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오는 로마 #6



연필 / 이소연


(…)

정수리를 찧으며 수명을 읽는다

오래도록


머리가 벗겨지고

뇌가 갈리고

입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하리라

기필코 사랑하리라


(…) 



쉬는 날입니다. 습관대로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오늘은 인터넷을 써야하는데, 제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집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나와 5분 정도 걸어서 맥도날드에 도착합니다. 


'아침(colazione) 메뉴'로 '쇼콜라 코르네토(Cornetto al cioccolato: 초콜릿 크루아상)'와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습니다. 맥도날드의 아침 메뉴는 저렴하고 맛있어서 종종 이용하는데, 쇼콜라 코르네토는 인기가 많아서 빨리 없어집니다. 다행히 오늘은 남아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노트북에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갑니다. 



저희 회사 홈페이지에는 후기 게시판이 있습니다. 투어를 들은 손님들이 투어가 어땠는지 후기를 남기는 곳입니다. 이 후기는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투어 가이드는 상사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의 후기가 곧 평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의 개수와 질이 회사에서 저의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닙니다. 손님들의 후기를 읽다보면 제 투어의 장점을 알 수 있고, 고쳐야 할 점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여행이 끝나고도 제가 진행한 투어를 기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시간을 내어 일부러 홈페이지에 들어와 후기를 써주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제 이름을 단 후기가 올라오면 열심히 답글을 답니다. 


카푸치노를 마시며 회사 홈페이지의 후기 게시판을 들여다봤습니다. 게시판 맨 위에 제 이름이 보였습니다. 


“박무늬 가이드님…”


조금 놀랐습니다. 말줄임표로 뒤가 생략되어 있어서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겼거든요. 지난 투어가 어땠는지 생각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열었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글을 열고 나니 제목의 말줄임표에는 “나에게 최고의 가이드”라는 말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시점은 11월인데, 이 후기는 한 여름에 투어를 듣고 가셨던 손님이 쓴 글이었습니다. 더운 여름을 추억하며 글을 읽어 내려가다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이 손님은 제가 하는 투어에서 진심으로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바티칸의 예술 작품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엿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투어였다고 말하셨습니다.



한참을 그 페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들킨 제 ‘사랑’이 뭘까요. 정말 제가 ‘사랑’을 하고 살고 있는 걸까요? 속으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카푸치노 잔에는 말라붙은 우유만 남았습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개운치 못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책을 읽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읽던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의 작가의 말에서 또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주했습니다.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 내기 위해. - 『대도시의 사랑법』,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매체에서 쉽게 다루는 추억 속 아련한 첫사랑, 연인 간의 성애적인 사랑, 가족 간의 필연적이고 의무적인 사랑 등. 하지만 제가 하고 있는 사랑은 한 사람을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공허함을 느낄 때, 살아 있는 것이 버겁기만 할 때, 혹은 박상영 작가의 말처럼 ‘오롯이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몹시 견디기 힘든’ 모순적인 감정을 느낄 때 이런 순간을 버티며 그 삶에 연민과 애틋함을 느끼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기필코 살아내는 일. 그것은 정수리를 찧으며 남의 수명을 읽고, 머리가 벗겨지고, 뇌가 갈리면서도 사랑을 써 내려가는 연필의 행위와 유사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일, 따뜻하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일. 


후기를 쓴 손님이 제가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닳고 닳을 때까지 오래도록 사랑하고 싶습니다.




글/사진 박무늬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이 막막하고 의욕도 없어서 작은 카페와 독립출판사를 차렸다. 친구와 함께 첫 번째 책 『매일과 내일』 을 내고, 출판사 사업 신고한 것이 아까워서 두 번째 책 『오늘도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굽습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왔다. 현재 유로자전거나라 회사에서 투어 가이드로 일하며, 사람과 삶에 부딪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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