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의 여분

월간 여분의 리뷰: 2021년의 여분



1. 『서울은 말이죠…』, 심상덕 지음



자정이 되면 울리던 통행금지 사이렌, 골목마다 하나씩은 자리잡고 있던 구멍가게, 양복이나 전축, 대학교재 따위를 맡겨 급전을 마련하던 전당포, 커피 하나 시켜놓고 답배 한 갑과 시간을 고스란히 태우던 다방, 철마다 불이 환하던 양장점, 마을에서 물 깃던 우물, 가위질하는 엿장수, 종로를 환히 밝히던 야시장…

『서울은 말이죠…』는 이제 기억에만 남은 서울의 사라진 풍경을 하나씩 되살려 냅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한 심상덕 작가의 방송 원고를 엮은 책으로, 한 편 한 편이 짧지만 거기서 그려지는 그림은 꼭 심야에 듣는 라디오처럼 머릿속에 널찍하게 펼쳐져요. 가끔은 내 기억으로 가져오고 싶은 장면도 있답니다.


전당포에 가서 급한 돈을 빌리고 싶어도 마땅히 맡길 담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밥 먹을 때 쓰던 놋그릇을 맡기거나 남편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한 번씩 꺼내 입던 양복 한 벌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때는 모두 단벌신사였습니다. _「전당포」 중에서

겨울철엔 빨갛게 달아오른 톱밥 난로가 다방 안에서 훈훈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종일토록 벽에 기대앉아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 그런 손님들을 가리켜 벽화처럼 온종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벽화'라고도 불렀습니다. _「커피」 중에서

(종로 2, 3가 사이에 있던) 야시장은 1940년대까지 아주 활발하게 운영됐습니다. 물건을 사라고 "골라 골라" 외치는 영세 상인들과 싼값에 일용품을 사려는 서민들로 항상 북적거렸죠. 예전에는 시골에서 서울에 오면, 낮에는 창경원의 동물원에 가고 밤에는 종로 야시장을 구경해야 서울 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할 만큼 야시장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_「종로 야시장」 중에서 



2. 『이스탄불』, 오르한 파묵 지음



오르한 파묵을 처음 만난 책이 『이스탄불』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 100쪽까지였지요. 「파리리뷰」에 실린 파묵의 인터뷰를 읽고 생긴 호기심에 이 500쪽짜리 에세이를 덜컥 집어들었는데, 터키도 이스탄불도 그의 문체와 이난아 교수의 번역도 모두 낯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탄불 위에 당시 그의 최근작이었던 소설을 펼쳐서 먼저 읽었죠. 그렇게 오르한 파묵의 세계 – 이스탄불에 들어서고 나자 이 책도 술술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도시 에세이’ 중 가장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작품이 되었고요.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제외하면 오르한 파묵은 평생 이스탄불에 살았습니다. 그의 소설도 시대는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넓어져도 터키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 도시가 제가 사는 도시처럼 친밀해집니다. 언젠가는 이스탄불을 거닐다가 작가를 만나는 꿈도 꿨습니다….

그런 저자가 일종의 자서전이자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주제로 쓴 에세이가 바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청년기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요. 가족과 도시의 사람들, 소설가와 시인, 역사학자 들,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이스탄불을 찾았던 서양의 예술가들, 사건들,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비애’와 거기서 파생된 감정들. 파묵의 소설이 그렇듯 이 에세이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슬퍼집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비극이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이스탄불엔 슬픈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기선 누구나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뭔가를 떠올리게 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면에선 소설을 먼저 접하고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파묵 소설들의 종합판 같은 입문작으로는 『내 마음의 낯섦』을, 신선한 형식의 소설을 좋아하시면 『검은 책』,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순수 박물관』, 추리와 시대물(?)을 좋아하시면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합니다. 언젠가 이 작품들 중 하나를 소개해도 좋겠네요.

나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제, 비애와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수백 명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그 암담한 느낌, 비애에 가까워졌다. 나는 지금 이스탄불 전체의 비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_132p.

할리우드 영화처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진짜 삶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고, 나를 포함한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는 엉망이며 특징도 없고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낡고 오래되고 값싼 곳에서 살아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부차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초라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내가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_419p.

아버지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물었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질문은 좋은 것이며, (…) 이 모든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들로 고심하거나 삶에서 기쁨이나 심오함을 추구할 때 자동차나 집이나 배의 창문을 통해 보았던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변화무쌍하게 끝이 날 테지만, 우리 눈앞에서 흐르는 도시의 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꿈속에 나오는 추억처럼 우리와 함께 남을 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_427~428p. 



3.『로포텐』, 정해진 지음



8년 동안 디자이너로 살며 숱한 야근과 병을 얻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떠난 북유럽. 여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고, 눈물도 흘리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낍니다. 돌아와서도 삶은 원래대로 이어져 이제 15년차가 넘는 디자이너가 됐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후로 여력이 될 때마다 북유럽을 다시 찾게 됐다는 것입니다. 『로포텐』을 쓴 정해진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로포텐 제도는 노르웨이 북서부에 있는 군도입니다. 계절에 따라 극야와 백야가 오고, 겨울엔 물론 오로라를 볼 수 있으며, 대구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 먼 북쪽, 극지에 가까운 그 땅과 바다엔 묘한 자력이 있어요. 땅 끝에 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스물네 시간 낮이 계속되거나 스물네 시간 어둠만 내리는 세상이라면 해답 없는 질문도 풀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북극으로, 북극에 가까운 그 땅과 섬으로 나아가는 건가 봅니다.

제가 극지방, 아니, 『로포텐』을 서점 매대에서 보고 집어들 수밖에 없었던 건 지도책처럼 세로로 길쭉한 판형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표지에 박힌 금박, 감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사진 배치, 책을 반으로 나누어 앞쪽은 4도 인쇄, 뒤쪽은 1도 인쇄로 찍은 효율성. 정보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고, 만들기 어렵다는 지도 이미지도 깔끔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직업병(?)이 튀어나왔는데, 그렇습니다, 『로포텐』은 편집자나 북 디자이너에게 레퍼런스가 될 책입니다. 이 책은 정해진 작가가 쓰고, 찍고, 디자인도 직접 한 책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엔 거의 정보가 없는 ‘로포텐 제도’를 안내하고 있어 유용하기도 하지요. 에세이 파트가 짧은 게 아쉬울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나침반 같은 마음이 된다면, 얼어붙은 겨울의 극지에서 뵙겠습니다. 또는 백야의 섬에서 God Kveld, 가장 밝은 저녁 인사를 나눕시다.

로포텐 제도의 끄트머리 오. 탄생, 죽음, 일출, 일몰… 모든 시작과 끝은 그 이름만으로 가치를 지닌다. 이곳도 그렇다. _92p.

지난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친구와 “여기는 마치 촬영이 끝난 트루먼쇼 세트장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이곳은 그것의 결정판이었다. _95p.

해가 지지 않는 이곳에서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고 너나 할 거 없이 몽유병 환자처럼 넋을 놓고 주변을 서성인다. _103p. 



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잘 찍은 인물 사진은 그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인물의 표정, 시선, 제스처, 옷차림, 배경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평면 이미지가 화면 너머로깊어지기도 하고, 테두리 바깥으로 넓어지기도 합니다. 피사체가 유명인이라면 이미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부각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지요. 전혀 모르는 인물인데 잘 알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존 버거는 『글로 쓴 사진』에서 인물 사진이 이룰 수 있는 예술적 성취에 글로 도전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가 말하는 ‘글로 쓴 사진 - 포토카피’를 통해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사진으로 찍듯 글로써 인물과 풍경을 그려냅니다. 직접적인 묘사, 저자가 인물과 나눈 대화나 인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과 겪은 사건과 그 인물을 놓고 펼친 상상을 동원해서요.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지만 누구도 그렇게 쓰기 쉽지 않을 적확한 첫 문장은 순식간에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두세 쪽, 길게는 예닐곱 쪽의 포토카피 안에서 유영시키다가 급작스레 문을 닫고 현실-챕터의 끝으로 끄집어내지요. 어떤 사진에 매료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 사진에서 눈을 떼는 덴 몇 십 초, 혹은 몇 십 분이 필요한 것처럼요.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사연이란 게 누구도 관심 없는 무의미한 사건일 수도 있지요. 나한텐 삶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요. 하지만 존 버거는 그 소외된 인물, 이야기를 지면 위로, 빛 속으로 끌어냅니다. 이 책 안에서 만나는 포토카피의 피사체는 흡사 소설 속 주요 인물처럼 주목을 끕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실은 유의미한 존재라는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존 버거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그의 포토카피에 옮겨 적습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존 버거가 글로 쓴 사진들도 이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인은 새 한 마리를 손에 올려놓더니, 머리를 흔들고 팔꿈치로 쳐내면서 다른 새들을 쫓았다. (…)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나 받아 먹지 않았다. 여인이 다른 비닐 봉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다. 그것은 우유가 조금 담긴 아기 젖병이었다. 비둘기의 입을 벌리더니 부리 속으로 몇 방울 떨어뜨려 넣었다. _35p.

그곳 산에서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 버리기도 한다. _83p.

비슈는 영원했다. 말이 늙어 일할 수 없게 되면 또 다른 어린 말을 사서 비슈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언젠가 고삐 하나를 내 앞에 들어 보인 적이 있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조용히 물어 왔다.
말을 보냈다는 뜻 아닌가요.
십오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그가 말했다. _92p. 




글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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