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3월 ~ 5월

2023-06-01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3월 ~ 5월

 


1. 『밑줄 긋는 남자』, 카롤린 봉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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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를 (사실 에밀 아자르로서의 자아를 더) 사랑하는 콩스탕스의 슬픔은 작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더 나올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리가 여러 가명으로 낸 책이 도합 31권, 벌써 읽은 게 6권. 1년에 한 권꼴로 읽어도 쉰 살이면 끝날 테니 그녀에게는 또 다른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콩스탕스는 집 가까운 도서관의 회원으로 등록합니다. 그녀가 사랑할 어떤 작가들이 있을까. 그러다가 폴리냐크의 『오렌지빛』이라는 책에서 ‘밑줄 긋는 남자’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도서관의 책에 이런 낙서를 해 두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책이 있다고,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을 읽어보라고요. 콩스탕스는 이끌리듯 『노름꾼』을 대출하고, 그 책 곳곳엔 마치 콩스탕스에게 말을 거는 듯한 한 남자의 밑줄이 잔뜩 그어져 있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아직 뚜렷한 직업이 없어 미래가 불투명하고, 연인도 없어 외로운 콩스탕스는 책의 적절한 문단에 밑줄을 그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듯한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소설은 마치 미스터리 로맨스처럼 도서관에 오는 한 남자가 멀찍이 콩스탕스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책을 통해 사랑을 고백해 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요.


외로움, 권태, 불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청춘의 한복판, 그녀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져 그 과정이 제법 그럼직해 보입니다. 아직 디지털 시대가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9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향수도 가득하고요. 남자가 (실은 작가인 카롤린 봉그랑이) 얼마나 문장을 잘 골라 밑줄을 그었는지 인스턴트 메시지가 넘쳐나는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낭만이 책 밖으로 뚝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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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연애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기말을 사는 젊은이들의 외로움을 적당한 부피에서, 그러니까 소설 중반까지 주 배경으로 잡히는 집안이나 도서관 출납대 정도의 규모로 다루는 성장 소설로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사변적이지도, 도발적이지도, 통속적이지도 않은 적절한 균형감이 이 책의 미덕이었습니다. 때로는 콩스탕스의 외로움, 상념이 너무 강렬하여 사실 그녀가 읽고 있는 밑줄이 다른 사람이 그은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이 책을 읽으며 긋는 밑줄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독서를 하며 “이건 내 이야기야!” 몇 번이고 감탄하는 독자처럼 말이죠.


작가도 서문에서 말하듯, 이 책은 누구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헤맬 수 있지만 결국 ‘현실의 삶’으로 한 발자국 넘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실존 작가의 실제 작품이 여럿 등장하는데요,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와 만나고 또 이별하는 두 권의 책만큼은 가상의 작가, 가상의 책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콩스탕스와 밑줄 긋는 남자의 사랑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은유하듯이요.


뭐, 소설이 다 그렇지만, 프랑스 소설은 너무 문학성이 깊(어 어렵)거나 혹은 너무 흥미 위주의 장르 성향이라거나 여하튼 극단적이라는 인상입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바로 그 중간 어디쯤에 있습니다. 시쳇말로 ‘금사빠’ 같기도 한 콩스탕스의 좌충우돌 사랑 찾기. 20대 독자분들에게 추천하지만, 어쩌면 그 시기를 지난 분들이 더 공감할지 모를 소설이었습니다.


아, 여담이지만 이세욱 번역가의 다양한 어휘 사용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밑줄 긋고 싶은’ 우리말이 참 많더라고요.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을 잊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_122p.

나는 이렇게 사는 삶의 끝이 어디인지, 이 모든 습관과 몸짓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아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는 단계에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존재해요. _126p.

나는, 우리가 뭔가를 착각한 게 틀림없으며, 두 개의 고독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_154p.


 

2.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황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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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세 국가 중 가장 먼저 접한 나라가 백제였습니다. 시골집이 부여에 있었거든요. 부여에 남은 백제의 유적지도 어렸을 적 많이 다녔던 기억입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백제에 관심이 갔지만 삼국시대의 승자는 신라. 의자왕과 삼천 궁녀라는 역사적 루머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지는 못해도 어쨌든 나라가 망해 3천 명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니 어린 마음에 그 패배의 쓴맛을 삼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 중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신라라고 말하고 다녔지요. 어디서든 승자 독식의 사고체계를 가르치던 시대였고(지금은 더 하죠?) ‘신라’라는 어감이 좋아서 그랬기도 합니다. 화랑이라는 무인들도 참 멋있어 보였고요.


이 책은 서울에 남은 백제의 흔적을 걸으며 시작합니다. 공주나 부여가 백제의 기반 아니었나? 실제로 백제의 역사에서 한강 유역에 터를 잡았던 ‘한성백제’ 시기가 2/3도 넘는다고 합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서울에 남은 고분군. 이어서 황윤 작가는 백제가 마지막 185년 동안 찬란한 꽃을 피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찰, 탑, 왕릉의 흔적을 따라 공주, 부여, 익산을 여행합니다. 크게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는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백제의 역사를 따라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지 알려주는 훌륭한 지침서입니다.


역사책은 지루하다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책장이 훌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산책을 하다가 회상을 하는 콘셉트로 역사 이야기를 호출해 집중과 이완이 잘 이루어집니다. 지루할 틈이 없는 거지요. 일반적인 서술체에 대화체, 혼잣말체(?)도 자유롭게 쓰여 실제로 누군가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고, 정보가 과하게 많지도 않습니다. 대체로 저자 개인의 추측은 삼가는 편이지만, 종종 보이는 통찰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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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한성백제를 취재할 일이 있었는데, 왕복하는 지하철에서 요긴하게 읽었을 정도로 일상-역사-산책의 삼 박자가 책 한 권에 잘 이루어져 있습니다. ‘백제 편’ 외에도 황윤 작가는 여러 권의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를 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출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백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줍니다. 사치스럽고 매일 주지육림이 펼쳐졌을 것 같은, 어렸을 적 배웠던 백제의 이미지가 회복되는 것이지요. 특히 국제적인 국가로서 백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흥미롭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위상을 높이고 있는 현재의 한국과 비슷하다는 해석도 그럴 듯하고요.


한성백제의 흔적은 충분히 돌아봤으니 언젠가 시간을 내서 저도 공주와 부여, 익산을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삼국시대, 특히 백제의 이모저모를 알고 싶으시다면, 국내 여행 어디 갈까 물색하고 계신 분이라면, 저처럼 이 책을 들고 길을 떠나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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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되 경험이 쌓이면서 백제 스타일로 이것을 흡수, 정리하였다. 그 결과 일본 등지에 큰 영향을 미친 고급 문화를 만든 것이다. 이 역시 문화 교류란 단순히 받아들인 것을 넘어 내 것으로 해석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일이자, 그렇게 결합되어 탄생한 문화는 남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_50p.

이처럼 두 탑(정림사지 5층 석탑과 불국사의 석가탑)은 귀족적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우지만 내부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새 나라의 붕괴 시점도 다가오고 있을 때 만들어진 마지막 꽃 같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작품을 볼 때마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언가 처연한 느낌이 드는가 보다. _197, 200p.

한반도 국가의 뿌리 중 하나인 부여에서 시작됨을 자랑으로 여겼던 나라,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한강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알려준 나라, 선진국으로부터 문화를 받아 주변국으로 연결하는 중개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준 나라 등 한국에 남겨진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어쩌다 보니 지금의 대한민국도 백제의 모습을 많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_248p.



3. 『꿈꾸는 하와이』, 요시모토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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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책을 꺼낸 건 아무래도 여행 때문이겠죠. 아직 떠나지 못할 여행이요. 바나나 씨와는 『바다의 뚜껑』 말고는 접점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들고 온 것도 제목과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꿈꾸는 듯한 사진에 끌렸거든요. 이후로 사로잡혔으나 이내 잊어버리고 그러다가 문득 다시 떠오르기도 하는 책이 되어 버린 겁니다. 꿈이 늘 그렇듯이요.


하와이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혼자였죠. 저와 말을 섞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출장으로 하와이에 왔다는 당시 제 일을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곳은 홀로 찾기에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수많은 신혼부부와 가족 뒤에서 스쳐 가는 배경이 되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그때 그 섬에 있던 누구보다 하와이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0년이 훨씬 넘게 흐른 지금도 11월 쌀쌀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던 도심의 눅눅한 빛이 떠오릅니다. 우의를 입고 찾았던 빅 아일랜드의 활화산과 오하우 거리의 가스등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과 여행으로 여러 번 하와이를 찾았습니다. 취재를 위해 일본에서부터 훌라도 배웠죠. 이 책은 그 여정에서 겪은 소소한 사건들, 그에게 다가온 단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훌라에 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오는데요, 할라우(훌라 교실)의 가장 큰 선생님인 쿰에게 ‘카하나 알로하(사랑의 마법)’라는 하와이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저자를 매료시켰던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까지, 하와이 전통춤이라고만 생각했던 훌라의 세계를 조금은 상세하게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담백하기도 하고 조금 간지럽기도 한 아포리즘을 길어올리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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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스타일이 저와 맞는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책의 중반을 지나고 후반으로 접어들 즈음에는 꽤나 열심히 그의 뒤를 따라 섬 이곳저곳을 다니게 됐습니다. 담담하고 긍정적인 듯 실은 까다로운 사람, 그런 사람도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얼마간 곁을 내주게 되더라고요. 특히 하와이에 보내는 애정의 색깔이 그곳에 자주 뜨는 무지개처럼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마 같은 호텔은 아니겠지만, 저자가 와이키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많은 여행자가 어떤 식으로든 해변에 붙어 있는 호텔에 묵지요) 숙소에 묵었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네요. 저도 담당자가 잡아준 호텔이 해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거든요. 실외 수영장은 폐쇄된 스카이 덱에서 맞았던 서늘한 바람살, 코인 런드리 안에서 홀로 돌아가던 세탁기, 길 건너 보이는 생활감 가득한 고층 아파트, 그런 것들이 환상과 기대로 가득한 휴양지의 민얼굴 같아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처럼 관광지에서 한참 떨어진 친구 집에 묵었다면 그리움도 배가 됐을 것 같네요.


리뷰가 아니라 여행기 같은 게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앞뒤 표지가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여행기가 아닌 것은 이 책도 마찬가지이므로 비긴 것으로 칩니다. 어차피 이 책을 곁에 둔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하와이를 꿈꾸고 있을 테니 여기엔 오독의 여지도 없겠습니다. 하와이가 더 궁금하시다면 『꿈꾸는 하와이』와 결이 완벽히 다르지만,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디센던트〉도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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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계속 쫓아다닐 때 기분은, 하늘 높이 올라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 연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손에 잡고 있는 줄을 휙휙 잡아당기는 바람의 힘으로 알고 있을 때 같다. 다른 세계의 경계와 살짝 접하고는 아스라한 기분으로, 이거 현실일까, 하면서 멍해지고 만다. _116p.

그 느낌은 그리운 이즈의 바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명으로 와글거렸던 바닷물의 냄새. 누군가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사라져 갔던 비밀로 가득했던 기척. _127p.

“하와이는 정말 천국과 비슷하더군요. 그 바람과 햇빛의 느낌이, 그래서 다들 하와이에 가면 천국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요. 천국이 하와이 같을 겁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기억하고 있는 거죠.” _144~145p.



4.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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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동산」, 「바냐 아저씨」. 어쩌다 보니 안톤 체호프를 극작가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리뷰를 한 지도 좀 된 작품이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심부름」을 읽고 체호프의 단편을 읽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현대 단편 소설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설명도 솔깃했고, (「심부름」에 따르면) 톨스토이조차 “안톤 체호프는 희곡보다는 단편이지”라고 말했다는 데 호기심이 일었거든요. 좋아하는 작가의 우상이라는 점도 물론 한몫했습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때 해야 했을 독서를 참 뒤늦게 하고 말았네요.


열 편의 단편을 묶은 『체호프 단편선』에서 인물들은 대개 시베리아의 찬 바람 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 묘사하는 세상은 그와 무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강 위로 그리고 목초지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우유처럼 희고 짙은 가느다란 안개 기둥이 물위에 비친 별빛을 덮는가 하면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리기도 하면서 강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안개 기둥들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것들은 서로 껴안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인사를 나누었고 어떤 것들은 수도사가 넓은 소맷자락에 감긴 손을 기도하듯 하늘로 치켜드는 것처럼 보였다…… _「베로치카」 중에서


작가이자 의사였던 신분으로 숱한 죽음을 봐서일까요? 그만큼 속수무책으로 질병에 스러지는 사람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일까요? 유난히 병으로 죽는 인물이 많이 나오는 단편들 속에서 풍경은 저 홀로 영원과 밀회를 나누려는 모양입니다. 죽음이 종이 한 장, 문장 하나로 짓쳐들어오는 와중에 묘사는 그림처럼 아름답다니, 그 간극에 여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서운해지기도 합니다. 하긴 단편 「미녀」에서 체호프가 역설한 ‘궁극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떠올리면 이상한 일은 아니네요. 세상을 자기 안에 생생하게 담는 시선, 배 위에서 마차 안에서 산책로 모퉁이에서 저 먼 곳으로 보냈을 체호프의 시선을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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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묘사가 전부는 아니지요. 체호프의 단편 안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처음과 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할 뿐 그로 말미암은 변화도, 감정도, 거기에서 인물이 취할 결정도 명백하게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뚝 끊긴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30cm 자에 얹힌 에누리 없이 재단된 열 개의 시간선 같달까요. 하지만 결말도, 메시지도, 하물며 웃음과 애도조차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는 거리감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사실 그 거리감 덕분에 이 책이 편안하게 읽혔습니다. 저의 몫을 찾는 데 성공했는지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지평선 위에 두루미들이 가물거리고, 산들바람이 이들의 애원하는 듯한 혹은 기뻐하는 듯한 울음을 실어 오기도 했지만 몇 분 뒤에는 아무리 애써 푸른 저편을 응시해도 점 하나 보이지 않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사람들의 얼굴이나 말도 삶 속에서 명멸하다가는 과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_「베로치카」 중에서

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마샤가 나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며 어떤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_「미녀」 중에서

그 옛날의 일들은 실제로는 그랬을 리 없는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으로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저승에서 아마도 우리는 먼 과거에 이승에서 살았던 삶을 바로 이런 감정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_「주교」 중에서




글/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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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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