어울리던 「하늘을 나는 양탄자」. 늙음에 관한, 시쳇말로 ‘웃픈’ 소품 「늙은 새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젊은 예술가의 부침을 직조한 「펠리컨의 노래」, 이 책의 한국판 제목을 결정한, 동시에 왜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지’ 강렬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위트 넘치는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충격적인(?) 블랙 코미디였으며, 그게 하필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색다른 기분으로 책을 덮게 하는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희한하고도 슬픈 ‘팩션’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아, 카버와 설터의 단편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른 책에서 읽었던 작품이지만 다른 번역으로 읽는 맛을 선사합니다.


리뷰를 해도 이렇듯 표면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네요. 해설도, 추천사도 입을 모아 말하듯 단편마다 개성이 뚜렷하여 작품과 작품 사이를 매번 새로운 세계를 방문하듯 통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책이 두꺼워도 금방 읽히는 장점이기도 하고요. 단편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세요.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은 물론, 열다섯 작품 중 어느 하나는 바로 내 이야기 같다고 느끼실 겁니다. 짧지만, 이 소설들이 삶 이모저모를 채취하여 제 안에 가두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도 그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도 노골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변화하게 한 일들은 흐릿하고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이상하게 거추장스럽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삶을 살게 했다. 죽음은 철저하지 않았다. 죽음에는 선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랑과 책임만 남겨두고 야옹거리며 영영 사라졌다. _「어렴풋한 시간」 중

노스탤지어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감각이 쌓일 때 생긴다. (…)
기억의 대상이 아무리 평범하고 진부하더라도 그 기억과 감정을 심오하게 하고 느껴지게 하고 사실이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정밀함과 축적이다. _「하늘을 나는 양탄자」 해설 중

행성들과 은하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온 우주가 원래 쌀알 하나 크기에서 왔다고 해. 그게 폭발해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 태양, 별들, 지구, 바다, 내가 당신에게 느꼈던 마음을 포함해 모든 것을 형성했대. _「방콕」 중



3. 『마법의 비행』, 리처드 도킨슨 지음


“때로 새처럼 나는 꿈을 꾸지 않는지?”


리처드 도킨슨은 『마법의 비행』 첫 문장에서 묻습니다. 저는 꿈에서 날아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떨어지는 꿈은 곧잘 꿨습니다. 활강이 아니라 추락이었지만요. 그래도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하지 않고, 언젠가 인류가 우주로 나아갈 거라는 상상은 좋아합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비행에 관한, 리처드 도킨슨의 친절한 신작을 읽을 이유는 충분할 겁니다.


『마법의 비행』은 자연과 인간 양쪽이 어떻게 중력을 이기고 날아올랐는지 수많은 사례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새나 비행기만 다루는 건 아닙니다. 꼭 ‘날갯짓’을 해서 ‘이륙’하지 않더라도, 작고 가벼워 바람에 날리거나 높은 나무에서 몸(혹은 비막)을 활짝 펼치며 활강하는 것도 비행의 한 방식으로 봅니다. 동·식물을 ‘날 수 있다(날개가 있다)’와 ‘날지 못한다(날개가 없다)’,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시각을 돌려 더 넓은 하늘을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거지요. 저마다의 이유, 필요 때문에 비행 혹은 유사 비행을 하도록 진화한 생물이 실로 다양하더군요. 따라서 이 책을 비행하는 존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진화론, 다윈주의를 입증하려는 리처드 도킨슨 저작 세계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딱딱한 건 아닙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고요.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WHY 시리즈 ‘비행’ 편을 읽는 느낌입니다. 온갖 희한한(?) 동식물들은 그 생김새와 습성, 진화 방식이 간결하고 재치 있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날아보겠다고 만든 숱한 기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야나 렌초바의 그림이 곁들여져 저의 빈약한 상상력에 정확한 상을 부여해 줍니다. 사실 사진보다 그녀의 멋진 그림이 더 사실적이고 ‘확실해’ 보일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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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 동원되는 부분도 있으나 도킨슨은 친절한 선생님입니다. 수학을 쓰지 않고 최대한 쉽게 비행의 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어쩐지 꿈을 꾸게 하는 제목처럼 이 책은 과학 입문서, 교양서 중에서도 말랑말랑한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수집하고 연구한 자료는 얕지 않습니다. 그 방대함과 그걸 책 한 권 안에 접어 넣은 집중력에는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뛰어난 학자이자 작가가 분명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지만, 문장에는 담백함과 유머(위트, 시니컬, 자학 개그까지 골고루)가 곁들여져 읽는 맛이 있습니다. 책의 도입부에서 다양한 사례를 쭉 늘어놓으며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할 장에 다시 소개하겠다고 짚어주는 ‘초대하는 글쓰기’ 방식도 이제부터 과학책을 읽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요. 읽고 있으면 저자가 어린아이 같은 우리를 뒤에 남겨두고 훌쩍 날아가 버리진 않겠구나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차근차근 나아가면 모든 게 다 이해가 될 것만 같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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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력은 우리를 지구에 묶어주는 생명줄이자 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독재자”입니다.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수백만 년에 걸친 자연 선택의 과정이나 공학자, 과학자들의 재능 발휘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일단 날아오르면(날아오른다는 꿈을 꾸면) 비행은 제법 낭만적인 일이 됩니다. 책에서 유리멧새라는 철새를 소개합니다. 이 새들은 북아메리카와 멕시코·카리브해를 오가는데, 신기하게도 밤에 이주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목적지를 찾을까요? 아마도 별을 이정표로 삼는 게 아닐까 추정한다네요. 어린 새가 밤하늘을 지켜보며 북쪽을 가리킬 만한 별들을 기억하고, 월동지에서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둥지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작은 새를 그려보세요. 이 책은 그런 새의 호기심과 영리함, 시인 같은 면까지 모두 닮았답니다.


마찬가지로 날개는 그것을 만드는 유전자의 장기 생존에 좋다. 좋은 날개를 만드는 유전자는 소유자가 바로 그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도록 도왔다. (…) 무수한 세대가 지난 지금, 우리는 정말로 아주 잘 나는 동물들을 보고 있다. _24p.

진화적 이점을 묻는 질문 - 이 기관은 어디에 좋을까 - 은 언제나 트레이드오프라는 경제적 계산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즉, 이익과 비용 사이의 형평을 헤아려야 한다. _66p.

비행이 중력으로부터 세 번째 차원으로의 탈출인 것처럼, 과학은 일상생활의 평범함으로부터 나선을 그리면서 상상력이 점점 희박해지는 높이까지 탈출하는 것이다. _322p.




글/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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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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