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여행] 다시 찾은 시라쿠사

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 #9


 

2017년, 20대 아시아 여자 혼자 시칠리아를, 그것도 대중교통으로 9박 10일 여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주변 사람들은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 시내 한복판에서 마피아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한쪽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가 끝내 사망했다는 기사가 전파를 탔다.


두려웠지만 시칠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인생 최고 여행지를 단숨에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시칠리아를 다녀온 이후, 누군가 나에게 이탈리아 최고 여행지를 꼽으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시칠리아를 꼽는다. 마피아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낯선 이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날씨와 음식은 그야말로 예술이고, 아프리카, 이슬람, 그리스가 융합된 문화는 신비로움을 넘어 경이롭다.



열흘이 못내 아쉬웠던 나는 항상 시칠리아를 꿈꾸며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시칠리아에서 한 달을 보내는 계획을 완성했을 때,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곳이 시라쿠사였다. 본토에서, 시칠리아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시칠리아 베스트 스팟을 물으면 대부분 시라쿠사를 꼽았다. 기대에 부풀었고, 기대보다 훨씬 좋아서 울어버렸던 곳이 바로 시라쿠사였다. 하얀색 대리석 도시가 분을 바른 듯 반짝 빛나고, 뜨거운 햇살을 가득 머금은 나무와 꽃은 잘 정돈되어 해변 산책로와 함께 사랑스러움을 마구 뿜어냈다. “이곳에서 살고 싶다!” 나는 주변 사람을 의식도 하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시라쿠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도시로 오랜 기간 번성했고, 그리스, 로마 원형 극장을 비롯한 유적은 삼천 년에 걸친 지중해 문화의 발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신비로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시가지인 오르티지아(Ortigia)섬 초입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유적이 흩어져 있고, 거대한 고고학 공원에 들어서면 책에서만 보던 고대 그리스 유적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특히 그리스 원형 극장은 석회암을 통째로 다듬어 만들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리스 원형 극장과 그리스 유적


한참 길을 잃어가면서 고고학 공원을 관람하고 나와 로마길(Via Roma)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두오모 광장(Piazza Duomo)이 있다. 이곳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말레나〉를 촬영했다. 보는 사람을 누구나 한 번에 매혹 시키는 여성 말레나. 타고난 미모 때문에 도리어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삶.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아름다웠다. 물론 며칠 전 돌체 앤 가바나 패션쇼에서 본 지금의 그녀도!

 


두오모 옆 골목길을 따라 나가면 해변 산책로가 나온다. 해질녘, 하늘과 맞닿은 붉은 기운의 해변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기만 해도 좋은 곳이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면 수많은 이탈리아 현지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는 도시가 왜 시라쿠사인지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벅차게 아름다운 수많은 풍경보다 수많은 관광객이 시라쿠사를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보르데리(Andrea Borderi) 할아버지다. 이미 각종 SNS의 슈퍼스타인 보르데리 할아버지의 샌드위치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명물이다. 시라쿠사에서 치즈를 만들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치즈와 시칠리아의 신선한 식재료들을 넣은 샌드위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워낙 좋은 재료에 할아버지의 퍼포먼스, 팬서비스가 더해져 인기가 치솟았고 다양한 국가에서 그의 샌드위치를 맛보기 위해 찾아온다.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면서 손님과 농담을 주고받고, 신선한 재료를 입에 직접 넣어주기도 하고, 스몰토크도 잊지 않고, 손님과 사진 찍기도 빼놓지 않는다. 메뉴는 없다. 그냥 그날 가장 좋은 재료로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받아 들어야 한다.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담긴, 마치 장인의 작품과도 같은 샌드위치를 만나는 순간 누구나 탄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미슐랭 식당 음식보다 먹기 아까울 정도이다.


긴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가족들은 직접 만든 치즈, 수제 맥주, 프로슈토 등을 쉴 틈 없이 제공하며 지루함을 달래준다. 기다림에 지쳐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본다. 나에게는 기다리는 시간마저 행복이었으니까. 5년 전처럼 그 맛, 가격 그대로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어 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유쾌한 사람들 덕분에 시라쿠사에서의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에게 시라쿠사 하면 보르데리가 함께 떠오르는 존재가 되었다.


보르데리 할아버지와 그의 샌드위치


내 얼굴만 한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한 손에는 맥주 한 병을 쥐고 해변가 산책을 한다. 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자리에 걸터앉아 와구와구 그의 사랑을 씹어 본다. 천국이 따로 없다.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시칠리아의 순간이었다.





글/사진 김혜지(이태리부부)

파리, 로마를 거쳐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기록하고 콘텐츠를 생산해 내며 삶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투브 채널 '이태리부부' 운영 중. 『이탈리아에 살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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