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9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9월



여분의 책방 인스타그램에서 매주 소개한 책을 모아 월간 '여분의 리뷰'를 발행합니다.

2021년 9월에 소개한 책 세 권을 모아 보았습니다.



1.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지음



여기 완벽한 기사, 아질울포가 있습니다. 사실 완벽함이 지나쳐 다른 기사들은 물론 아질울포가 모시는 군주조차 조금은 그를 성가시다고 여기긴 하지만요. 아질울포는 작은 규율에도 엄격합니다. 낮이건 밤이건 부대 곳곳을 순찰하며 보초, 취사병, 보급병 들이 임무를 잘 수행하는지 감시하고, 개인 수양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의 흰색 갑옷은 흠집 하나 없고 검술은 이론서를 그대로 현실화한 듯 뛰어납니다. 궁술에도 출중하죠.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단 하나, 그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질울포의 흰 갑옷 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말도 하고 말도 타지만, 어쨌든 그는 육체가 없는 정신이자 의지이며 이상理想입니다.


칼비노의 네 번째 장편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일종의 기사 문학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8세기. 실존 인물이기도 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과 오랜 종교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사상자가 생기긴 하지만, 너무 낡은 전쟁은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제 막 전장에 뛰어든 랭보는 기강도 품위도 없는 기사들의 모습에 실망합니다. 어찌어찌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그러고 나자 삶의 목표를 잃고 말지요. 그래서 가장 기사다운 기사인 아질울포한테 의지하게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가장 뚜렷한 존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한 수녀의 회고로 진행됩니다. 존재하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다시 말하면 자아도 정체성도 없는 인물인 구르둘루. 부대의 유일한 여기사이며 랭보와 비슷한 이유로 아질울포를 연모하는 브라다만테. 그리고 과거의 아픔 때문에 염세적인 기질이 있는 토리스먼드.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소프로니아. 아질울포와 랭보를 비롯해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수녀의 펜 끝에서 그려집니다. 소설의 전반부가 인물을 소개한다면 후반부에는 기사 문학답게 모험이 펼쳐집니다. 아질울포와 토리스먼드가 얽힌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주요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거든요.


작품 해설에서 잘 설명되어 있지만, 기사 문학의 탈을 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좀 놀랐던 게 아질울포는 “자신의 행위를 기계적으로,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로봇’처럼 수행하는 현대인의 알레고리”라는 분석이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구르둘루 쪽이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살려고 하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표상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질울포는 이상주의에 빠진 인물이라고 봤고요. 하긴 칼비노가 이 소설을 쓴 1950년대로부터 7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풍자의 대상인 시대의 인간상도 그만큼 달라졌지요.


고집불통에다가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랭보한테 제대로 된 조언 하나 해 주지 않으며, 내심 다른 기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소통 불가의 아질울포는 솔직히 매력적입니다. 어느 귀부인과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 소프로니아를 구하기 위해 심해를 걸어 대양을 건너는 장면 등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존재감’이 극에 달하는 백미이고요. 작품 해설까지 읽고 나서 이 소설을 제대로 본 게 맞나 회의가 들긴 했지만, 어쨌든 풍자의 대상이라고 작가의 애정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결국 랭보와 트리스먼드 모두 아질울포에 영향을 받아 변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화자가 글쓰기를 고민하는 부분, 시적이면서 동시에 효율적으로 모험을 서사하는 방식도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존재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 눈을 감고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들었다가 얼마 후 잠들기 전과 똑같이 깨어나서 삶의 끈들을 다시 엮어 나가는 건지 아질울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존재하는 사람들이 지닌 잠잘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아질울포의 질투는 마치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투처럼 막연했다. _16p.

“오, 재미있는 일이야! 여기 있는 이 백성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저기 있는 나의 용장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군. 좋은 짝이 되겠어, 틀림없이!” _37p.

이야기를 쓰는 기술이란 사람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이런저런 것을 끌어낼 줄 아는 능력과 같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 삶이 다시 시작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을 깨닫는다. _75p.



2.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마이클 셸런버거



환경운동가인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흥미로운 한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작품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지구를 위하는 법’은 우리의 기존 환경 상식에 반하는 면이 있거든요. 공장이 숲을 살리고, 석유와 플라스틱이 멸종 위기 동물을 구했으며, 신재생 에너지나 바이오 원료 제품이 오히려 환경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요?


셸런버거는 환경을 살리기 위해선 인간이 더 적은 땅에서 더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농업, 축산업, 제조업은 물론이거니와 에너지 생산에 있어서도요.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 최선이 없는 선택지에서 차악을 택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태계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컨대 셸런버거는 선진국에서 자기들 것도 아닌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개발도상국이 댐을 짓거나 화석 연료 발전소를 세우는 걸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본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고 나야 개발도상국도 환경 보호에 동참할 여력이 생길 텐데, 지금껏 지구를 망가뜨린 주범(?)이었던 선진국들이 너희는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라며 개발도상국이 성장할 기회를 걷어차고 있다는 거지요.


이 책은 에너지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에너지는 필수적인 자원입니다. 그리고 셸런버거는 원자력이야말로 환경을 위한 최선의 에너지원이라고 말합니다. 태양력, 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에는 회의적인 입장인데,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고 환경에 해가 되기도 한다는 이유입니다. 수명이 다한 태양광 패널 쓰레기도 문제이고, 풍력 발전기 때문에 박쥐, 조류, 곤충 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면서 화석 연료 기업들이 원전에 반대하거나 신재생 에너지를 지지하는 환경 보호 단체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원전이 사라진 자리에 그들의 석탄, 천연가스 발전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재생 에너지는 왜 지지할까요? 태양력, 풍력 발전소는 날씨의 영향을 받아 전력 수급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보조 발전소를 추가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화석 연료로 돌아가는 발전소인 거지요.


2008년에 〈타임〉이 선정한 환경 영웅이라는 마이클 셸런버거.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됐지만, 본문에 한국 사례도 꽤 나오고 방한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도 한국과 인연이 있더군요. 그가 이 책을 통해 바로잡으려는 환경 상식이 너무 많아 여기에 다 소개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발췌도 후반부 요약, 결론에 집중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던 게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각자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기울이는 크고 작은 노력이 소용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자 역시 그런 말을 하지 않고요. 그가 경계하는 건 기후 변화로 지구가 당장 멸망할 것처럼 겁을 주면서 자기만족에 빠지고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기후 양치기’들입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우리로서는 셸런버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지속가능한 개발은 무엇인지, 바이오 연료, 바이오 재료처럼 ‘자연적’이라는 것이 무조건 환경에 유익한지 재고할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많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
그래서 나는 기후 변화와 삼림 파괴, 멸종 등을 둘러싼 분노와 공포 조장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환경 운동이 키우고 있는 슬픔과 고독에 주목해야 한다. (…) 해소할 길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념을 유포하며, 실재하는 증거를 호도하거나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_538p.

환경 휴머니즘의 핵심 가치를 밝힐 때가 됐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을 부정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야 한다. 특히 부유한 나라들은 지금 당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 채운 개발과 에너지 생산의 제약이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자신들은 고밀도 에너지를 쓰면서 빈곤국들은 저밀도 에너지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 자신들이 가난을 떨쳐 내고 풍요를 이룬 길에 개발도상국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_542p.

우리가 마운틴고릴라를, 노란눈펭귄을, 바다거북을 구하려는 건 인류 문명이 그 일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더 단순한 이유로 동물들을 살리고자 한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_554p.



3. 『의태어 사전』, 백지은, 김경은, 김보연 외 지음



자기 자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시오! 꼭 면접 때 들을 것 같은 질문인데요, 이런 식의 분류를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어떤 한 마디가 누군가의 대부분을 커버한다고 해도 그 나머지가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인물로 만들기도 하니까요. 한편으로 결국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정의로 시작과 끝이 판가름 날 만큼 한계가 명확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알쏭달쏭, 이것도 의태어이긴 한데요, 여러 모로 알쏭달쏭해지는 바람에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태어로 ‘나’를 표현한다? 처음 이 기획을 들었을 때 흥미로웠어요. 한 문장도 아니고 한 구도 아니고 한 단어로? 그것도 모양을 언어로 치환한 의태어만으로? 여기에 답을 하려면 몸이든 마음이든 자기가 계속 반복하는 ‘움직임’이 무엇인지 돌이킬 수밖에 없고, 그 움직임이 심성이나 사상보다 오히려 한 사람을 적확하게 표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었고, 그렇게 『의태어 사전』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랜만에 편집한 책을 소개하게 됐네요.


여기에 실린 의태어는 모두 열 개입니다. 기우뚱, 꿈틀꿈틀, 물끄러미, 미적미적, 슬금슬금, 아등바등, 자박자박, 총총총, 터벅터벅, 흔들흔들. 혹시 표제어만 읽고도 그 사람이 어떨지 조금 감이 오지 않으신가요? 어떤 단어는 기획 의도대로 필자를 설명하고요, 어떤 단어는 필자가 요즘 관심을 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어떤 건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지요. 물론 의태어라고 한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읽다 보면 저자가 글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어느 부분만 도드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재미있는 건 최소한 그 면모만큼은 이미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이메일로만 연락하고 얼굴 한 번 못 본 분도 있었는데 말이죠!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환기시키는 의태어의 힘 아닐까요?


누군가를 완벽히 알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면접, 환영회, 소개팅 같은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다른 무엇으로 표현해 보라는 질문을 주고받는 것은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근사치라도 찾고 싶다는 노력의 일환이겠지요. 여기 열 개의 표제어에서도 그런 노력이 읽히실 거예요.


당초 스무 편 이상의 글을 모아 발간하려던 책인데, 아쉽게도 기고 회신율이 50%에 미치지 못해 전자책으로만 발행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포스팅 이미지도 가상 표지만으로 만들어 리뷰하게 됐네요.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물끄러미’ 바라보아질 수밖에 없는 것에 이끌린다고 해야겠다.
고백하지 못하였던 떨림, 거절의 두려움으로 망설이던 마음, 고백을 대신했던 너의 물끄러미. _「물끄러미」 중

나는 몰랐다. 나의 신념이 이토록 헐거운 줄은. 나의 세계관이 이리도 연약한 줄은. 틈 없이 촘촘한 줄로만 알았던 나의 정체성은 강렬한 젊음이 숨 쉼으로써 형성된 것이었고, 견고하다고 여겼던 신념은 젊음 위에 허약하게 올려졌던 것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_「아등바등」 중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상이나 이미지가 이름표가 되어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편이 억울하면서도 어쩐지 속 편하기도 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상대방의 이름표 뒤 본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불편하고 반갑고도 슬퍼지는 마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_「자박자박」 중




글 신태진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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