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6월 ~ 9월

2023-10-05

월간 여분의 리뷰: 2023년 6월 ~ 9월



1.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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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리뷰에 “연휴나 휴가 때 읽으면 좋을 책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 줄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번잡할 때 읽으면 좋을 책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빼놓을 수 없겠다고요.


하루키가 30대일 때, 그러니까 이미 『바람』, 『핀볼』, 『양 모험』 3부작을 냈을 시점에,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라는 정보지에 1년 9개월가량 칼럼을 연재했다고 합니다. 그 글을 모은 책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이지요. 이미 한두 차례 재판된 책인데 최근 새로운 표지를 입고 세트로 다시 나왔더군요. 문동이 자꾸 우려먹는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에겐 양장본이었던 예전 버전보다 이번 버전이 좋더군요. 표지 컬러도 생생하고, 무엇보다 가벼운 페이퍼백이 본문의 결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르바이트 정보지라는 연재 처의 특성상 소소한 도시 일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많이 봐서 그런지 본인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도 적잖이 나옵니다. 80년대 중반 일본 경제 버블이 몽글몽글 커지기 전, 그나마 수수했던 시절의 풍속도 얼핏 드러나지요. 그러면서 어떤 편은 쓸 거리가 없는데 아무튼 썼구나 싶어 웃깁니다. 몇 편에 걸쳐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그리기 어려울 소재를 고르겠다고 벼르는 장난기도 재치 있고요.


이쯤 되니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가 어떤 모습이었나 궁금해집니다. 중철된 얇은 책자에 크기는 A4보다 조금 작은 것 같고, 내지 구성은 우리의 〈벼룩시장〉과 닮았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코를 들이대면 특유의 싸한 종이 냄새가 날 듯하고요. 본문에도 나오지만 이 정보지는 지역별로 나누어 발간되었으며 처음엔 20엔에서 시작해 30엔, 50엔을 거쳐 70년대 중반부터 100엔에 팔렸더군요. 하루키가 연재를 하던 시점으로 보면 아르바이트지에 올라온 도쿄 아르바이트 시급이 평균 500엔 이상이었다고 하니 대충 12분 치 일하는 값으로 정보를 얻은 셈입니다. 또, 부제가 무려 “The Daily Life of Students”네요. 타카하시 루미코의 초기 만화에서도 등장인물이 이 잡지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는 걸 보니 당시 알바를 하려던 중·고·대학생들의 필수품이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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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아르바이트 뉴스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냐면요, 옛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의 분위기가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칼럼들과 찰떡같이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장도 그렇고요,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도 그렇습니다. 팔랑팔랑한 종이 위에서 팔랑팔랑 읽기 좋은, 한 번 웃고 난 다음 이제 무슨 알바를 해야 하나 다음 페이지를 훑으러 가게 되는 시스템이 자연스레 머리에 그려집니다.


이렇게 책도 읽고 괜히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도 검색하다 보니 역시 번잡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뭐, 하루키가 어느 미래 독자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며 이 칼럼들을 쓰진 않았겠지만, 아무튼 에세이를 쓰는 그는 대단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이요. 다음 책도 상비약처럼 쟁여 놓아야겠습니다.


이따금 바다가 그리워지면 쇼난이나 요코하마에 가는데,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일부러 바다를 보러 예까지 왔습니다’ 하는 느낌이 앞서기 때문이다. 바다 쪽도 ‘여, 이것 참 잘 오셨습니다’라는 듯한 느낌이다. _26p.

나는 시종일관 유령이나 UFO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게는 아무래도 영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는 모양이다.
딱히 유령 따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능력이 없어도 아무 상관 없지만, 어쩐지 예술가답지 못하다. _75p.

식당칸에는 왠지 ‘일시적인 제도’라고나 할 만한 독특한 분위기가 떠다닌다. 즉 식당칸에서의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맛을 음미하기’ 위한 식사도 아니다. 우리는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불분명하고 잠정적인 식욕을 품고 식당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어디론가 확실하게 옮겨져간다. 애달프게 보면 애달프기도 하다. _122p.



2. 『걸어갑니다, 세계 속으로』, 김가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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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TV 프로들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6시 내고향〉, 〈TV 유치원〉, 〈생로병사의 비밀〉 , 그리고 〈걸어서 세계 속으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PD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직접 섭외하고 촬영하고 체험도 하고 편집에 대본까지 쓰는 가성비 넘치는 프로그램입니다. 듣기만 해도 고난의 연속일 것 같은데, 궁금하기도 하네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현직 KBS 교양 다큐 PD인 김가람 PD가 그 궁금증에 『걸어갑니다, 세계 속으로』라는 책으로 회답합니다. 김가람 PD는 현재 〈환경스페셜〉 팀에서 일하고 있다는데요, 〈환경 스페셜 -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편으로 2022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물론 〈생로병사의 비밀〉이나 〈환경스페셜〉을 제작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감상을 진솔하게 풀어놓습니다. 여행인 것 같지만 실은 2주간의 출장 강행군에 다름 아닌 혹독한 스케줄…. 그럼에도 그걸 소화할 수 있는 바탕에는 저자의 긍정적인 생각과 세상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1인 여행 프로그램을 만드니까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일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그런 성향이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만드는 게 아니더군요. 보는 듯 마는 듯 배경처럼 틀어 놓은 TV라도 무언가 의미를, 좋은 사람들과 풍경을, 그래서 위안을, 나아가 작은 변화의 씨앗을 주고 싶다는 의지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특히 〈환경스페셜〉 제작에 관한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호기심 많은 여행자 같기만 하던 저자가 내비치는 환경에 대한 고민, 이를테면 우리를 비롯한 선진국들이 편의를 위해 개발도상국에 전가하는 환경 비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꽤 묵직합니다. 흥 많고 정 많고 호의로 가득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가 하면, 10살도 안 된 아이들이 1달러를 위해 중금속 광산에서 착취당하는 어두운 세상이 있습니다. 저자는 PD로서 그 양쪽 세상을 두루 보았고, 그 간극에서 오는 허망함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세상 다 우리 곁에 실재한다며 균형 있게 전해주고 있지요.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교양, 다큐멘터리 PD나 영상 제작자를 꿈꾸시는 분이라면 이 책이 더 흥미로울 듯합니다. 지금 내가 짐 가방에 카메라 가방까지 너댓 개는 짊어지고 걷는 듯한 실감 나는 현장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책뿐만 아니라 앞으로 김가람PD가 만들 프로그램들이 기대됩니다.


드론이 있어도 전망대가 보이면 일단 올라간다. 드론으로 촬영한 도시 전경이 훨씬 멋지지만, 평범한 관광객이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덕목이라 생각해서다. 비틀대며 올라간 전망대는 인생샷을 찍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난간이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그게 실제 상황이니까. _55p.

아이들이 고용주에게 준 코발트는 암시장을 거쳐 글로벌 기업들에게 팔려 나간다. 암시장에서 가루가 되어 합쳐지는 순간, 어른이 캔 코발트인지 아이가 캔 코발트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 코발트로 스마트폰을 만들고, 전기 차를 만드는 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들이다. 동시에 친환경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약속하는 존경받는 기업들이기도 하다. _100p.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 게 뻔한 마을을 구태여 찾아가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네’라는 허무한 결말을 얻어오는 것. 어쩌다 느슨한 인연이 닿아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먹고사는 인간이라는 이해를 한 발짝 넓혀가는 것. _117p.



3. 『내일 쓰는 일기』, 허은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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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환경, 새로운 삶, 마침 그곳이 제주라면 저도 일기를 쓰게 될까요? 일기 쓰기는 10살 이후로는 시도할 때마다 실패했던 과업입니다. 어찌저찌 궤도에 오르더라도 낯선 풍경에 무뎌지는 속도만큼 일기장 펼치는 날도 줄어들겠지요. 그때쯤에는 이미 제가 제주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살 테고요. 제주로 이주할 계획도 없는데 지레 일기 쓰기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이의 일기장을 열어보기로 합니다. 허은실 시인의 『내일 쓰는 일기』입니다.


이 책은 허은실 시인이 제주 정착 첫해에 쓴 글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시인은 매일 손안의 제비 한 뭉치에서 설렘과 걱정, 감동과 긴장을 새롭게 뽑아 듭니다. 제주까지 집요하게 뒤따라온 의무에 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많이 아이의 성장에 감격합니다. 제주에 어린 아픈 기억들에 슬퍼하고, 그 기억을 잊지 않고자 행동합니다. 이 와중에 마음이 울렁이는 독자는 일상의 기록 뒤로 언뜻 비치는 제주의 풍광에 정신 팔리기도 합니다. 다름 아닌 시인이 그려내는 제주인데, 어떻게 한눈을 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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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쓰는 일기는 남다르다는 말보다는 시인의 눈은 지치는 법이 없다 말하고 싶습니다. 둘레길 걷듯 천천히 다가온 일상의 언어들에서 숲의 공기가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위로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여름, 짧은 일정으로 제주에 갔을 때 굳이 사려니숲길을 걸었던 것도 이 책의 언어와 호흡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뜨거운 제주 햇볕에 대시보드 위에 펼쳐둔 티셔츠가 말라가는 동안 마음도 좀 개운해졌던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도 허은실 시인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자랑하는 중입니다.) 기억하는 일에는 지치지 않는다는 말, 시 쓰기에 도전해 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저보다 소주도 잘 드시는 것 같았습니다.


시인이여, 오늘 밤 나는 제주 색시가 되어서(아니아니 제주 아주맹이인가) 쏘주를 마셔선지 이렇게 자꾸자꾸만 또 생각나는 것이 잇습네. 나 여기 모롱고지 이슥한 바위 뒤에서 맥고모자를 쓰고 우뭇가사리 건지며 제주 색시로 살렵네. 외롭고 높고 쓸쓸허니 살렵네. 여기 나려온 것 세상한테 져서가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 거라고, 가자미회에 삐루를 마시며 그대 생각을 할렵네. _46p.

한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는 일. 아무 연고 없는 이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생각하기로 하는 일. 그것이 제겐 망각에 저항하는 방법입니다. _52p.

그래, 눈물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있더라. 슬플 땐 샤워를 하래. 눈물도 물에 녹아 씻겨 나간대. 그렇게 씻어내고도 남은 눈물은 드라이어로 말리면 되지. _105p.




글/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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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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