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9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2년 9월


 

※ 이번 리뷰에는 작품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3월 10일, 끔찍한 난기류를 통과한 파리-뉴욕 간 AF006편이 무사히 JFK 공항에 착륙합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조금 지난 6월 24일, 역시 끔찍한 난기류를 통과한 파리-뉴욕 간 AF006편이 관제소와 연락을 취합니다. 이상한 일은, 6월 24일에 나타난 비행기가 모든 면에서 3월 10일에 착륙했던 비행기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체뿐만 아니라 기장과 부기장을 포함한 243명의 탑승객 전부, 이미 3월에 도착한 사람들과 DNA까지 일치하는 동일인이었습니다. 하늘이 3월의 AF006편을 그대로 복사해 6월에 내뱉은 것처럼요.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는 100일 간격을 두고 나타난 비행기에서 분신, 도플갱어, 뭐라 부르든 현존하는 이들과 완벽히 똑같은 인간들이 내린다는 설정을 장착한 소설입니다. 『아노말리』는 2020년 콩쿠르 상을 받았는데요, 프랑스 최고 문학상 수상이라는 이력과 SF 스릴러 같은 소재가 어떻게 버무려졌을지 읽기 전부터 기대됐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듯(?) 도입부는 주요 등장 인물의 개인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조금씩 ‘아노말리 - 이상 상황’의 실체를 드러내는(드라마로 말하자면 ‘떡밥’을 뿌리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미 정부가 전문가를 모아 사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중반부도 비슷한 장르 영화가 위기 해결 과정에서 쥐어 주는 스릴, 오묘한 지적 쾌감(?)과 비슷했고요. 그쯤 되자 얼른 3월과 6월의 두 인물이 대면하여 본격적으로 문학 실험이 펼쳐지길 기다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말부에서 이 소설은 보란 듯이 그걸 해내지만, 독자가 “나라면 어떨까?” 하는 질문에 찬찬히 답을 내리기에는 조금 짧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요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그들의 갈등과 고뇌, 선택 등이 강렬하게, 그러나 후루룩 지나가 버리거든요.


이 소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난다면?’ 우리는 분신과 분신이 만나 서로 받아들이는 방식, 이후의 삶에서 어떻게 공존할지 합의(순응)하는 방식에서 여러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반목하고, 누군가는 용기와 기회를 얻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3월’과 ‘6월’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6월이 살지 못한 100일 남짓한 경험, 100일의 삶이지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을 100일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는 암으로 죽어갔고, 누군가는 베스트셀러를 쓰고 자살했으며, 누군가는 아이를 가지지요. 그게 ‘3월’과 ‘6월’의 삶에 중요한 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는 듯이요.



두 번째 질문은 형이상학적입니다. ‘이 우주가 전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면?’ 작중 과학자들은 전무후무한 ‘아노말리’의 유력한 가설로 시뮬레이션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고성능 컴퓨터 안에서 재현한(혹은 창조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불길한 소문처럼 배경으로 흐르던 이 가설도 첫 질문의 진의와 이어집니다. 우리가 프로그램화된 인격체라 하더라도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과 증오를 느낀다. 앞으로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호작용할 것이며, 결국 태어나고 죽는 삶 자체에 다름은 없다. ‘실제’란 무엇일까요? 프로그램이더라도 내 존재를 자각할 수 있고 타자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이게 실존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얼핏 삶에의 충동,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주제를 지나 결말에 이르면 작가가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작중 인물들도 주장하지만 시뮬레이션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은 이미 현실을 외면하고 착각과 기만을 오히려 현실이라 여기는 데 능합니다. 기후변화, 자원 고갈, 끊임없는 전쟁. 그런 문제를 계속 외면할 때, 게임오버가 되듯 인류라는 시뮬레이션도 끝나버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걸 색다른 방식의 서사로 은유하는데, 막바지에 나타난 세 번째 AF006편의 존재가 그렇지요. 독자조차도 “두 명의 분신이 공존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웠는데 또 하나가 나온다고?” 혀를 내두를 상황. 그래서 미 대통령(이름은 안 나오지만 꽤 무능해 보이는 이 사람이 누구일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이 비도덕적이지만 아주 편리한 방법을 택하는 순간….


대량의 스포일러와 함께한 리뷰였네요. 실존적, 도덕적, 철학적 딜레마에 각자의 답을 요구하는 흥미로운 소설이었습니다.



“최악이 뭔지 알아요? 바로 그게 내일의 세상이라는 거죠. 우린 포기하고 각자도생을 꾀하지만 누구도 구제받지 못해요. 문명에서 멀어지고 있는 건 라고스가 아니라 우리죠. 우리 모두 라고스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요.” _128p.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펼친 논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한물갔습니다. 오히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그램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해야죠.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살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착각을 증명하는 모든 것에 눈을 감고 삽니다. 그게 인간이죠. 우리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_437p.




글/사진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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