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여행] 유럽 영주권·시민권 취득 후. 그리고…

동으로 가는 길목 #7



뭔가 대단하고 매일매일 색다른 일상이 펼쳐져 있을 줄 알았다.

2010년 4월. 만 5년간의 세금납부 실적과 무범죄 증명,

그리고 주거 서류승인이 통과되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EU영주권을 받았다.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처럼 ‘유럽 영주권’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것은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그리고 그 끝은 2010년 4월의 어느 날까지였고, 그 순간 나를 이 낯선 유럽 땅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놈의 바이러스는 이내 무심하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르부닉크 다운타운. 멀리 아드리아해(海)가 보인다.
해안가에 자그마한 민박집 하나 운영하면서 큰 욕심 없이 유럽생활을 즐기는 것도 매력적이다.


영주권을 받아 무언가 큰일을 해냈다는 뿌듯함도 한 순간. 당분간 변하지 않을 일상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땐 이미 영주권에 대한 존재 자체도 잊은 채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즈음 주변의 한국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계속 받게 되었는데….


“동섭씨, 전에 여기 영주권 받았다고 했지? 그거 어떻게 하면 받는 거야?”  

“영주권 그거 있으면 여기서 사업이나 이직해도 비자 상관없는 건가요?”

“슬로바키아도 EU 멤버이니까, 여기 영주권이 있으면 다른 EU 국가에서도 비자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하던데… 신청절차랑 자격이 어떻게 돼요?”


회사일로 슬로바키아에 파견을 와서 살다 보니 적응이 되고, 적응이 되다 보니 감히 한국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나기도 하거니와 이곳 생활이 만족스러워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어진 것일까?


대기업의 경우 정해진 연수 기간이 지나면 복귀를 해야 하지만, 그 외 중소규모의 회사들은 그러한 규정이 따로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더욱이 재미있는 사실은 나에게 유럽 영주권 신청에 대해 이런저런 문의를 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과거 내게 자신감 넘치는 샤우팅을 날리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뭐, 이런 나라 오래 있으면 뭐 하겠어요. 내년쯤에 한국 들어가야죠.”

“참나! 내가 여기서 썩고 있을 사람처럼 보이니? 빨리 여길 떠야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되짚어 보면서, 어렵게 만들어낸 유럽 영주권을 이용해 남아있는 나의 삶을 어떻게 후회 없이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어떻게 살더라도 스스로 영화 속 주인공이라 자부해도 될 만한 것이 이곳 생활이다. 보통 한국인들은 은퇴 준비를 한다면서 ‘은퇴자금’에만 초점을 맞춘다. 금액도 사람마다 너무 다르다. 1, 2억이면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고, 기본 10억이라는 사람도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너무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10억으로 뭘 할 거냐고 물어보면, “별 계획 없어.” 라는 말과 함께 중형차, 팬션, 해외여행 등등을 별것 아닌 듯이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이런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 휴가기간 중 한국에 다녀오면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사게 되고, 되돌아오는 비행기에 싣는 짐 무게는 항상 규정 초과다. 남들 하는 것만큼 해야 한다는 본능, 남들 하는 거 안 하면 왠지 바보 같다는 경험들이 아우러져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이곳 생활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남과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상하게 한국만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바뀌게 된다.


어쨌건, 건강관리 잘하고 욕심만 버리면 몇 억은 절약할 수 있다. 거기에 외국인이라는, 특히 한국인이라는 강점으로 한국과는 다른 재미있는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


EU 회원국에서 받은 영주권 또는 시민권은 EU 국가 내에서 자유롭게 거주, 이전, 취업,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원하는 나라에 세금을 낸다면 그 나라의 복지혜택까지 누릴 수 있다.


누구든 조금의 상상력만 펼치면 동화 같고 영화 같은 삶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다시 대학으로


유럽의 대학도 당연히 학비가 있다. 외국인이 100원이라고 한다면, 자국민은 10원, EU 국민은 20원 이하 정도의 학비를 낸다고 보면 된다. 거의 상징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Non EU일 경우 입학 후 비자도 받아야 하고, 외국인으로서 관리도 받아야 한다. 그에 비해 EU 국민은 그럴 필요가 없다.


보통 50대가 되면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것이고, 그 후로 수십 년 열심히 달려온 자신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주어도 괜찮을 듯싶다.


다시 학생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문학가가 꿈이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양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럽 언어에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고, 사진이나 연극에 푹 빠졌던 이도 있을 것이다. 꼭, 문학이나 예술분야가 아니더라도, 구두 제작, 치즈 제조, 골프장 설계, 하몽, 와인 등 한 번쯤 꿈꿔왔던 분야를 현실로 옮기는 것도 무척 설레는 일이다.


어찌 됐든 EU 국민으로서, 2~30살 나이 어린 친구들과 사귀며 배움에 몰입하고 다시 학생이 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 한국사람은 보통 10~15살 정도 어리게 보니, 나이 차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수도 브라티슬라바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는 슬로바키아 최고 대학인 코메니우스 대학교 앞.
이곳에서 다시 학생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지 꿈이 아니다.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퇴직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굳이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소박하게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알려달라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슬로바키아어, 영어를 더욱 공부해서 통번역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설 것이고, 나 없이도 굴러갈 수 있는 작은 회사를 차릴 것이다. 무역을 하거나 교민 대상으로 가게를 열거나 공장 설비 에이전트로 일하거나.


혹시 아는가? 다시 교육을 받고 남은 인생을 원하는 일과 함께 늙어갈 수 있을지….


코메니우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 및 교수
만약 학생이 된다면 수석 졸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북유럽 연어 낚시와 스코틀랜드 골프

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다 보니, 항상 바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슬로바키아는 내륙국가이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노르웨이 피요르드에서 연어낚시와 함께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유럽 영주권이 있다면 비자걱정은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바다 음식은 귀하기 그지없어 냉동 아니면 말려서 먹을 수밖에 없다. 가끔 북유럽산 훈제 연어를 먹으면서 직접 연어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아예 북유럽산 연어의 유통경로를 공부하고 있다. 머지않아 노르웨이 산 연어와 함께 나이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골프의 성지인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류 Old course에서 플레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그 골프장에서 일할 수 있다면…? 청소 아르바이트라도 좋고, 매점에서 허드렛일을 해도 부담이 없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또한 골프 스코어보다는 골프 코스 특유의 분위기와 골프 성지만의 특별한 무언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매일 아침, 홍차와 갓 구운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역사의 현장으로 출근한다. 이슬 맺힌 잔디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일과를 시작하는 거다. 가끔은 유명인도 방문할 것이고, 정기적인 토너먼트도 개최될 것이다. 평생 그곳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므로 하루하루를 그저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면 될 것이다.


북유럽 연어 낚시와 스코틀랜드 골프는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지기 쉽지 않은 무한한 상상력과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다양한 유럽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예로 든 것이다. 거기에 유럽인이 입장에서는 한국인이 되는 것이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왠지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동경 어린 시선을 느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골프의 성지 세인트앤드류 골프장 내에 위치해 있는 레스토랑.
여행하는 기분으로 이곳 생활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새로운 국가에 새로운 도전을!
예컨대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처음 슬로바키아에 왔을 당시 2004년 기준으로 한국 민박집 1일 숙박비가 100~150유로였다. 방이 5~7개 있는 일반 가정집을 빌려서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동네 허름한 러브호텔을 임대해서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피크 시즌에는 한 방에 두 명씩 생활했지만, 가격은 모두 일 인씩 받았다. 그나마도 묵을 방이 없었으니 아쉬운 쪽은 출장자인지라 불평불만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4성급 수준의 호텔에 각종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대로 된 호텔로 진화하였지만, 가격은 오히려 내려갔다. 1박에 50~80유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품질과 서비스는 훨씬 더 좋아졌지만, 가격은 절반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한국기업들은 안정화가 되어 예전처럼 많은 출장자가 필요 없게 되었고, 거기에 돈 좀 된다 싶으니 경쟁업체도 생겼다.


사업적인 욕심이 있다면 한국기업들 동향을 잘 살피면서, 구 유고연방 국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등 한국인이 별로 없는 곳이 오히려 더 큰 기회일 수가 있다. 내가 슬로바키아로 처음 가기로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런 한국 사람도 없고, 제대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후진국에 가느냐 했다. 심지어 당시엔 한국대사관도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나라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젊고, 큰 자본이 없어도 사업적인 욕심이 있다면 말이다. 단, 사회가 안정되고 한국 사람이 많다면 웬만한 자본으로는 어림도 없다. 돈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하나씩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현지 언어 실력과 믿을 만한 현지인 친구다. 무조건 처음 몇 개월은 현지 언어에 몰두하면서 사업 마인드가 있는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면서 스스로 현지 언어를 사용하며 세무, 법률적인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엔 모든 일을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건 정말 위험부담이 크다. 그리고 아이템이 정해지면 바로 시작해야 한다. 너무 심사숙고 하면 시기를 놓쳐버리거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유럽에 사는 한국인은 희소하다. 그것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최초가 될 수 있으니, 성공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실패하더라도 무언가 해보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본전을 뽑고 남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TV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글로벌 한국인이니,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라느니,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넓게 가진다면 죽는 그 날까지 재미있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꼭 여기 동유럽이 아니라도 말이다.




글/사진 최동섭

슬로바키아 14년차로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 근무 후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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