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거나 타 봤을 유로스타. 파리와 런던을 잇는 노선이 대표적인 이 기차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려면 프랑스 북부 노르(Nord)주의 수도 릴(Lille)에 반드시 들러야 한다. 릴은 보통 유로스타를 타거나 파리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국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 비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빈티지와 골동품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릴은 특별하다. 이 도시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Grande Braderie De Lille)’이 열리기 때문이다.

매년 9월 첫 번째 주말이면 수백만 빈티지와 골동품 애호가들이 릴로 모여든다.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삼 년 만에 재개된 올해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 2022’ 행사에는 유럽 전역에서 약 삼백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릴 시내의 모든 차도와 광장은 물론 좁은 골목골목까지 장이 들어서고, 운집한 인파 덕분에 릴의 구시가지 곳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앞뒤로 길이 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축제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셀러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수준. 가구, 그릇, 옷과 신발, 장난감, 책, 잡지, 장신구와 각종 시계 등 온갖 물건들이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다. 하나같이 집안 어딘가에서 오랜 시간 한 가족의 역사를 지켜봐 온 물건들일 테니 이건 시장이라기보다 21세기 인류의 생활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빈티지와 골동품이 낯선 사람에게는 이 물건들이 쓰레기나 고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탁월한 안목을 가진 누군가에게는 보물이다. 빈티지 마켓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무시할 수 없는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좋은 물건들은 아침부터 움직이는 보물 사냥꾼들이 일찍 쓸어가 버린다고 하니 보물섬에서 보물을 발견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시에서는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 고유의 정체성과 전통을 살리기 위해 행사 기간 기존 소매 상점들이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그럼에도 몇몇 상점은 문을 열고 재고 소진을 위해 큰 할인율로 창고 대방출 세일을 하기도 한다. 골동품 전문 셀러들은 이들이 행사의 본질을 흐린다고 쓴소리를 하지만, 여행자 입장에서는 이 또한 반가운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을 보기 위해 릴을 찾았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다. ‘물 프리트(moules frites)’라고 하는 홍합찜과 감자튀김이 그것이다. ‘물 프리트’는 프랑스 노르주와 벨기에의 전통 음식인데 행사 기간에 영업하는 릴 시내의 모든 레스토랑은 ‘물 프리트’를 반드시 메뉴에 올려야 한다.

고작 감자튀김이 무슨 전통 음식이냐 싶기도 하지만, 튀김 모양부터 찍어 먹는 소스까지 식당마다 고유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 맛을 비교해 보며 먹는 것도 재미다. 테라스에 빼곡히 자리 잡은 테이블마다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사람들이 커다란 그릇을 앞에 두고 일제히 홍합을 까먹는 모습은 장관이다. 이 기간에 모인 홍합 껍데기는 레스토랑마다 한자리에 모아 홍합 껍데기 탑을 쌓는다. 사람들은 꼬릿한 냄새를 풍기는 홍합 껍데기 탑 앞에 서서 인증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릴에서 이런 대규모 행사가 열릴 수 있는 이유는 릴이 유럽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물론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까지 모두 한두 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 덕분에 릴에는 쉼 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니 어떤 행사가 열리든 자국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릴 시는 이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과 더불어 대표적인 행사로 ‘릴 3000(Lille 3000)’이 있다.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에 과거의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서가 담겨 있다면, ‘릴 3000’에는 인류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능동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2004년 릴이 유럽 문화의 수도로 지정된 이후, ‘3000년까지 문화를 지속해서 발전시킨다’는 모토 아래 신기술, 미래 도시 건설, 사회 및 문명의 진화 등의 주제로 대략 삼 년마다 열리고 있다.
‘릴 3000’은 그들의 시선을 프랑스 혹은 유럽에 한정 짓지 않는다. 2006년에는 '릴의 뭄바이 사람들'을 통해 인도를, 2009년에는 '유럽 XXL'이라는 주제로 동유럽을, 2019년 '엘도라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를 테마로 했다. 그리고 4회 '르네상스'에서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미국 디트로이트,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베트남 프놈펜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 5개 도시에 집중했다. 그들이 상상하고 그리는 도시와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2019 '엘도라도' 당시의 퍼레이드 장면 ⓒDamien TROY
릴은 한때 섬유 방직 산업으로 부를 누렸지만 산업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한순간에 몰락했다. 치솟는 실업률로 수많은 젊음이 신음하며 도시 소멸까지 염려해야 했다. 그러나 유로스타의 개통으로 영국과 대륙을 잇는 주요 관문도시가 되면서 기회와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중이다. 걸어서 도시의 끝과 끝을 오갈 수 있는 이 작은 도시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대학을 품고 있다. 꿈꾸는 젊음들이 전 세계에서 릴로 몰려들고, 이 도시는 그 에너지를 품어 유럽 스타트업의 포탈이 되려 하고 있다.
파리에서 시선을 돌려 프랑스로의 다음 여정을 고민하고 있다면 30세기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는 도시, 동시에 해마다 유럽 최대 규모의 골동품 시장을 개최하는 도시, 이토록 흥미롭고 다이내믹한 도시 릴에 들러 유럽인들의 생각과 고민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글/사진 춘자

춘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전세계를 누비며 도착한 땅에 그 다음을 위한 씨앗을 뿌리는 봄의 아이. 꿈, 가능성, 도전, 연대,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일, 현대인에게 의미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모든 말을 사랑한다. 현실이 되는 꿈, 결과를 낳는 가능성, 성공을 위한 도전, 함께 성장하기 위한 연대, 남이 아닌 진짜 내가 되는 일을 추구한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젠젠과 공저한 『카페, 라다크』를 썼다.
https://www.instagram.com/choonza_is_coming/
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거나 타 봤을 유로스타. 파리와 런던을 잇는 노선이 대표적인 이 기차를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려면 프랑스 북부 노르(Nord)주의 수도 릴(Lille)에 반드시 들러야 한다. 릴은 보통 유로스타를 타거나 파리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국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 비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빈티지와 골동품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릴은 특별하다. 이 도시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Grande Braderie De Lille)’이 열리기 때문이다.
매년 9월 첫 번째 주말이면 수백만 빈티지와 골동품 애호가들이 릴로 모여든다.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삼 년 만에 재개된 올해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 2022’ 행사에는 유럽 전역에서 약 삼백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릴 시내의 모든 차도와 광장은 물론 좁은 골목골목까지 장이 들어서고, 운집한 인파 덕분에 릴의 구시가지 곳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앞뒤로 길이 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축제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셀러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수준. 가구, 그릇, 옷과 신발, 장난감, 책, 잡지, 장신구와 각종 시계 등 온갖 물건들이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다. 하나같이 집안 어딘가에서 오랜 시간 한 가족의 역사를 지켜봐 온 물건들일 테니 이건 시장이라기보다 21세기 인류의 생활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빈티지와 골동품이 낯선 사람에게는 이 물건들이 쓰레기나 고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탁월한 안목을 가진 누군가에게는 보물이다. 빈티지 마켓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무시할 수 없는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좋은 물건들은 아침부터 움직이는 보물 사냥꾼들이 일찍 쓸어가 버린다고 하니 보물섬에서 보물을 발견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시에서는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 고유의 정체성과 전통을 살리기 위해 행사 기간 기존 소매 상점들이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그럼에도 몇몇 상점은 문을 열고 재고 소진을 위해 큰 할인율로 창고 대방출 세일을 하기도 한다. 골동품 전문 셀러들은 이들이 행사의 본질을 흐린다고 쓴소리를 하지만, 여행자 입장에서는 이 또한 반가운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을 보기 위해 릴을 찾았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다. ‘물 프리트(moules frites)’라고 하는 홍합찜과 감자튀김이 그것이다. ‘물 프리트’는 프랑스 노르주와 벨기에의 전통 음식인데 행사 기간에 영업하는 릴 시내의 모든 레스토랑은 ‘물 프리트’를 반드시 메뉴에 올려야 한다.
고작 감자튀김이 무슨 전통 음식이냐 싶기도 하지만, 튀김 모양부터 찍어 먹는 소스까지 식당마다 고유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 맛을 비교해 보며 먹는 것도 재미다. 테라스에 빼곡히 자리 잡은 테이블마다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사람들이 커다란 그릇을 앞에 두고 일제히 홍합을 까먹는 모습은 장관이다. 이 기간에 모인 홍합 껍데기는 레스토랑마다 한자리에 모아 홍합 껍데기 탑을 쌓는다. 사람들은 꼬릿한 냄새를 풍기는 홍합 껍데기 탑 앞에 서서 인증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릴에서 이런 대규모 행사가 열릴 수 있는 이유는 릴이 유럽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물론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영국까지 모두 한두 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 덕분에 릴에는 쉼 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니 어떤 행사가 열리든 자국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릴 시는 이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과 더불어 대표적인 행사로 ‘릴 3000(Lille 3000)’이 있다.
‘그랑드 브라드리 드 릴’에 과거의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서가 담겨 있다면, ‘릴 3000’에는 인류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능동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2004년 릴이 유럽 문화의 수도로 지정된 이후, ‘3000년까지 문화를 지속해서 발전시킨다’는 모토 아래 신기술, 미래 도시 건설, 사회 및 문명의 진화 등의 주제로 대략 삼 년마다 열리고 있다.
‘릴 3000’은 그들의 시선을 프랑스 혹은 유럽에 한정 짓지 않는다. 2006년에는 '릴의 뭄바이 사람들'을 통해 인도를, 2009년에는 '유럽 XXL'이라는 주제로 동유럽을, 2019년 '엘도라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를 테마로 했다. 그리고 4회 '르네상스'에서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미국 디트로이트,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베트남 프놈펜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 5개 도시에 집중했다. 그들이 상상하고 그리는 도시와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릴은 한때 섬유 방직 산업으로 부를 누렸지만 산업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한순간에 몰락했다. 치솟는 실업률로 수많은 젊음이 신음하며 도시 소멸까지 염려해야 했다. 그러나 유로스타의 개통으로 영국과 대륙을 잇는 주요 관문도시가 되면서 기회와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중이다. 걸어서 도시의 끝과 끝을 오갈 수 있는 이 작은 도시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대학을 품고 있다. 꿈꾸는 젊음들이 전 세계에서 릴로 몰려들고, 이 도시는 그 에너지를 품어 유럽 스타트업의 포탈이 되려 하고 있다.
파리에서 시선을 돌려 프랑스로의 다음 여정을 고민하고 있다면 30세기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는 도시, 동시에 해마다 유럽 최대 규모의 골동품 시장을 개최하는 도시, 이토록 흥미롭고 다이내믹한 도시 릴에 들러 유럽인들의 생각과 고민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글/사진 춘자
춘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전세계를 누비며 도착한 땅에 그 다음을 위한 씨앗을 뿌리는 봄의 아이. 꿈, 가능성, 도전, 연대,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일, 현대인에게 의미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모든 말을 사랑한다. 현실이 되는 꿈, 결과를 낳는 가능성, 성공을 위한 도전, 함께 성장하기 위한 연대, 남이 아닌 진짜 내가 되는 일을 추구한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젠젠과 공저한 『카페, 라다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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