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10월
1.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지음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데 비치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십여 분 남은 시간 동안 한 챕터를 읽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같은 곳에 앉아 다음 챕터를 읽었지요. 20세기 후반에 쓰인 글이 집중된 두 챕터를 읽는 동안 유난히 외국인 많던 그 거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60년대에서 80년대 정도까지의 서울 풍경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그날 저녁 서점에 갈 일이 있어 같은 책을 샀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모은 선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였습니다.
오랜만에 읽은 선생님의 문장은 이를테면 20세기의 문장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우리말이라 사전도 여러 번 뒤적여야 했고, 쉬운 문장인데 왠지 쉽게 흡수할 수 없어 몇 번 다시 읽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담긴 정서의 폭과 깊이 때문이었겠지요.
긴 세월 희로애락을 느끼며 얻은 모래알. 생판 처음 보는 누군가와의 인상적인 만남에서 얻은 모래알. 자신의 단점,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면을 발견하여 후회하고 고백하여 얻은 모래알. 그 모래알들이 하나의 모래성으로 쌓여 올라간 이 책은 제가 어렸을 적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장르를 읽으며 받았던 인상, ‘수필이란 이런 글이구나’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까 저자의 삶 그 자체를 잉크 삼아 쓰는 글이라고요.
글에서 보이는 선생님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박완서라는 이름의 한 인간이었고, 누군가의 딸이자 부인이자 엄마이자 친구이자 버스와 지하철과 백화점에서 스쳤을지도 모를 우리 사회 이웃 중 한 명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의 문장으로 옮기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통해 멋있어 보이려 하지요. ‘힙’해 보이기 위해 위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멋 부림 하나 없이 나만 알고 있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사회의 불합리도 그냥 못 두고 보시지만, 당신 자신에게는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치사하게 군 일, 불의 앞에서 비겁하게 군 일, 작은 상처를 피하기 위해 큰 상처를 준 일. 그런 고백들은 자조로 말미암아 문장에 재미를 주는 잔재주와는 걷는 높이가 달랐습니다.
추억과 그리움을 말해도 문장은 감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꼿꼿한 뒷모습이 엿보이고 꼬장꼬장한 성격이 드러나는 문장에 오히려 노스탤지어가 깊어집니다. 그럴 때 읽는 이의 감정은 더 크게 흔들려 마지막 챕터에서는 몇 번이나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쓰는 일에 관해, 사는 일에 관해 자꾸 돌이키게 하는 책을 덮고 나자 요즘의 문장, 정서의 유행을 부러워하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어떻게 쓸지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왜 그렇게 자꾸 잊고 마는 걸까요.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_23p.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_202p.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 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맞을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_237p.
2. 『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누가 날 죽였지?”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의문.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도입부. 『죽음』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추리 소설 작가 가브리엘 웰즈는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이 다음 소설에 써먹을 기막힌 첫 문장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떠돌이 영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그는 뛰어난 영매 뤼시의 도움을 받아 살인범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후 세계를 경험합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제목과 달리 『죽음』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쾌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 나갑니다. 약간 얼렁뚱땅 짜맞춰 진 추리 소설 같은 도입부가 지나고 나면, 작품은 삶은 긍정적이고 죽음은 두렵고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전복시키기 시작합니다. 삶과 죽음은 상호보완적이라는 거지요. 끝이 있기에 우리 삶도 의미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선) 죽어도 떠돌이 영혼으로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 것만도 아닙니다. 운만 좋으면, 죽어서도 생전에 못다 한 과업을 이룰 수 있지요.
물론 육체와 물리 법칙에서 벗어난 영혼이라고 완벽히 자유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한없이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무료합니다. 자기 얘기를 들어줄 특별한 인간(영매)도 몇 없어요. 그러면서도 기억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환생은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커져 버린 이 세상 영혼들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주인공 가브리엘 역시 죽어서까지 “누가 날 죽였을까?”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살인범 찾기에 집착하니까요. 영생, 사랑, 부와 명예, 술, 마약.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의 영혼은 ‘집착’이라는 덫에 빠져 현재를 낭비하기 마련입니다.
그 외에도 작가가 소설 속에 던진 시사점이 좀 많긴 합니다만, 가장 흥미로운 건 베르베르의 작가론, 창작론입니다. 작중 추리 소설가인 가브리엘은 대중성은 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비난을 받던 처지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비평가들이 추리, 스릴러, SF 같은 장르 소설을 극도록 싫어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최근에 읽은 『아노말리』도 겉보기는 SF 혹은 스릴러이지만 콩쿠르상을 받았으니까요), 여튼 베르베르가 작가로서 실제로 겪었음 직한 좌절감이 가브리엘을 통해 보입니다. 이상하게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작가나 등장인물이나 비슷하고요.
베르베르는 줄거리와 플롯을 통해 자아내는 ‘즐거움’도 소설이 지닌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실제로 좋아하는 게 분명한 작가들의 유령이 쏟아져 나오는 전개를 보며, 이 소설가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동시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후반부를 썼을지 상상이 되더군요. 그게 좀 애틋하기도 했고요. 사실 『죽음』은 제가 처음으로 읽은 베르베르의 소설입니다. 공교롭게도 역시 처음으로 읽었던 기욤 뮈소의 작품 『인생은 소설이다』 역시 대중 소설가의 작가론, 다른 작가들에 대한 헌사 같은 게 담겨 있어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모르게 비슷한 결의 소설로 두 작가를 만나게 된 겁니다.
베르베르의 주장대로 문체와 심리 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소설도, 상상력에 기반을 둔 장르 소설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점점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어떤 장르든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층을 넓혀야 하며, 그게 책의 가치를 아는 작가의 책무인 거지요.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은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메시지를 그럼직함과 황당함 사이에 놓인 얇은 선 위에서 지체 없이 밀고 나가는 솜씨가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반가운 카메오들의 총출동도 재미있었고요. 몇 권 더 읽게 될 그의 다른 작품도 기대되네요.
“흔히들 죽음은 실패이고 출생은 승리라고 생각하지.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야. 죽음은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지. 가벼워지는 거야.” _1권 231~232p.
“떠돌이 영혼 상당수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그들한테는 산 자들의 세계가 죽은 자들의 세계가 되는 거지. 정신의 힘은 이렇듯 강력해.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게 바로 우리지.” _2권 101p.
어찌 보면 작가로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강박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로 감당을 자처한 질병이거나. _2권 182p.
글/사진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10월
1.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지음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데 비치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십여 분 남은 시간 동안 한 챕터를 읽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같은 곳에 앉아 다음 챕터를 읽었지요. 20세기 후반에 쓰인 글이 집중된 두 챕터를 읽는 동안 유난히 외국인 많던 그 거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60년대에서 80년대 정도까지의 서울 풍경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그날 저녁 서점에 갈 일이 있어 같은 책을 샀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를 모은 선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였습니다.
오랜만에 읽은 선생님의 문장은 이를테면 20세기의 문장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우리말이라 사전도 여러 번 뒤적여야 했고, 쉬운 문장인데 왠지 쉽게 흡수할 수 없어 몇 번 다시 읽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담긴 정서의 폭과 깊이 때문이었겠지요.
긴 세월 희로애락을 느끼며 얻은 모래알. 생판 처음 보는 누군가와의 인상적인 만남에서 얻은 모래알. 자신의 단점,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면을 발견하여 후회하고 고백하여 얻은 모래알. 그 모래알들이 하나의 모래성으로 쌓여 올라간 이 책은 제가 어렸을 적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장르를 읽으며 받았던 인상, ‘수필이란 이런 글이구나’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까 저자의 삶 그 자체를 잉크 삼아 쓰는 글이라고요.
글에서 보이는 선생님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박완서라는 이름의 한 인간이었고, 누군가의 딸이자 부인이자 엄마이자 친구이자 버스와 지하철과 백화점에서 스쳤을지도 모를 우리 사회 이웃 중 한 명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의 문장으로 옮기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통해 멋있어 보이려 하지요. ‘힙’해 보이기 위해 위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멋 부림 하나 없이 나만 알고 있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사회의 불합리도 그냥 못 두고 보시지만, 당신 자신에게는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치사하게 군 일, 불의 앞에서 비겁하게 군 일, 작은 상처를 피하기 위해 큰 상처를 준 일. 그런 고백들은 자조로 말미암아 문장에 재미를 주는 잔재주와는 걷는 높이가 달랐습니다.
추억과 그리움을 말해도 문장은 감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꼿꼿한 뒷모습이 엿보이고 꼬장꼬장한 성격이 드러나는 문장에 오히려 노스탤지어가 깊어집니다. 그럴 때 읽는 이의 감정은 더 크게 흔들려 마지막 챕터에서는 몇 번이나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쓰는 일에 관해, 사는 일에 관해 자꾸 돌이키게 하는 책을 덮고 나자 요즘의 문장, 정서의 유행을 부러워하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어떻게 쓸지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왜 그렇게 자꾸 잊고 마는 걸까요.
2. 『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누가 날 죽였지?”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의문.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도입부. 『죽음』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추리 소설 작가 가브리엘 웰즈는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이 다음 소설에 써먹을 기막힌 첫 문장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떠돌이 영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그는 뛰어난 영매 뤼시의 도움을 받아 살인범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후 세계를 경험합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제목과 달리 『죽음』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쾌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 나갑니다. 약간 얼렁뚱땅 짜맞춰 진 추리 소설 같은 도입부가 지나고 나면, 작품은 삶은 긍정적이고 죽음은 두렵고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전복시키기 시작합니다. 삶과 죽음은 상호보완적이라는 거지요. 끝이 있기에 우리 삶도 의미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선) 죽어도 떠돌이 영혼으로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 것만도 아닙니다. 운만 좋으면, 죽어서도 생전에 못다 한 과업을 이룰 수 있지요.
물론 육체와 물리 법칙에서 벗어난 영혼이라고 완벽히 자유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한없이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무료합니다. 자기 얘기를 들어줄 특별한 인간(영매)도 몇 없어요. 그러면서도 기억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환생은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커져 버린 이 세상 영혼들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주인공 가브리엘 역시 죽어서까지 “누가 날 죽였을까?”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살인범 찾기에 집착하니까요. 영생, 사랑, 부와 명예, 술, 마약.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의 영혼은 ‘집착’이라는 덫에 빠져 현재를 낭비하기 마련입니다.
그 외에도 작가가 소설 속에 던진 시사점이 좀 많긴 합니다만, 가장 흥미로운 건 베르베르의 작가론, 창작론입니다. 작중 추리 소설가인 가브리엘은 대중성은 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비난을 받던 처지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비평가들이 추리, 스릴러, SF 같은 장르 소설을 극도록 싫어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최근에 읽은 『아노말리』도 겉보기는 SF 혹은 스릴러이지만 콩쿠르상을 받았으니까요), 여튼 베르베르가 작가로서 실제로 겪었음 직한 좌절감이 가브리엘을 통해 보입니다. 이상하게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작가나 등장인물이나 비슷하고요.
베르베르는 줄거리와 플롯을 통해 자아내는 ‘즐거움’도 소설이 지닌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실제로 좋아하는 게 분명한 작가들의 유령이 쏟아져 나오는 전개를 보며, 이 소설가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동시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후반부를 썼을지 상상이 되더군요. 그게 좀 애틋하기도 했고요. 사실 『죽음』은 제가 처음으로 읽은 베르베르의 소설입니다. 공교롭게도 역시 처음으로 읽었던 기욤 뮈소의 작품 『인생은 소설이다』 역시 대중 소설가의 작가론, 다른 작가들에 대한 헌사 같은 게 담겨 있어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모르게 비슷한 결의 소설로 두 작가를 만나게 된 겁니다.
베르베르의 주장대로 문체와 심리 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소설도, 상상력에 기반을 둔 장르 소설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점점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어떤 장르든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층을 넓혀야 하며, 그게 책의 가치를 아는 작가의 책무인 거지요.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은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메시지를 그럼직함과 황당함 사이에 놓인 얇은 선 위에서 지체 없이 밀고 나가는 솜씨가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반가운 카메오들의 총출동도 재미있었고요. 몇 권 더 읽게 될 그의 다른 작품도 기대되네요.
글/사진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