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10월

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 10월



1.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이탈로 칼비노 지음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여전히 도시에서 사는 저는 자연을 향한 지극한 호기심이나 애정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최소한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르코발도만큼은 아니죠. 밤하늘의 별을 세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일도 없고, 풀벌레 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어서 야영을 하지도 않습니다. 자연보다는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는 글이 아무래도 머릿속에 더 잘 그려집니다. 자연이 위로나 해방감을 주는 건 확실하지만, 도시에선 어쩐지 향수가 느껴집니다. 그곳이 낯선 도시라 하더라도 말이죠.


반대로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의 마르코발도는 자연에 애착을 보이는 인물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에 정착한 그는 창고에서 상자를 나르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여섯이나 되고, 반지하 방과 다락방을 옮겨 다니며 가난하게 살지요. 하지만 그의 마음은 꿈꾸듯 도시 너머 어딘가, 혹은 도시 속에 인 작은 균열 어딘가를 찾아다닙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바다를 꿈꾸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가로수 밑동에 자란 버섯, 병원에서 본 토끼, 시들시들한 사무실 화초처럼 작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요. 사실 돈 안 들이고 뭐라도 먹어보겠다며 채집·낚시·사냥·사육을 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태반이지만요. 그러면 일은 항상 희한하고 우스꽝스럽게 돌아가고, 때로는 환상적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스무 편의 짧은 연작 단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 장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배경으로 하며 그렇게 스무 계절이 돌아 5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하지만 마르코발도의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보금자리가 바뀌기도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사적인 연결고리는 거의 없습니다. 각 이야기는 대체로 마르코발도가 제 꾀에 넘어가는 ‘웃픈’ 결말로 끝나서 안 그래도 힘들게 사는 이 친구가 더 안쓰럽게 여겨지는데요, 그를 집어삼킨 ‘도시’라는 괴물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일 겁니다. 때때로 폭설이 내리거나 짙은 안개가 끼거나 신비로운(?) 비눗방울이 도시 위를 점령하며 그 잿빛 형상이 가려질 때도 있지만, 도시는 곧 그 위압적인 태세를 되찾으며 마르코발도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마르코발도』는 비극이 아닙니다. 주요 인물들의 행보엔 유머가 있습니다. 몇몇 장은 소리 내서 웃을 만큼 한 편의 코미디 같지요. 작중에 등장하는 도시의 다른 시민들도 이기적이고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아직 순박합니다. 배경이 60년대인 만큼 아직 모두가 도시화되진 않았다는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저한테는 이탈리아 대도시의 풍경이 슬프면서도 퍽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칼비노는 꽤 공을 들여 도시의 사계를 묘사했습니다. 각 장의 도입부가 마치 도시 에세이 같기도 하지요. 괜히 제목에 ‘도시의 사계절’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듯이요.


칼비노의 책을 소개할 때마다 ‘환상성’을 논하는 게 진부할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선 그 솜씨가 한층 원숙합니다. 중세도 아닌 60년대 대도시에서 가난한 노동자가 벌이는 일상적인 모험, 거기에 환상적인 요소가 어떻게 녹아들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지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르코발도는 눈을 단단한 벽처럼 쌓는 방법을 배웠다. 만약 계속해서 그렇게 벽들을 쌓는다면 자기 혼자만을 위한 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은 오로지 자기만 아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며,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길을 잃을 것이다. 도시를 새로 만들고 집처럼 높은 눈 더미를 쌓아 놓으면 아무도 진짜 집들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_29p.

마르코발도는 빛과 그림자 사이 바로 그곳에서 잘려 나간 달의 그 좁은 부분을 바라보면서, 마치 밤에 기적적으로 햇빛이 비치는 바닷가에 닿은 것처럼 일종의 향수를 느꼈다. _102p.

보도 위의 사람들도, 그 배경이 되는 건물들의 벽면도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그런 검은색을 배경으로 허공에는 무수하게 많은 황금빛 잎사귀들이 반짝거리면서 빙글빙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빨간색과 장밋빛 손들이 잎사귀를 잡으려고 어둠 속에서 뻗쳐 나왔다. 바람은 저 끝에 있는 무지개를 향해 황금빛 잎사귀와 손과 함성을 올려 보냈다. _113p.



2. 『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플로라는 지금껏 세 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입니다. 그녀의 작품 전부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최근엔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습니다. 대중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라는 이미지 덕분에 흥행성도 어마어마하지요. 하지만 이제 플로라의 주 관심사는 소설이 아닌 딸, 그녀가 홀로 키우고 있는 세 살배기 캐리입니다.


한편 파리 뤽상부르공원 근처에 사는 로맹 오조르스키도 지금껏 열아홉 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입니다. 그는 소설이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믿으며, 그 믿음을 실현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 모든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어림잡아 4만 5천 시간 동안 소설을 써 온 로맹은 여전히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지만, 그의 주 관심사 역시 이젠 소설이 아닙니다. 일곱 살 아들, 테오이지요.


장르는 달라도 각각 잘 나가는 두 작가는 아이와 얽힌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로맹의 아내는 이혼 선언과 동시에 로맹을 폭력적이고 불성실한 남편으로 모함해 재산과 양육권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플로라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아무도 없는 그들만의 200㎡ 스튜디오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중 캐리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들어온 사람도 없고 나간 사람도 없는 아파트. 납치? 초현실적인 존재의 저주? 너무나 완벽한 밀실 사건이라 오히려 플로라가 용의자로 의심받을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한 두 작가의 이야기가 『인생은 소설이다』의 주축을 이룹니다. 사실 기욤 뮈소의 소설은 처음입니다. 작년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는 언젠가 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마침 연휴 기간이라 저녁 즈음에 책을 빼 들었는데, 과연 기대했던 대로 ‘페이지 터너’였습니다. 하룻밤에 소설 한 권을 다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인물 소개 외에 뭔가를 더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가 되는 작품이라 리뷰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소설 속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작가의 작품과 아포리즘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단순히 인용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판을 뒤집는 전개와 찰떡같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게다가 기욤 뮈소 본인의 철학이나 집필 습관을 그대로 투영한 듯한 로맹의 창작 기법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더군요. 창작자가 현실과 픽션을 오가면서 점점 그 경계가 무너지는 혼란에 빠지는 것. 이 작품은 뉴스, 회고, 인터뷰,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다양한 형식을 동원하고, 실존 인물과 작품을 등장시키며 독자에게도 그 비슷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하긴 어느 때보다도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인지라 우리 수용자들 또한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이미 길을 잃은 상태인지도 모르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스포일러 얼럿. 소설 속 인물들은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추측성 기사, 조작된 정보로 조회수를 높이려고 혈안이 된 온오프라인 언론사들을 전방위적으로 비난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는 전부 ‘진실’입니다. 책을 덮고 나면 그게 또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작가이고,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을지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해요.”
“당신이 쓰는 소설이라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작가들은 간혹 현실 세계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고 들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_78p.

“우린 헤어지지 않아.”
내 안의 작가가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해결하기 힘든 난관에 봉착해도 초자연적인 인물이 출현해 도움을 주거나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행해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해주기도 하니까. _116p.

내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주변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언제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내 가까이에 있어주었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어느 누구보다도 나와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_180p.



3.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알제리 북부 어느 고원 지대에 바다를 등지고 앉은 도시, 오랑. 처절하게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오랑은, 그래서 이 책의 서술자가 쓴 표현에 따르면 “아무것도 예감할 수 없는 도시”입니다. 이런 평범한 도시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감염병이 덮친 사건은 이해나 양해는 물론 오해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나 우리나 역사책을 펼치면 튀어나오는 죽음의 숫자와 묘사에 압도되어 지금, 이곳,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믿어 왔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흑사병에 점령당한 가상의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합니다. 자신을 서술자라고 일컫는 화자는 페스트 발발부터 종료까지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바를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묘사합니다. 특히 서술자의 관심은 최악의 질병을 맞닥트린 오랑의 시민들이 각각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는지 기록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페스트가 오랑이란 도시에 “유배와 이별”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쟁과 나치의 폭압을 경험한 카뮈는 페스트라는 질병을 통해 거대한 악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페스트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 전체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면서 시민들은 이동의 자유는 물론 생필품을 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이 이별하게 됩니다. 『페스트』가 코로나 시대에 다시 주목을 받은 건 단순히 ‘질병’이 소재라는 것을 넘어, 이 재난 또한 우리를 ‘유배’시키며 서로 ‘이별’하게 만들었다는 유사점 때문일 것입니다.


『페스트』의 주요 인물들은 페스트 치하에서 저마다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하며 성실하게 제 임무를 다하고, 누군가는 비극에 동조하며 사욕을 챙기지요. 『이방인』의 뫼르소에 비하면 『페스트』의 주요 인물들은 행동의 요인이 명확하고 그 심정을 이해하기도 쉬운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평면적이진 않습니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고 관찰하는 작품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기 마련입니다. 『페스트』라는 유리는 도시 전체를 속속들이 비출 만큼 거대하고요.


재난 영화의 도입부 같은 1장부터 시작해서 페스트가 물러감에도 슬픔은 더 짙어지는 5장에 이르기까지 카뮈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훨씬 속도감 있게 읽었습니다. 의사 리외는 물론, 카뮈 본인의 사상을 이어 받은 타루와 단 한 문장을 위해 살아남은 그랑은 오랜만에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소설 속 인물이 되었고요. 『페스트』의 마지막 즈음에 서술자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코로나 시대를 에세이나 인문서는 벌써 기록하기 시작했고, 곧 소설과 영화, 드라마로 그 작업이 이어질 겁니다. 역사책에도 몇 줄이나 한 장 정도로 기록되겠지요. 그중 하나는 『페스트』만큼의 미덕을 지닌 거울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완벽할 정도로 갑작스러운데다 언제 끝날지 예견할 수도 없는 그 이별에 망연자실한 채, 우리는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토록 멀어진 존재,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 하루하루를 다 차지해버린 존재에 대한 추억에 저항하지 못했다. _89p.

재앙만큼 보잘것없는 것은 없고, 큰 불행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단조롭게 느껴진다. 그런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페스트 치하에서 보낸 끔찍한 날들을 화려하고 잔혹한 커다란 불길처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발아래 놓인 모든 것을 짓밟아버리는 끝없는 답보 상태로 기억하는 것이다. _212p.

“정직한 사람, 거의 아무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해요. 절대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한 법이죠! (…)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 _295p.



4.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 지음



출판사들이 커트 보니것을 대체로 커트 ‘보네거트’로 소개하던 시절, 그의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한 권을 빼 들었다가 몇 주 동안 서가에 보관된 그의 책을 다 읽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이, 삶의 특정 시기에, 보니것을 즐겨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로부터 남아 있는 그의 인상은 이렇습니다. 웃기고, 냉소적이고, 풍자를 아주 제대로 한다. 보니것을 찾는 특정 시기란, 그러니까 골 때리고 시니컬한 뭔가가 간절해지는 시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20대에 그의 작품을 접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겠고요.


오랜만에 『제5도살장』을 다시 읽으며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가 좀 웃긴 사람인 건 맞는데 인간을 향한 애정이야말로 유머 감각 이상으로 그가 잔뜩 품고 있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번역가의 말에 따르면 총 106번 나온다는 “뭐 그런 거지(So it goes)”라는 문장이 세상 모든 죽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애도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이번에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아, 여기서 “뭐 그런 거지”는 화자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언가가 죽을 때 후렴처럼 반복하는 말버릇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번역본에서는 “뭐 그렇게 가는 거지.”라고 썼던 거로 기억해요. 후자가 자극적이라 재밌긴 한데 좀 염세적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 해도 106번이라면 그게 작품의 인상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겠고요.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미국과 영국, 특히 영국 공군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독일 드레스덴에 엄청난 폭격을 가해 도시 전체를 괴멸로 몰고간 작전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25,000명에서 35,000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희생자가 10만 명이 넘는다고도 하고요, 이 소설에선 13만 명 넘게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커트 보니것 자신이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그날 드레스덴에 있었습니다.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함께 그들이 노역하던 제5도살장의 지하 저장고에 들어가 있던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요. 그는 그때의 충격을 20여 년 넘게 간직하다가 마침내 이 소설 『제5도살장』에서 대면합니다. 그래서 장르가 ‘SF’로 분류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빌리입니다. 보니것과 함께 독일군의 포로였다가 드레스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인물이지요. 빌리는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시간 여행을 하거든요. 게다가 그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동물원’에 전시된 이력도 있고, 거기서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고차원의 이치를 배우기도 합니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4차원의 존재라 이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고요. 이게 사실이라면 아주 중요한 위로가 될 수도 있는데요, 누군가 죽어도 그는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분명히 살아 있으니 실제론 세상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거죠. 시체는 단지 그가 “나쁜 상태에” 처해 있을 뿐인 겁니다.


그렇다고 보니것이 드레스덴에서 숯덩이가 된 수만 명의 사람들도 어느 시간대엔 잘 살아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나치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된 유대인들이나 소설 출간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전의 희생자들이 괜찮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시간대를 다 볼 수 있는 4차원의 존재가 아니거든요. 시간에서 풀려나고 트랄파마도어인들과 친분이 있던 빌리조차 죽음을 가벼운 사건으로 여기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빌리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갑자기 부유한 검안사로 살아가는 일상으로(그러니까 미래로) 날아가는데요, 바꿔 생각하면 전후의 ‘현재’에도 끊임없이 1944년과 1945년의 기억이 떠올라 고통받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 멋진 소설의 소재와 구성을 외상 후 증후군으로 인한 착란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빌리는 정말 시간에서 풀려났고,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납치된 적이 있으며, 지구인들에게 시간의 진실에 관해 알리려고 하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뭐 그런 거죠.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늘 그렇습니다. 새만 빼면. _33p.

그와 빌리는 (…)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독일군 병사라고 오인하여 열네 살짜리 소방수를 쏘았다. 뭐 그런 거지. 빌리는 유럽사 최대의 학살을 보았는데, 그것은 드레스덴 폭격이었다. 뭐 그런 거지.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과 우주를 다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_131p.

도살장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마차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념품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불행한 순간은 무시하라고-예쁜 것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런 선별이 빌리에게 가능했다면, 그는 수레 뒤에서 햇볕에 흠뻑 젖은 채 꾸벅꾸벅 졸던 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_242p.




글 신태진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