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조각가의 창작 노트, 예술 에세이이자 작품집이었던 『여백의 무게』 개정판
조각가 안경진의 『여백의 무게』가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라는 부제처럼 작품과 창작에 관한 조각가의 더 깊은 사유와 철학을 담았다. ‘그림자 조각’은 물론, 조각가의 더 많은 작품 사진도 수록됐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1장과 2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는 에세이이며, 2장은 안경진 조각가의 다양한 작품 사진과 작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과 작업기이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비존재가 과연 구분이 가능하가에 대한 조각가의 생각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 눈에 보이고,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에만 매몰된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첨단 기술과 가상현실이 화두인 21세기에 손으로 빚는 조각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독자 나름의 대답을 찾아가는 데 있어 조각가 안경진의 내면세계가 조명을 비춰 줄 것이다.
〈저자 소개〉
안경진
저자 안경진은 조각가로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현재 그림자와 여백을 통해 하나의 형태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빚어지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여행〉 이후 열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백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Baton-replay〉 〈그림自자〉 〈원형의 폐허들〉 〈시선들〉 〈신들의 춤〉 〈그늘의 새벽〉 〈그림자되기〉 등이 있다.
공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을 펴냈다.
인스타그램 @artin_out
〈책 속에서〉
새벽에 일어나 어둠 가운데 흙 작업을 시작한다. 요 며칠 갑자기 추워지며 시린 날씨에 손이 얼 것 같았다. 해가 떠오르면 비닐로 흙을 싸고, 어두워지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해 뜨면 부려야 하는 작업, 짙어지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담아야 하는 작업. (…) 어둠, 적막, 그 가운데 서서 흙을 치대면 비로소 한 가닥 희망이 비치는 듯도 하다. _19p.
내가 만든 수많은 작품 중에서 몇 개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고, 대부분은 버려질 것이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침마다 손과 몸을 녹이고서 다시 흙을 만진다. 어쩌면 그것 말고 내게 남은 ‘오늘’들을 만족스럽게 보낼 다른 수단은 없을 거라는 무거운 예감에 짓눌린다. _21p.
그림자는 조각 작품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림자에 조각과 동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간과하고 넘어가던 것들에 의미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존재의 이면에 늘 함께하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그림자, 존재의 바로 옆에서 허공으로 존재하는 존재 밖의 여백. 그것들이 나에게는 의미 있어 보였다. 때로는 그들의 존재감이 더 컸다. _40p.
가려진 문제를 드러내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예술이 작용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며 책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명, 사명감으로 탄생하는 작품들은 분명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_54p.
작가가 자기 세계를 만드는 데는 교본도 교리도 없다. 혼자 자기 길을 모색하고 작업을 하면서 그 철학을 실현한다. 매우 지난하고 외로운 삶이다. 성과 없이 끝난 전시와 빛을 보지 못하는 작품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와 좌절의 순간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실의와 상실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 거기서 진심 담긴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언젠가 타인의 가슴에도 울림을 발현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_147p.
그림자, 여백, 이런 단어들은 결국 비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꿈이라든가 희망, 행복을 어떻게 물질로만 치환할 수 있는가? 그림자와 여백으로 비물질의 가치를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전시장을 나서며 주변의 틈새, 비워진 공간이 가진 분명한 존재감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_198p.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실루엣을 여백에 담은 것은, 눈 깜짝할 찰나의 순간을 인생에 빗대고자 했기 때문이다. 생이 끝나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필름처럼 지나가는 인생이 아름다운 춤을 춘 것처럼 인식되기를 기원한다. _226p.
〈출판사 서평〉
조각가의 창작 노트는 매일 더 두꺼워진다.
안경진 조각가는 작업을 쉬지 않는다. 흙을 만지며 작품에 몰입하는 일이 그가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끊임없는 생활의 요구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올 수는 없다. 그때, 조각가는 헤나가 아니라 펜을 든다. 작업을 쉬지 않는 작가이기에, 그의 창작 노트도 매일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은 그림자 조각들이다. ‘그림자 조각’이란 조각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의 그림자까지 작품이 되는 조각이다. 그는 “그림자는 조각 작품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우리 바로 옆, 허공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의미를 찾는다. 물성을 지닌 조각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림자, 여백의 무게가 더 육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롭게 걸어가는 남자의 형상은 ‘원’이라는 완벽한 형상의 그림자를 만들며, 거친 바람을 거슬러 자신의 이상향을 향해 길을 떠나는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종이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할머니의 형상은 그가 젊은 남녀였을 적의 모습을 그림자로 드리우며 조각에 새겨진 미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조각의 그림자가 의미를 띠면서 존재와 비존재, 물질과 여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 안경진 조각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시청각 장애인들과 함께 조각 작업을 하는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촉각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안경진 조각가는 그들을 상징하는 조각을 만들어 세상에 그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자 조각이라는 표현 방식을 넘어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그런 저자의 철학과 작업 과정도 담고 있어 독자들에게도 예술의 의의를 재고하게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조각
짧고, 빠르고,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주목을 받는 세상이다. 예술도 변하고 있다. 기존의 예술 형식을 뒤엎는 컨템포러리 아트조차 나름의 방식으로 물성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 시류에서 조각은 여러 예술 장르 속에서도 입지가 좁다. ‘조각 = 장식’이라는 대중의 인식 속에서 거친 것, 거대한 것, 한 마디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대중의 관심 밖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안경진 조각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구축하고 있을까. 그림자 조각은 필연적으로 조명이 설치되어야 하고, 그림자가 드리울 여백, 공간이 필요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런 엇갈림에서 빚어지는 예술가의 고뇌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한편, 그럼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견지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물론 안경진 조각가가 기존 조각 작업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오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려 하며, 3D 그래픽을 배워 작품 제작 방식도 다각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다지면서도 유연한 자세를 취할 줄 아는, 동시대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조각가의 창작 노트인 1장, 작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이 곁들여진 작품집인 2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초판보다 큰 판형 속에 안경진 조각가의 작품을 큼지막하게 담았다. 작품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진가들이 촬영하였으며, 특히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인 그림자 조각들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의 평면적 복사본인 사진이 원작의 아우라를 전부 담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많은 이들이 책이나 영상에서 본 명작을 보기 위해 원작이 전시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책 또한 독자가 전시장을 찾아 감상자로 거듭나기를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술, 특히 조각이라는 장르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긴 여정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추천사〉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을 한나절 감상한 적이 있다. 그는 빛의 자궁에서 꺼낸 어둠으로 어둠을 그린 작가였다. 얼굴빛이 화려할수록 영혼의 빛이 흐린 인간들의 얼굴에 흐린 먹물을 뒤덮은 작품이었다. 안경진 조각가를 생각하면 렘브란트가 떠오른다. 그는 “어둠은 한 장의 거대한 여백이 됩니다. 지나치기 쉬운 존재를 드러내는 데 그림자와 여백만큼 적절한 수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지나치기 쉬운 존재’라는 말이 안경진 조각가를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무시하거나 가치 없다고 평가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눈길은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보이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한 화살로 관통하고 있다. 바로 이 주제가 여백의 무게이다.
- 시인 이병창
〈목차〉
1장.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새벽 작업장 / 맑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길 / 개방된 전시 공간 / 익숙한 대로 살지 않겠다는 부질없는 마음 / 그림자와 여백 / 작가들 / 기도 - 손끝으로 여는 세상 /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 / 가족 / 나는 조각가가 될 거예요 / 새로운 작업으로 진입 / 조형물과 조각 작품 / 당진의 철 조각
2장. 나를 둘러싼 세계와 함께 움직인다
다시는 / News / 최고의 미인은 누구인가 / 텅 빈 / Bricks / 하얀 밤 / 기도 / Protector / Original sin / Dynamic pause / 업보 / 울림 / 그림 없는 액자 / 부부 / Awakening / 그림자와 춤을 / 신을 만나는 순간 / 두려움 / 열네 살 / 사라지다 / 하나 / 신의 바람 / 바라보다 / 길 / 김복동상 / 농무 / Life / 찰나
〈책 소개〉
조각가의 창작 노트, 예술 에세이이자 작품집이었던 『여백의 무게』 개정판
조각가 안경진의 『여백의 무게』가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라는 부제처럼 작품과 창작에 관한 조각가의 더 깊은 사유와 철학을 담았다. ‘그림자 조각’은 물론, 조각가의 더 많은 작품 사진도 수록됐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1장과 2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는 에세이이며, 2장은 안경진 조각가의 다양한 작품 사진과 작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과 작업기이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비존재가 과연 구분이 가능하가에 대한 조각가의 생각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 눈에 보이고,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에만 매몰된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첨단 기술과 가상현실이 화두인 21세기에 손으로 빚는 조각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독자 나름의 대답을 찾아가는 데 있어 조각가 안경진의 내면세계가 조명을 비춰 줄 것이다.
〈저자 소개〉
안경진
저자 안경진은 조각가로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현재 그림자와 여백을 통해 하나의 형태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빚어지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2004년 첫 번째 개인전 〈여행〉 이후 열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백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Baton-replay〉 〈그림自자〉 〈원형의 폐허들〉 〈시선들〉 〈신들의 춤〉 〈그늘의 새벽〉 〈그림자되기〉 등이 있다.
공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을 펴냈다.
인스타그램 @artin_out
〈책 속에서〉
새벽에 일어나 어둠 가운데 흙 작업을 시작한다. 요 며칠 갑자기 추워지며 시린 날씨에 손이 얼 것 같았다. 해가 떠오르면 비닐로 흙을 싸고, 어두워지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해 뜨면 부려야 하는 작업, 짙어지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담아야 하는 작업. (…) 어둠, 적막, 그 가운데 서서 흙을 치대면 비로소 한 가닥 희망이 비치는 듯도 하다. _19p.
내가 만든 수많은 작품 중에서 몇 개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고, 대부분은 버려질 것이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침마다 손과 몸을 녹이고서 다시 흙을 만진다. 어쩌면 그것 말고 내게 남은 ‘오늘’들을 만족스럽게 보낼 다른 수단은 없을 거라는 무거운 예감에 짓눌린다. _21p.
그림자는 조각 작품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림자에 조각과 동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간과하고 넘어가던 것들에 의미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존재의 이면에 늘 함께하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그림자, 존재의 바로 옆에서 허공으로 존재하는 존재 밖의 여백. 그것들이 나에게는 의미 있어 보였다. 때로는 그들의 존재감이 더 컸다. _40p.
가려진 문제를 드러내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예술이 작용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며 책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명, 사명감으로 탄생하는 작품들은 분명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_54p.
작가가 자기 세계를 만드는 데는 교본도 교리도 없다. 혼자 자기 길을 모색하고 작업을 하면서 그 철학을 실현한다. 매우 지난하고 외로운 삶이다. 성과 없이 끝난 전시와 빛을 보지 못하는 작품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와 좌절의 순간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실의와 상실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 거기서 진심 담긴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언젠가 타인의 가슴에도 울림을 발현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_147p.
그림자, 여백, 이런 단어들은 결국 비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꿈이라든가 희망, 행복을 어떻게 물질로만 치환할 수 있는가? 그림자와 여백으로 비물질의 가치를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전시장을 나서며 주변의 틈새, 비워진 공간이 가진 분명한 존재감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_198p.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실루엣을 여백에 담은 것은, 눈 깜짝할 찰나의 순간을 인생에 빗대고자 했기 때문이다. 생이 끝나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필름처럼 지나가는 인생이 아름다운 춤을 춘 것처럼 인식되기를 기원한다. _226p.
〈출판사 서평〉
조각가의 창작 노트는 매일 더 두꺼워진다.
안경진 조각가는 작업을 쉬지 않는다. 흙을 만지며 작품에 몰입하는 일이 그가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끊임없는 생활의 요구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올 수는 없다. 그때, 조각가는 헤나가 아니라 펜을 든다. 작업을 쉬지 않는 작가이기에, 그의 창작 노트도 매일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은 그림자 조각들이다. ‘그림자 조각’이란 조각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의 그림자까지 작품이 되는 조각이다. 그는 “그림자는 조각 작품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우리 바로 옆, 허공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의미를 찾는다. 물성을 지닌 조각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림자, 여백의 무게가 더 육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롭게 걸어가는 남자의 형상은 ‘원’이라는 완벽한 형상의 그림자를 만들며, 거친 바람을 거슬러 자신의 이상향을 향해 길을 떠나는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종이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할머니의 형상은 그가 젊은 남녀였을 적의 모습을 그림자로 드리우며 조각에 새겨진 미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조각의 그림자가 의미를 띠면서 존재와 비존재, 물질과 여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 안경진 조각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시청각 장애인들과 함께 조각 작업을 하는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촉각을 활용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안경진 조각가는 그들을 상징하는 조각을 만들어 세상에 그들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자 조각이라는 표현 방식을 넘어 예술이 실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그런 저자의 철학과 작업 과정도 담고 있어 독자들에게도 예술의 의의를 재고하게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조각
짧고, 빠르고,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주목을 받는 세상이다. 예술도 변하고 있다. 기존의 예술 형식을 뒤엎는 컨템포러리 아트조차 나름의 방식으로 물성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 시류에서 조각은 여러 예술 장르 속에서도 입지가 좁다. ‘조각 = 장식’이라는 대중의 인식 속에서 거친 것, 거대한 것, 한 마디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대중의 관심 밖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안경진 조각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구축하고 있을까. 그림자 조각은 필연적으로 조명이 설치되어야 하고, 그림자가 드리울 여백, 공간이 필요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런 엇갈림에서 빚어지는 예술가의 고뇌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한편, 그럼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견지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물론 안경진 조각가가 기존 조각 작업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오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려 하며, 3D 그래픽을 배워 작품 제작 방식도 다각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다지면서도 유연한 자세를 취할 줄 아는, 동시대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여백의 무게 –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는 조각가의 창작 노트인 1장, 작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이 곁들여진 작품집인 2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초판보다 큰 판형 속에 안경진 조각가의 작품을 큼지막하게 담았다. 작품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진가들이 촬영하였으며, 특히 안경진 조각가의 대표 작품인 그림자 조각들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의 평면적 복사본인 사진이 원작의 아우라를 전부 담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많은 이들이 책이나 영상에서 본 명작을 보기 위해 원작이 전시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책 또한 독자가 전시장을 찾아 감상자로 거듭나기를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술, 특히 조각이라는 장르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긴 여정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추천사〉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을 한나절 감상한 적이 있다. 그는 빛의 자궁에서 꺼낸 어둠으로 어둠을 그린 작가였다. 얼굴빛이 화려할수록 영혼의 빛이 흐린 인간들의 얼굴에 흐린 먹물을 뒤덮은 작품이었다. 안경진 조각가를 생각하면 렘브란트가 떠오른다. 그는 “어둠은 한 장의 거대한 여백이 됩니다. 지나치기 쉬운 존재를 드러내는 데 그림자와 여백만큼 적절한 수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지나치기 쉬운 존재’라는 말이 안경진 조각가를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무시하거나 가치 없다고 평가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눈길은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보이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한 화살로 관통하고 있다. 바로 이 주제가 여백의 무게이다.
- 시인 이병창
〈목차〉
1장.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새벽 작업장 / 맑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길 / 개방된 전시 공간 / 익숙한 대로 살지 않겠다는 부질없는 마음 / 그림자와 여백 / 작가들 / 기도 - 손끝으로 여는 세상 /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 / 가족 / 나는 조각가가 될 거예요 / 새로운 작업으로 진입 / 조형물과 조각 작품 / 당진의 철 조각
2장. 나를 둘러싼 세계와 함께 움직인다
다시는 / News / 최고의 미인은 누구인가 / 텅 빈 / Bricks / 하얀 밤 / 기도 / Protector / Original sin / Dynamic pause / 업보 / 울림 / 그림 없는 액자 / 부부 / Awakening / 그림자와 춤을 / 신을 만나는 순간 / 두려움 / 열네 살 / 사라지다 / 하나 / 신의 바람 / 바라보다 / 길 / 김복동상 / 농무 / Life / 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