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2월

2023-03-31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2월



1.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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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해서 레이먼드 카버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게 카버의 소설은 어렵습니다. 무엇이 어렵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어려움이지요. 그의 단편 하나를 읽고 난 후 밀려오는 서늘함과 쓸쓸함이야 제가 느끼는 감정이니 부정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지금 읽은 것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려고 폼은 잡았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 그럼에도 방금 본 장면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작가와 어떤 사람들에 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기분.


한 문장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바꿔 말하면 허투루 읽어선 안 된다는) 단편 소설의 미덕을 카버만큼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많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인물에 관해서도, 그들이 놓인 상황에 관해서도, 그들의 동기와 앞으로 취할 행보에 관해서도 정보를 제한합니다. 그리하여 추리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듭니다. 사건의 진상을, 인물의 감정을 알아내려면 문장과 행간에 뿌려진 작은 단서를 사금터에 온 것처럼 찾아야 하니까요. 셜록 홈즈나 브누아 블랑이 아닌 이상, 아차 하는 순간에 단서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삶의 이모저모를 모두 겪어보지 못한 얕은 경험과 부조리를 외면해 온 비겁함 때문에 영원히 찾지 못할 단서도 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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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단편집을 번역한 정영목 번역가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버의 작품에서는 글로 나타나지 않은 여백이 (카버 작품 특유의) 그 온도를 유지하는 조절 장치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카버 때문에 글이 아니라 여백을 번역하여 원문과 온도를 맞추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이번에 새롭게 번역된, 혹은 아예 한국에는 처음 번역된(「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열한 편의 단편을 읽으며 이런저런 메모를 썼습니다. 그 분량만 A4로 7장이더군요. 정확한 분석을 하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 그저 오랜만에 새 옷을 입고 나온 카버의 단편집을 잘 읽고 싶었을 뿐입니다. 수없이 접힌 페이지에 이 우매한 독자는 어떤 메모를 남겼을까요. 그래도 리뷰이니까 몇 개만 옮겨 봅니다.


- 사람들이 카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끝난 후-부재중 사인이 뜬 순간-완전히 융해되어 끈적한 흔적만 남은 사랑-이지만, 어쨌든 러브 스토리이니까. 연인, 친구, 가족 간의 사랑은 물론, 무엇보다 삶 그 자체를 향한 사랑이 사그라진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는 카버의 소설에 마치 예언처럼 귀 기울이고 있다.

- 카버의 단편에는 유난히 ‘진입로’가 많이 나온다. 도로와 집을 잇는 짧은 도로. 그곳은 세상과 집 사이의 경계로 많은 이들이 그 연옥에서 헤매는 중이다. 양쪽 어디에도 그들이 들어갈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춤 좀 추지 않을래?」처럼.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사람들의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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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카버의 마지막 단편 소설 「심부름」을 소개합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안톤 체호프의 발병과 죽음의 순간을 다룬, 체호프의 전기처럼 진행되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중반까지는 카버의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지요. 이 작품을 쓰고 1년 후, 카버도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그래서 「심부름」은 그가 자기 죽음을 예견한 듯한 작품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심부름」을 쓸 당시에는 자신이 폐암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네요. 어떤 예감에 따라 그는 자신의 앞날을 넘겨보았던 걸까요? 이 공교로운 우연이 카버의 생애에 관해 우리가 한 마디 더 얹을 여지를 주었습니다. 마치 그의 삶도 그의 소설이 된 듯, 명백히 드러나지 않은 여백 속을 우리가 헤매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이걸 견디며 살 거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미 견디고 살았어. 이것도 견디며 살게 될 거야, 아마도.” _「상자들」 중에서


우리는 침대에서 잘 때 발을 두는 곳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보니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황급히 떠난 것 같다. 이 침대를 다시 보게 될 때마다 이런 모습을 기억하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우리는 이제 뭔가로 들어섰는데 그게 뭔지는 모른다, 정확하게는. _「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중에서


정말 오랫동안, 허니, 나는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위로할 수 없었다고**, 그녀가 말한다. 그 말을 수첩에 적어. 경험상 그게 영어에서 가장 슬픈 말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어. _「친밀」 중에서



2.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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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션의 새로운 기능인 노션 AI를 이용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리뷰를 시작할 문장을 찾기 위해서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되어 버렸군요.) “일과, 사랑, 친구, 가족, 기타 다른 관심사들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쓰더군요. AI조차 알고 있는 이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왜 이리도 실천하기가 어려울까요?


온전한 나의 하루, 온전한 나의 시간이 필요했던 김신지 작가는 점점 과부하가 걸리던 회사 일을 그만두고 호두나무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중요한 것보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시간을 되찾은 후 돌이켜볼 짬이 생긴 어떤 만남, 발화, 장면들을 이 책에 펼쳐 두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만남, 발화, 장면이 있었기에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야겠다는 바람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요. 또한, 작가는 시간을 되찾은 이후의 변화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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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묘사, 개성 있는 은유, 유머의 선. 그런 것들에는 작가의 감수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그 감수성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쪼아 보편적인 공감대를 감싸는 다채로운 빛으로 산란시키지요. 내일을 긍정하고 낙관할 가능성이 49%가 아닌 51%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게 많은 독자가 김신지 작가의 세계를 기다리는 이유가 아닐까 하네요.


작가는 여섯 살 때 엄마 말 안 듣고 낫질을 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왼손 검지를 벤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꿰맨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 흉터 덕분에 이후로 왼쪽과 오른쪽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 흉터를 만지는 습관이 생겼고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여럿 있지만, 저는 이 대목을 꼽고 싶습니다.


웃기다가 먹먹하기도 한 글을 하나둘 읽다 보면 가까이 알지 못하는 작가라도 어쩐지 잘 알게 된 듯한 착각이 듭니다. 최근 몇 년간의 저작들이 한 사람의 성장 과정 같기도 했고요. 김신지 작가는 ‘가능성’이란 소재를 마지막 글의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어쩌면 이다음 책은 바로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미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이 희망이 될 때가 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내가 끝끝내 어떤 낙관을 향해 몸을 돌린다면 ‘믿게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란 걸 이제는 안다. 세상이 어때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보고 싶은 그 세상을 먼저 살아내면 된다는 것도. _57p.


가난이 우리를 정말 가난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것처럼. 불행이 우리는 정말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것처럼. _104p.


자식은 언제나 부모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야 조금은 의지가 되는 자식의 자리에 서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듯 장바구니에 무얼 주섬주섬 주워 담는다. 꿈에서도 없는 시간이 현실에서 넉넉할 리 없고, 올려다본 하늘은 꼭 해 질 녘처럼 노랗다. 서둘러도 삶에 자꾸만 지각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자각 속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하게 되는 일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_133p.




글/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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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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