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우엘벡은 흔히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라 불립니다. 그의 작품엔 선정적이거나 잔혹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정치적 올바름’의 정반대 편에 있는 인물과 사건, 사고思考를 묘사하는 데도 거침이 없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주인공조차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독백을 하고 있으면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최근작인 『세로토닌』에서 옮긴이가 후기에 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엔 ‘빌런’이 가득하다고요. 물론 주인공-화자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우엘벡의 소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독자에게 시사점을 주고, 작품 속 인물과 서사가 흥미롭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도 적잖이 웃깁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은 그의 첫 번째 소설로 다른 작품들의 특징이 될 씨앗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고립되고 의욕도 없으며 자기파괴적인 주인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부를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현대인이 육체관계를 갖기 위한 경쟁 상태에도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소설 속에선 노골적으로 외모나 매력에 따라 육체적인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을 나눕니다. 화자는 2년 전 연인과 헤어진 이후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동료인 티스랑은 만나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이지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사랑인가 성관계인가? 이 둘을 혼동하는 건가? 아니면 실상 인간에게 사랑은 육욕이나 다름없다는 것인가?
주인공은 심낭염을 앓은 후 염세적인 태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우울증이 심해집니다. 전도유망한 직장을 버리고, 동료에게 옛 연인을 닮은 여자를 죽이라고 부추기며(미리 준비한 칼까지 건네주지요),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 상담사와 치료를 시작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우리는 단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요. 그의 무기력과 우울은 정말 사랑 때문에, 예컨대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때문일까요? 그의 말대로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더 갖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가 ‘고통’만 안겨주기 때문일까요?
화자는 퇴원 후 몇 번이고 가려다 실패했던 마자스 숲으로 떠납니다. 초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은 행복감, 희망을 느낍니다. 바로 그때 긍정적인 감정은 다시 고통으로 변하고…. 이후로 우엘벡이 쓸 다른 소설들처럼 행복한 결말도, 차라리 마땅한 인과응보도 없습니다. 그저 오후 2시 같은 인생, 정점에 떴던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인생의 단면만 남았을 뿐입니다.
『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미셸 우엘벡은 흔히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라 불립니다. 그의 작품엔 선정적이거나 잔혹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정치적 올바름’의 정반대 편에 있는 인물과 사건, 사고思考를 묘사하는 데도 거침이 없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라지만 주인공조차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독백을 하고 있으면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최근작인 『세로토닌』에서 옮긴이가 후기에 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엔 ‘빌런’이 가득하다고요. 물론 주인공-화자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우엘벡의 소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독자에게 시사점을 주고, 작품 속 인물과 서사가 흥미롭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도 적잖이 웃깁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은 그의 첫 번째 소설로 다른 작품들의 특징이 될 씨앗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고립되고 의욕도 없으며 자기파괴적인 주인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부를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현대인이 육체관계를 갖기 위한 경쟁 상태에도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소설 속에선 노골적으로 외모나 매력에 따라 육체적인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을 나눕니다. 화자는 2년 전 연인과 헤어진 이후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동료인 티스랑은 만나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치근덕거리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이지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사랑인가 성관계인가? 이 둘을 혼동하는 건가? 아니면 실상 인간에게 사랑은 육욕이나 다름없다는 것인가?
주인공은 심낭염을 앓은 후 염세적인 태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우울증이 심해집니다. 전도유망한 직장을 버리고, 동료에게 옛 연인을 닮은 여자를 죽이라고 부추기며(미리 준비한 칼까지 건네주지요),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 상담사와 치료를 시작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우리는 단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요. 그의 무기력과 우울은 정말 사랑 때문에, 예컨대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때문일까요? 그의 말대로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더 갖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가 ‘고통’만 안겨주기 때문일까요?
화자는 퇴원 후 몇 번이고 가려다 실패했던 마자스 숲으로 떠납니다. 초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은 행복감, 희망을 느낍니다. 바로 그때 긍정적인 감정은 다시 고통으로 변하고…. 이후로 우엘벡이 쓸 다른 소설들처럼 행복한 결말도, 차라리 마땅한 인과응보도 없습니다. 그저 오후 2시 같은 인생, 정점에 떴던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인생의 단면만 남았을 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삶이 꿈꾸던 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제 처음 느끼셨나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던 기분이 완전히 바닥나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이미 나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 처음 깨달으셨나요? 여기 어느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있습니다. 그는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지위와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자신의 삶이 성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성공은 한 메조소프라노의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콘트라베이스』는 전체 길이가 거의 2m에 달하는 콘트라베이스를 짊어지고 사는 남자의 모노드라마입니다. 모노드라마라는 형식은 참 흥미롭지요. 연극이라는, 문학이라는 본질을 잠시 잊고 상상해 봅시다. 거의 매일을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이 갑자기 많은 사람들 - 관객 혹은 독자 들을 초대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는 재미있는 음악사와 유명한 음악가들에 대한 험담을 소곤거리고,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이야기도 늘어놓다가, 종종 전축으로 고전음악의 명곡들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맥주도 마시고요. 오늘 저녁 중요한 공연을 앞둔 그는 사실 단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세라!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다고 합니다. 재즈라면 모를까, 음악사 전체를 봐도 마찬가지라고요. 훌륭한 작곡가들은 베이스 연주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도저히 실연 불가능한 악보를 휘갈겨 놓았습니다. 혹 이 악기에 관심을 기울인 작곡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입니다. 관현악단이건 실내악단이건 그들의 곡을 연주할 일은 없는 거지요. 이런저런 악기를 전전하다 결국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된 그는 그것으로 자기 인생에 진전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이미 걸어온 길 때문에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좁아졌음을 알아차릴 때처럼요. 하지만 그가 콘트라베이스를 버릴 수 있을까요? 그의 소원대로 저 공간만 차지하고 예민한 악기를 박살내서 불쏘시개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요?
어릴 적 처음 읽었을 때부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쥐스킨트의 작품은 『콘트라베이스』였습니다. 갑자기 우리를 초대해 기쁨부터 절망까지 모두 늘어놓는 이 남자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식상한 말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곧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화의 마지막 즈음 그는 자신의 삶에 일대전환을 일으킬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세라에게 자신이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한 계획이지요. 이 책의 다른 서평 마지막엔 이런 질문이 많습니다. 그가 과연 그 계획을 실현했을까? 예전엔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일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앞으로 남은 삶이 꿈꾸던 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제 처음 느끼셨나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던 기분이 완전히 바닥나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이미 나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 처음 깨달으셨나요? 여기 어느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있습니다. 그는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지위와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자신의 삶이 성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성공은 한 메조소프라노의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콘트라베이스』는 전체 길이가 거의 2m에 달하는 콘트라베이스를 짊어지고 사는 남자의 모노드라마입니다. 모노드라마라는 형식은 참 흥미롭지요. 연극이라는, 문학이라는 본질을 잠시 잊고 상상해 봅시다. 거의 매일을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이 갑자기 많은 사람들 - 관객 혹은 독자 들을 초대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는 재미있는 음악사와 유명한 음악가들에 대한 험담을 소곤거리고,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이야기도 늘어놓다가, 종종 전축으로 고전음악의 명곡들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맥주도 마시고요. 오늘 저녁 중요한 공연을 앞둔 그는 사실 단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세라!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다고 합니다. 재즈라면 모를까, 음악사 전체를 봐도 마찬가지라고요. 훌륭한 작곡가들은 베이스 연주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도저히 실연 불가능한 악보를 휘갈겨 놓았습니다. 혹 이 악기에 관심을 기울인 작곡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입니다. 관현악단이건 실내악단이건 그들의 곡을 연주할 일은 없는 거지요. 이런저런 악기를 전전하다 결국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된 그는 그것으로 자기 인생에 진전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이미 걸어온 길 때문에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좁아졌음을 알아차릴 때처럼요. 하지만 그가 콘트라베이스를 버릴 수 있을까요? 그의 소원대로 저 공간만 차지하고 예민한 악기를 박살내서 불쏘시개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요?
어릴 적 처음 읽었을 때부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쥐스킨트의 작품은 『콘트라베이스』였습니다. 갑자기 우리를 초대해 기쁨부터 절망까지 모두 늘어놓는 이 남자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식상한 말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곧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화의 마지막 즈음 그는 자신의 삶에 일대전환을 일으킬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세라에게 자신이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한 계획이지요. 이 책의 다른 서평 마지막엔 이런 질문이 많습니다. 그가 과연 그 계획을 실현했을까? 예전엔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일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8년 동안 디자이너로 살며 숱한 야근과 병을 얻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떠난 북유럽. 여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고, 눈물도 흘리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낍니다. 돌아와서도 삶은 원래대로 이어져 이제 15년차가 넘는 디자이너가 됐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후로 여력이 될 때마다 북유럽을 다시 찾게 됐다는 것입니다. 『로포텐』을 쓴 정해진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로포텐 제도는 노르웨이 북서부에 있는 군도입니다. 계절에 따라 극야와 백야가 오고, 겨울엔 물론 오로라를 볼 수 있으며, 대구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 먼 북쪽, 극지에 가까운 그 땅과 바다엔 묘한 자력이 있어요. 땅 끝에 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스물네 시간 낮이 계속되거나 스물네 시간 어둠만 내리는 세상이라면 해답 없는 질문도 풀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북극으로, 북극에 가까운 그 땅과 섬으로 나아가는 건가 봅니다.
제가 극지방, 아니, 『로포텐』을 서점 매대에서 보고 집어들 수밖에 없었던 건 지도책처럼 세로로 길쭉한 판형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표지에 박힌 금박, 감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사진 배치, 책을 반으로 나누어 앞쪽은 4도 인쇄, 뒤쪽은 1도 인쇄로 찍은 효율성. 정보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고, 만들기 어렵다는 지도 이미지도 깔끔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직업병(?)이 튀어나왔는데, 그렇습니다, 『로포텐』은 편집자나 북 디자이너에게 레퍼런스가 될 책입니다. 이 책은 정해진 작가가 쓰고, 찍고, 디자인도 직접 한 책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엔 거의 정보가 없는 ‘로포텐 제도’를 안내하고 있어 유용하기도 하지요. 에세이 파트가 짧은 게 아쉬울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나침반 같은 마음이 된다면, 얼어붙은 겨울의 극지에서 뵙겠습니다. 또는 백야의 섬에서 God Kveld, 가장 밝은 저녁 인사를 나눕시다.
<책속에서>
로포텐 제도의 끄트머리 오. 탄생, 죽음, 일출, 일몰… 모든 시작과 끝은 그 이름만으로 가치를 지닌다. 이곳도 그렇다. _92p.
『로포텐』, 정해진 지음8년 동안 디자이너로 살며 숱한 야근과 병을 얻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떠난 북유럽. 여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고, 눈물도 흘리고,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걸 느낍니다. 돌아와서도 삶은 원래대로 이어져 이제 15년차가 넘는 디자이너가 됐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후로 여력이 될 때마다 북유럽을 다시 찾게 됐다는 것입니다. 『로포텐』을 쓴 정해진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로포텐 제도는 노르웨이 북서부에 있는 군도입니다. 계절에 따라 극야와 백야가 오고, 겨울엔 물론 오로라를 볼 수 있으며, 대구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 먼 북쪽, 극지에 가까운 그 땅과 바다엔 묘한 자력이 있어요. 땅 끝에 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스물네 시간 낮이 계속되거나 스물네 시간 어둠만 내리는 세상이라면 해답 없는 질문도 풀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북극으로, 북극에 가까운 그 땅과 섬으로 나아가는 건가 봅니다.
제가 극지방, 아니, 『로포텐』을 서점 매대에서 보고 집어들 수밖에 없었던 건 지도책처럼 세로로 길쭉한 판형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표지에 박힌 금박, 감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사진 배치, 책을 반으로 나누어 앞쪽은 4도 인쇄, 뒤쪽은 1도 인쇄로 찍은 효율성. 정보도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고, 만들기 어렵다는 지도 이미지도 깔끔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직업병(?)이 튀어나왔는데, 그렇습니다, 『로포텐』은 편집자나 북 디자이너에게 레퍼런스가 될 책입니다. 이 책은 정해진 작가가 쓰고, 찍고, 디자인도 직접 한 책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엔 거의 정보가 없는 ‘로포텐 제도’를 안내하고 있어 유용하기도 하지요. 에세이 파트가 짧은 게 아쉬울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나침반 같은 마음이 된다면, 얼어붙은 겨울의 극지에서 뵙겠습니다. 또는 백야의 섬에서 God Kveld, 가장 밝은 저녁 인사를 나눕시다.
<책속에서>
로포텐 제도의 끄트머리 오. 탄생, 죽음, 일출, 일몰… 모든 시작과 끝은 그 이름만으로 가치를 지닌다. 이곳도 그렇다. _92p.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빨리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도 그녀가 산책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이젠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메리 올리버를 읽는 속도는 시인의 걸음걸이보다 느린 편이 알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음미하며 산책하는 중이니까요. 활자와 글줄의 여백 사이로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 “녹슨 색깔로” 반짝이는 바다, 재활용한 자재로 지은 작은 집이 보입니다.
『휘파람 부는 사람』의 원제는 『Winter Hours(‘겨울의 순간들’로 번역)』인데요, 한국어판에서는 시 「휘파람 부는 사람」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 시에서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의 동반자였던 말론 쿡입니다. 하지만 편집자 혹은 번역자가 메리 올리버의 삶을 휘파람이란 시어와 연관 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책 제목으로 더 매력적이기도 하니까요. 숲속을 걸으며 휘파람을 부는 사람, 새들도 어디선가 화답을 할 것 같아 기분 좋은 조마조마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게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순 없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메리 올리버의 글에는 장엄함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산세의 장엄, 종교적인 장엄이 아니라 곤충, 새, 하물며 흙에 찍힌 개의 발자국 같은 데서도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드러운 장엄함 같은 것이요. 산문 「겨울의 순간들」에서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요. 그녀가 모든 존재에, 거북이 알을 훔쳐 먹으려는 너구리나 집 한 쪽에 놓인 의자, 길에 떨어진 돌멩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결같고 단단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찰의 결과를 산문과 시로써 우리에게 돌려줍니다. 이토록 수많은 영혼이 글에서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그 빛깔에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수십 년간 같이 산 사람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 놀라듯, 어떻게 영혼을 되찾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지음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빨리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도 그녀가 산책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이젠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메리 올리버를 읽는 속도는 시인의 걸음걸이보다 느린 편이 알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음미하며 산책하는 중이니까요. 활자와 글줄의 여백 사이로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 “녹슨 색깔로” 반짝이는 바다, 재활용한 자재로 지은 작은 집이 보입니다.
『휘파람 부는 사람』의 원제는 『Winter Hours(‘겨울의 순간들’로 번역)』인데요, 한국어판에서는 시 「휘파람 부는 사람」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 시에서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의 동반자였던 말론 쿡입니다. 하지만 편집자 혹은 번역자가 메리 올리버의 삶을 휘파람이란 시어와 연관 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책 제목으로 더 매력적이기도 하니까요. 숲속을 걸으며 휘파람을 부는 사람, 새들도 어디선가 화답을 할 것 같아 기분 좋은 조마조마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게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순 없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메리 올리버의 글에는 장엄함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산세의 장엄, 종교적인 장엄이 아니라 곤충, 새, 하물며 흙에 찍힌 개의 발자국 같은 데서도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드러운 장엄함 같은 것이요. 산문 「겨울의 순간들」에서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요. 그녀가 모든 존재에, 거북이 알을 훔쳐 먹으려는 너구리나 집 한 쪽에 놓인 의자, 길에 떨어진 돌멩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결같고 단단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관찰의 결과를 산문과 시로써 우리에게 돌려줍니다. 이토록 수많은 영혼이 글에서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그 빛깔에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수십 년간 같이 산 사람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 놀라듯, 어떻게 영혼을 되찾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카페를 운영한 적은 없지만 일은 해 본 적 있습니다. 공원 옆에 있던 곳이라 여름에는 제빙기가 텅 빌 정도로 바쁘고 겨울에는 눈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죠. 손님이 없는 카페는 정말 조용합니다. 음악을 틀어도 조용합니다.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으면 그래서 소일거리를 찾게 됩니다. 선곡표를 다시 만들거나 샷 연습을 하거나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보거나. 언니와 함께 카페를 운영했던 박무늬 작가는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구웠다고 합니다. 우선은 먹고요, 팔기도 하고요, 남으면 퇴근할 때 또 먹으려고요.
『오늘도 손님이 없어 빵을 굽습니다』는 베이킹 레시피와 스위츠 에세이가 담긴 독립출판물입니다. 저자의 문체엔 특별한 매력이 있는데요, 조곤조곤 높임말을 쓰면서 중간중간 자조적인 문장을 섞어냅니다. 설탕과 소금, 설탕과 고춧가루의 좋은 조합 같아서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집니다. 저는 자기를 까내리는 화법의 에세이를 좋아하거든요. 거기에 빛깔 밝은 감수성이 슈가파우더처럼 묻어있습니다.
직접 만들고 자기 식으로 풀어낸 레시피도 재밌습니다. “아기 엉덩이같이 된 상태”, “귀찮아서 생략”, “무심하게”, “자신이 없어서”라고 적힌 레시피를 본 적 있으신가요? 줄리언 반스가 읽었다면 일갈(?)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들고 레시피를 썼다는 점에서 결국 반스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그리고 박오후 작가의 귀여운 그림도 에세이, 레시피와 잘 어우러져 총천연색 음식 사진보다 더 입맛이 돌아요.
손님이 없는 카페는 결국 문을 닫았고, 해외에 일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저자는 같은 동네에 서점을 열었습니다. 거리 두기 강화로 손님이 없을 땐 구독자들에게 보내는 주간 메일을 쓴다고 해요. 부디 다음엔 『오늘도 손님이 많지만 빵은 굽습니다』라는 책을 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속에서>
어쩌면 주인이 좋아서 하는 카페에 손님이 없는 건 우주의 법칙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_108p.
『오늘도 손님이 없어 빵을 굽습니다』, 박무늬 글, 박오후 그림카페를 운영한 적은 없지만 일은 해 본 적 있습니다. 공원 옆에 있던 곳이라 여름에는 제빙기가 텅 빌 정도로 바쁘고 겨울에는 눈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죠. 손님이 없는 카페는 정말 조용합니다. 음악을 틀어도 조용합니다.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으면 그래서 소일거리를 찾게 됩니다. 선곡표를 다시 만들거나 샷 연습을 하거나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보거나. 언니와 함께 카페를 운영했던 박무늬 작가는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구웠다고 합니다. 우선은 먹고요, 팔기도 하고요, 남으면 퇴근할 때 또 먹으려고요.
『오늘도 손님이 없어 빵을 굽습니다』는 베이킹 레시피와 스위츠 에세이가 담긴 독립출판물입니다. 저자의 문체엔 특별한 매력이 있는데요, 조곤조곤 높임말을 쓰면서 중간중간 자조적인 문장을 섞어냅니다. 설탕과 소금, 설탕과 고춧가루의 좋은 조합 같아서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집니다. 저는 자기를 까내리는 화법의 에세이를 좋아하거든요. 거기에 빛깔 밝은 감수성이 슈가파우더처럼 묻어있습니다.
직접 만들고 자기 식으로 풀어낸 레시피도 재밌습니다. “아기 엉덩이같이 된 상태”, “귀찮아서 생략”, “무심하게”, “자신이 없어서”라고 적힌 레시피를 본 적 있으신가요? 줄리언 반스가 읽었다면 일갈(?)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들고 레시피를 썼다는 점에서 결국 반스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그리고 박오후 작가의 귀여운 그림도 에세이, 레시피와 잘 어우러져 총천연색 음식 사진보다 더 입맛이 돌아요.
손님이 없는 카페는 결국 문을 닫았고, 해외에 일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저자는 같은 동네에 서점을 열었습니다. 거리 두기 강화로 손님이 없을 땐 구독자들에게 보내는 주간 메일을 쓴다고 해요. 부디 다음엔 『오늘도 손님이 많지만 빵은 굽습니다』라는 책을 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속에서>
어쩌면 주인이 좋아서 하는 카페에 손님이 없는 건 우주의 법칙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_108p.
우리는 왜 사진을 찍을까요? 순간의 포착, 장면의 소유, 기억의 보조. 사진의 일차적인 기능은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허락하는 한, 단 한 프레임 분량의 시간과 장소가 고스란히 박제되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진들은 화상이 맺히는 순간부터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기록된 것들 너머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아니 에르노는 연인인 마크 마리와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마다, 지난밤에 남겨진 흔적들을 마주하며 그 흔적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옷과 신발, 먹다 남은 음식이나 제멋대로 움직인 가구들은 두 사람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구성으로 이미 “멀어진 축제”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마크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사진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선별하여 각자 그에 관해 글을 쓰기로 하지요. 글이 완성될 때까지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하고서요.
이 작업이 단순히 연인 간의 게임에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에르노가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는 항암치료 과정과 그로 인해 변해버린 몸에 관해 자세히 씁니다.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 사진만 찍었는데, 그런 사진들이 그녀가 없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미처럼 구겨진 옷이나 걸어가다 막 걸음을 멈춘 것 같은 뮬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부재를 주관적으로 옮기면 ‘상실’일 테고, 잃어버린 모든 것은 아름답기 마련이니까요.
이 책은 묘하게 로맨틱합니다. “당신을 베니스에 데려가고 싶어요.” 서로 어떤 글을 쓸지 공유하지 않았음에도 한 사진에서 같은 것에 관해 쓰는 부분이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또, 관계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연인 간의 글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글은 우리를 갈라놓을까, 혹은 더 가깝게 만들까?” 한 사람은 투병 중이고 한 사람은 막 이혼한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누고 여행하고 싸우고 질투하는 일상성이 유지되는 것을 보며 막연한 안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지음우리는 왜 사진을 찍을까요? 순간의 포착, 장면의 소유, 기억의 보조. 사진의 일차적인 기능은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허락하는 한, 단 한 프레임 분량의 시간과 장소가 고스란히 박제되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진들은 화상이 맺히는 순간부터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기록된 것들 너머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아니 에르노는 연인인 마크 마리와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마다, 지난밤에 남겨진 흔적들을 마주하며 그 흔적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옷과 신발, 먹다 남은 음식이나 제멋대로 움직인 가구들은 두 사람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구성으로 이미 “멀어진 축제”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마크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사진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선별하여 각자 그에 관해 글을 쓰기로 하지요. 글이 완성될 때까지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하고서요.
이 작업이 단순히 연인 간의 게임에 그치지 않는 것은 아니 에르노가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는 항암치료 과정과 그로 인해 변해버린 몸에 관해 자세히 씁니다.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 사진만 찍었는데, 그런 사진들이 그녀가 없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미처럼 구겨진 옷이나 걸어가다 막 걸음을 멈춘 것 같은 뮬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부재를 주관적으로 옮기면 ‘상실’일 테고, 잃어버린 모든 것은 아름답기 마련이니까요.
이 책은 묘하게 로맨틱합니다. “당신을 베니스에 데려가고 싶어요.” 서로 어떤 글을 쓸지 공유하지 않았음에도 한 사진에서 같은 것에 관해 쓰는 부분이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또, 관계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연인 간의 글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글은 우리를 갈라놓을까, 혹은 더 가깝게 만들까?” 한 사람은 투병 중이고 한 사람은 막 이혼한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누고 여행하고 싸우고 질투하는 일상성이 유지되는 것을 보며 막연한 안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잘 찍은 인물 사진은 그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인물의 표정, 시선, 제스처, 옷차림, 배경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평면 이미지가 화면 너머로깊어지기도 하고, 테두리 바깥으로 넓어지기도 합니다. 피사체가 유명인이라면 이미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부각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지요. 전혀 모르는 인물인데 잘 알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존 버거는 『글로 쓴 사진』에서 인물 사진이 이룰 수 있는 예술적 성취에 글로 도전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가 말하는 ‘글로 쓴 사진 - 포토카피’를 통해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사진으로 찍듯 글로써 인물과 풍경을 그려냅니다. 직접적인 묘사, 저자가 인물과 나눈 대화나 인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과 겪은 사건과 그 인물을 놓고 펼친 상상을 동원해서요.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지만 누구도 그렇게 쓰기 쉽지 않을 적확한 첫 문장은 순식간에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두세 쪽, 길게는 예닐곱 쪽의 포토카피 안에서 유영시키다가 급작스레 문을 닫고 현실-챕터의 끝으로 끄집어내지요. 어떤 사진에 매료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 사진에서 눈을 떼는 덴 몇 십 초, 혹은 몇 십 분이 필요한 것처럼요.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사연이란 게 누구도 관심 없는 무의미한 사건일 수도 있지요. 나한텐 삶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요. 하지만 존 버거는 그 소외된 인물, 이야기를 지면 위로, 빛 속으로 끌어냅니다. 이 책 안에서 만나는 포토카피의 피사체는 흡사 소설 속 주요 인물처럼 주목을 끕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실은 유의미한 존재라는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존 버거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그의 포토카피에 옮겨 적습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존 버거가 글로 쓴 사진들도 이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잘 찍은 인물 사진은 그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인물의 표정, 시선, 제스처, 옷차림, 배경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평면 이미지가 화면 너머로깊어지기도 하고, 테두리 바깥으로 넓어지기도 합니다. 피사체가 유명인이라면 이미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부각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지요. 전혀 모르는 인물인데 잘 알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존 버거는 『글로 쓴 사진』에서 인물 사진이 이룰 수 있는 예술적 성취에 글로 도전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가 말하는 ‘글로 쓴 사진 - 포토카피’를 통해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그는 사진으로 찍듯 글로써 인물과 풍경을 그려냅니다. 직접적인 묘사, 저자가 인물과 나눈 대화나 인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과 겪은 사건과 그 인물을 놓고 펼친 상상을 동원해서요.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지만 누구도 그렇게 쓰기 쉽지 않을 적확한 첫 문장은 순식간에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두세 쪽, 길게는 예닐곱 쪽의 포토카피 안에서 유영시키다가 급작스레 문을 닫고 현실-챕터의 끝으로 끄집어내지요. 어떤 사진에 매료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 사진에서 눈을 떼는 덴 몇 십 초, 혹은 몇 십 분이 필요한 것처럼요.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사연이란 게 누구도 관심 없는 무의미한 사건일 수도 있지요. 나한텐 삶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요. 하지만 존 버거는 그 소외된 인물, 이야기를 지면 위로, 빛 속으로 끌어냅니다. 이 책 안에서 만나는 포토카피의 피사체는 흡사 소설 속 주요 인물처럼 주목을 끕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실은 유의미한 존재라는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존 버거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그의 포토카피에 옮겨 적습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존 버거가 글로 쓴 사진들도 이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을 처음 만난 책이 『이스탄불』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 100쪽까지였지요. 「파리리뷰」에 실린 파묵의 인터뷰를 읽고 생긴 호기심에 이 500쪽짜리 에세이를 덜컥 집어들었는데, 터키도 이스탄불도 그의 문체와 이난아 교수의 번역도 모두 낯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탄불 위에 당시 그의 최근작이었던 소설을 펼쳐서 먼저 읽었죠. 그렇게 오르한 파묵의 세계 – 이스탄불에 들어서고 나자 이 책도 술술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도시 에세이’ 중 가장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작품이 되었고요.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제외하면 오르한 파묵은 평생 이스탄불에 살았습니다. 그의 소설도 시대는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넓어져도 터키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 도시가 제가 사는 도시처럼 친밀해집니다. 언젠가는 이스탄불을 거닐다가 작가를 만나는 꿈도 꿨습니다….
그런 저자가 일종의 자서전이자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주제로 쓴 에세이가 바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청년기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요. 가족과 도시의 사람들, 소설가와 시인, 역사학자 들,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이스탄불을 찾았던 서양의 예술가들, 사건들,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비애’와 거기서 파생된 감정들. 파묵의 소설이 그렇듯 이 에세이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슬퍼집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비극이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이스탄불엔 슬픈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기선 누구나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뭔가를 떠올리게 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면에선 소설을 먼저 접하고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파묵 소설들의 종합판 같은 입문작으로는 『내 마음의 낯섦』을, 신선한 형식의 소설을 좋아하시면 『검은 책』,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순수 박물관』, 추리와 시대물(?)을 좋아하시면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합니다. 언젠가 이 작품들 중 하나를 소개해도 좋겠네요.
『이스탄불』, 오르한 파묵 지음오르한 파묵을 처음 만난 책이 『이스탄불』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 100쪽까지였지요. 「파리리뷰」에 실린 파묵의 인터뷰를 읽고 생긴 호기심에 이 500쪽짜리 에세이를 덜컥 집어들었는데, 터키도 이스탄불도 그의 문체와 이난아 교수의 번역도 모두 낯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탄불 위에 당시 그의 최근작이었던 소설을 펼쳐서 먼저 읽었죠. 그렇게 오르한 파묵의 세계 – 이스탄불에 들어서고 나자 이 책도 술술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도시 에세이’ 중 가장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작품이 되었고요.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제외하면 오르한 파묵은 평생 이스탄불에 살았습니다. 그의 소설도 시대는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넓어져도 터키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 도시가 제가 사는 도시처럼 친밀해집니다. 언젠가는 이스탄불을 거닐다가 작가를 만나는 꿈도 꿨습니다….
그런 저자가 일종의 자서전이자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주제로 쓴 에세이가 바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청년기를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요. 가족과 도시의 사람들, 소설가와 시인, 역사학자 들,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이스탄불을 찾았던 서양의 예술가들, 사건들,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비애’와 거기서 파생된 감정들. 파묵의 소설이 그렇듯 이 에세이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슬퍼집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비극이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이스탄불엔 슬픈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기선 누구나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뭔가를 떠올리게 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면에선 소설을 먼저 접하고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파묵 소설들의 종합판 같은 입문작으로는 『내 마음의 낯섦』을, 신선한 형식의 소설을 좋아하시면 『검은 책』,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순수 박물관』, 추리와 시대물(?)을 좋아하시면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합니다. 언젠가 이 작품들 중 하나를 소개해도 좋겠네요.
『로시니』는 은둔의 작가가 쓴 소설 『로렐라이』를 영화화하려는 감독과 제작자를 중심으로 배우, 작가, 시인, 기자, 레스토랑 주인 등 여러 인물들이 ‘로시니’라는 고급 레스토랑에 모이며 벌어지는 일종의 소극입니다. 내러티브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영화 판권을 따느냐 마느냐로 흘러가긴 하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모든 인물들이 이해관계와 치정관계로 얽혀 있고, 저마다의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 작품의 즐거움은 그런 군상들을 지켜보는 데 있습니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절대로 남의 이야기 같지 않거든요.
그런데 등장인물들은 서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으면서도 매일 밤 레스토랑 ‘로시니’로 찾아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해서, 싫든 좋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인상입니다. 레스토랑 ‘로시니’는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자 동시에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 간이식당처럼 지독하게 외롭고 그래서 오히려 옅은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쥐스킨트 특유의 괴팍한 캐릭터들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건 ‘로시니’라는 공간의 힘도 큰 것 같아요.
책에 함께 실려 있는 쥐스킨트의 에세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도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어도 될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통찰은 극작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도 될 것 같네요. 영화도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습니다. 공동 집필자인 헬무트 디틀이 직접 연출도 해서 시나리오가 충실히 영상화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요. 독일영화에 영자막조차도 없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책이라는 ‘자막’이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를 감상하고 그 다음에 쥐스킨트의 에세이를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속에서>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영화는 흘러간다. _374p.
『로시니』, 파트리크 쥐스킨트, 헬무트 디틀 지음『로시니』는 은둔의 작가가 쓴 소설 『로렐라이』를 영화화하려는 감독과 제작자를 중심으로 배우, 작가, 시인, 기자, 레스토랑 주인 등 여러 인물들이 ‘로시니’라는 고급 레스토랑에 모이며 벌어지는 일종의 소극입니다. 내러티브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영화 판권을 따느냐 마느냐로 흘러가긴 하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모든 인물들이 이해관계와 치정관계로 얽혀 있고, 저마다의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 작품의 즐거움은 그런 군상들을 지켜보는 데 있습니다. 좀 과장되긴 했지만 절대로 남의 이야기 같지 않거든요.
그런데 등장인물들은 서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으면서도 매일 밤 레스토랑 ‘로시니’로 찾아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해서, 싫든 좋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인상입니다. 레스토랑 ‘로시니’는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자 동시에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 간이식당처럼 지독하게 외롭고 그래서 오히려 옅은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쥐스킨트 특유의 괴팍한 캐릭터들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건 ‘로시니’라는 공간의 힘도 큰 것 같아요.
책에 함께 실려 있는 쥐스킨트의 에세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도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어도 될 만큼 흥미롭습니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통찰은 극작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도 될 것 같네요. 영화도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습니다. 공동 집필자인 헬무트 디틀이 직접 연출도 해서 시나리오가 충실히 영상화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요. 독일영화에 영자막조차도 없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책이라는 ‘자막’이 손에 쥐어져 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를 감상하고 그 다음에 쥐스킨트의 에세이를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속에서>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영화는 흘러간다. _374p.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의 저자 박정훈은 오랫동안 여러 회사에서 배달 라이더로 일했고, 그 과정에서 ‘배달 노동자’를 누구도 나서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라이더 노동조합 ‘라이더 유니온’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플랫폼 산업, 그중에서도 배달 플랫폼 노동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러프하게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최소한 한국의 배달 플랫폼은 회사가 근로자에 대한 책임은 최소한으로 적게 지면서 의무는 최대한으로 많이 지우고 싶은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구요. 그러기 위해 배달 대행사들이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해 실제론 ‘근로자’나 다름없는 라이더를 근로자가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읽고 있으면 ‘이제 배달을 시키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배달 라이더들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해결책이 아니겠지요.
세상은 ‘혁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새로운 전략이 실제로 혁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이 책은 그 뒤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일례를 보여줍니다. 누구에게나 친숙해진 ‘배달앱’을 소재로, 저자의 폭 넓은 경험, 인터뷰를 곁들여 말이죠.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란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피부에 빠르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도 플랫폼에서 시작한 캠페인이지만 오늘같이 춥고 길이 미끄러운 날 배달 메시지에 이렇게 남겨봅시다. “늦어도 괜찮으니 안전하게 와 주세요.”
<책 속에서>
계약서를 쓸 때는 사장이라며 위탁 계약서를 썼지만,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휴식도 조를 이루어 취하게 했다.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사람이 부족하다며 성북에서 용산으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 기업은 플랫폼을 혁신적이고 새로운 기술이라고 광고하고 다녔지만, 그가 겪은 플랫폼은 30년 전의 낡은 배달 산업과 똑같았다. _156~157p.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박정훈 지음『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의 저자 박정훈은 오랫동안 여러 회사에서 배달 라이더로 일했고, 그 과정에서 ‘배달 노동자’를 누구도 나서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라이더 노동조합 ‘라이더 유니온’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플랫폼 산업, 그중에서도 배달 플랫폼 노동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러프하게 결론부터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최소한 한국의 배달 플랫폼은 회사가 근로자에 대한 책임은 최소한으로 적게 지면서 의무는 최대한으로 많이 지우고 싶은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구요. 그러기 위해 배달 대행사들이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해 실제론 ‘근로자’나 다름없는 라이더를 근로자가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읽고 있으면 ‘이제 배달을 시키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배달 라이더들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해결책이 아니겠지요.
세상은 ‘혁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새로운 전략이 실제로 혁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이 책은 그 뒤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일례를 보여줍니다. 누구에게나 친숙해진 ‘배달앱’을 소재로, 저자의 폭 넓은 경험, 인터뷰를 곁들여 말이죠.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란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피부에 빠르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도 플랫폼에서 시작한 캠페인이지만 오늘같이 춥고 길이 미끄러운 날 배달 메시지에 이렇게 남겨봅시다. “늦어도 괜찮으니 안전하게 와 주세요.”
<책 속에서>
계약서를 쓸 때는 사장이라며 위탁 계약서를 썼지만,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휴식도 조를 이루어 취하게 했다.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사람이 부족하다며 성북에서 용산으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 기업은 플랫폼을 혁신적이고 새로운 기술이라고 광고하고 다녔지만, 그가 겪은 플랫폼은 30년 전의 낡은 배달 산업과 똑같았다. _156~157p.
작가이자 사진가인 빌 헤이스는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3월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팬데믹으로 변해가는 도시와 사람을 재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 뉴욕의 한복판에서 말이지요.
코로나19 확산 초기, 미국 전체 사망자의 1/3이 뉴욕 시민이었을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저자는 뉴욕의 시내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지만, 정말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지킵니다. 두 달여 만에 한 도시에서 2만5천 명이 넘게 죽었다면, 그 공포감이 어떨까요? 그리고 외로움. 빌 헤이스는 몇 년 전 오랜 파트너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멀쩡하던 직전 크리스마스에 막 새로운 인연을 만난 참이었지만, 관계가 더 깊어지기도 전에 생이별하는 처지가 됩니다. 빌은 고위험군에 속하는 나이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두려움이나 절망만 주지는 않습니다. 팬데믹 이전의 사진과 에피소드도 병치하며 우리가 서로 거리낌 없이 관계를 맺고 어울리던 시절을 계속 환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뉴욕 시민들과의 대화를 옮기며 그들이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재난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조명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속에서 잊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 속에서, 그리고 언젠간 현실에서 되찾길 희망하면서요. 그 점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슬픈 책이 동시에 ‘아름답게’ 읽히는 이유입니다.
<책속에서>
텅 빈 거리와 인도, 셔터를 내린 상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한다. 이걸 연대의 표시로 보자고. 모두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_173p.
『별빛이 떠난 거리』, 빌 헤이스 지음작가이자 사진가인 빌 헤이스는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3월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팬데믹으로 변해가는 도시와 사람을 재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 뉴욕의 한복판에서 말이지요.
코로나19 확산 초기, 미국 전체 사망자의 1/3이 뉴욕 시민이었을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저자는 뉴욕의 시내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지만, 정말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지킵니다. 두 달여 만에 한 도시에서 2만5천 명이 넘게 죽었다면, 그 공포감이 어떨까요? 그리고 외로움. 빌 헤이스는 몇 년 전 오랜 파트너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멀쩡하던 직전 크리스마스에 막 새로운 인연을 만난 참이었지만, 관계가 더 깊어지기도 전에 생이별하는 처지가 됩니다. 빌은 고위험군에 속하는 나이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두려움이나 절망만 주지는 않습니다. 팬데믹 이전의 사진과 에피소드도 병치하며 우리가 서로 거리낌 없이 관계를 맺고 어울리던 시절을 계속 환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뉴욕 시민들과의 대화를 옮기며 그들이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재난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조명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속에서 잊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 속에서, 그리고 언젠간 현실에서 되찾길 희망하면서요. 그 점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슬픈 책이 동시에 ‘아름답게’ 읽히는 이유입니다.
<책속에서>
텅 빈 거리와 인도, 셔터를 내린 상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한다. 이걸 연대의 표시로 보자고. 모두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_173p.
자정이 되면 울리던 통행금지 사이렌, 골목마다 하나씩은 자리잡고 있던 구멍가게, 양복이나 전축, 대학교재 따위를 맡겨 급전을 마련하던 전당포, 커피 하나 시켜놓고 답배 한 갑과 시간을 고스란히 태우던 다방, 철마다 불이 환하던 양장점, 마을에서 물 깃던 우물, 가위질하는 엿장수, 종로를 환히 밝히던 야시장…
『서울은 말이죠…』는 이제 기억에만 남은 서울의 사라진 풍경을 하나씩 되살려 냅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한 심상덕 작가의 방송 원고를 엮은 책으로, 한 편 한 편이 짧지만 거기서 그려지는 그림은 꼭 심야에 듣는 라디오처럼 머릿속에 널찍하게 펼쳐져요. 가끔은 내 기억으로 가져오고 싶은 장면도 있답니다.
<책속에서>
겨울철엔 빨갛게 달아오른 톱밥 난로가 다방 안에서 훈훈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종일토록 벽에 기대앉아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 그런 손님들을 가리켜 벽화처럼 온종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벽화'라고도 불렀습니다.
_「커피」 중에서
(종로 2, 3가 사이에 있던) 야시장은 1940년대까지 아주 활발하게 운영됐습니다. 물건을 사라고 "골라 골라" 외치는 영세 상인들과 싼값에 일용품을 사려는 서민들로 항상 북적거렸죠. 예전에는 시골에서 서울에 오면, 낮에는 창경원의 동물원에 가고 밤에는 종로 야시장을 구경해야 서울 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할 만큼 야시장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_「종로 야시장」 중에서
서울은 말이죠…, 심상덕 지음자정이 되면 울리던 통행금지 사이렌, 골목마다 하나씩은 자리잡고 있던 구멍가게, 양복이나 전축, 대학교재 따위를 맡겨 급전을 마련하던 전당포, 커피 하나 시켜놓고 답배 한 갑과 시간을 고스란히 태우던 다방, 철마다 불이 환하던 양장점, 마을에서 물 깃던 우물, 가위질하는 엿장수, 종로를 환히 밝히던 야시장…
『서울은 말이죠…』는 이제 기억에만 남은 서울의 사라진 풍경을 하나씩 되살려 냅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한 심상덕 작가의 방송 원고를 엮은 책으로, 한 편 한 편이 짧지만 거기서 그려지는 그림은 꼭 심야에 듣는 라디오처럼 머릿속에 널찍하게 펼쳐져요. 가끔은 내 기억으로 가져오고 싶은 장면도 있답니다.
<책속에서>
겨울철엔 빨갛게 달아오른 톱밥 난로가 다방 안에서 훈훈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종일토록 벽에 기대앉아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 그런 손님들을 가리켜 벽화처럼 온종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벽화'라고도 불렀습니다.
_「커피」 중에서
(종로 2, 3가 사이에 있던) 야시장은 1940년대까지 아주 활발하게 운영됐습니다. 물건을 사라고 "골라 골라" 외치는 영세 상인들과 싼값에 일용품을 사려는 서민들로 항상 북적거렸죠. 예전에는 시골에서 서울에 오면, 낮에는 창경원의 동물원에 가고 밤에는 종로 야시장을 구경해야 서울 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할 만큼 야시장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_「종로 야시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