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나는 다트포드를 사랑하게 될 거야

2022-11-14

엘리자베스 여왕 2세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파리에서 들었다. 엄청난 규모의 추모 인파가 런던에 몰릴 것이라고 뉴스는 말했다. 여왕의 유해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조문객 행렬이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템스강을 따라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고 있다나.


나흘 뒤 낭트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타야 했고, 런던 숙소는 아직 예약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루 이틀 우물쭈물하는 사이, 당연하게도 런던 시내 대부분의 숙소가 예약이 꽉 차버렸다.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손 떨리는 런던 물가에 여왕 장례식까지 겹쳐 그나마 구할 수 있는 형편없는 수준의 골방조차 터무니없이 비싸졌다. 낭패였다.


9afeb0c3ee116.jpg런던 시내에서


3년 전, 런던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는 채로 ‘하필’ 런던에서 보내야 했던, 고단하고 찬란했던 그 하루가. 식빵과 잼, 그리고 시리얼이 전부인 호스텔 조식으로 배를 잔뜩 채우고 나와 런던 시내를 내내 걸어 다녔던 그날, 삐걱거리는 무릎 관절과 쫄아 붙은 위장이 작작해라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런던이 마냥 좋았다. 테이트모던을 빠져나와 걸었던 템스 강변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3년 만에 일 때문에 다시 찾은 런던에서는 짧게나마 생활인의 여유를 가져보고 싶었는데, 예기치 못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여왕님!


아무리 생각해도 런던 시내의 말도 안 되는 방에서 궁상을 떠느니 런던을 벗어나 적당히 지낼 만한 숙소를 찾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에어비앤비를 뒤지다 흘러들어간 동네가 다트포드(Dartford)다. 런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29km 정도 떨어진 다트포드는 켄트주에 속해 있으며, 런던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노선이 만나는 철도 허브이고, 무려 남양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자매결연이 다트포드와 남양주 양쪽에 어떤 의미인지는 불가사의. 


1a28e14b97782.jpg다트포드 역 ⓒExplore Kent


다트포드 역은 런던 대중교통 요금 구역상 8구역에 속해 있다. 사우스이스턴(Southeastern) 라인 혹은 템스링크(Thameslink) 라인을 타면 런던 시내의 주요 역, 킹스 크로스(King’s cross),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런던 브릿지(London bridge), 워털루(Waterloo) 등까지 대략 40분 안팎, 길어도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다트포드에서 런던을 오가는 왕복 교통비는 싱글 티켓을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하루에 약 12파운드, 한화로 2만 원 정도다. 그렇게 보름이면 약 30만 원이다. 여행자가 다트포드에 지내는 것이 말이 되냐 싶겠지만, 숙박비는 런던 시내를 오가는 교통비와 반비례하기 때문에 그렇게 정신 나간 선택은 아니다. 다 따지고 보면 비용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시간이 금이라면 런던 시내에, 숙소의 컨디션이 중요하다면 되도록 시내를 벗어나 지내면 된다. 내게 주어진 2주는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었고, 관광지 이곳저곳을 바삐 다닐 계획도 없었기에 런던 시내를 벗어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704485243de9e.jpg다트포드와 런던을 잇는 열차


교통비의 경우, 오이스터 카드를 충전하여 쓰는 것보다는 정액권인 트래블 카드가 조금 더 경제적이다. 트래블 카드가 있으면 해당 구역 내에서 기차, 지하철, 버스 등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덤으로 몇몇 유명 관광지에서는 입장권 할인 혜택까지 누릴 수 있다. 


무제한이라니 귀가 솔깃해지지만, 런던 시내의 주요 관광지들은 오밀조밀 모여 있는 편이고, 모름지기 시내 관광이란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 제맛이기 때문에 런던 시내에서 지낸다면 무제한 정액권보다는 충전하여 쓰는 오이스터 카드가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1구역에서 8구역까지 커버하는 트래블 카드 일주일 권의 가격은 87파운드. 안타깝게도 다트포드 역은 한 정거장 차이로 6구역에서 8구역으로 강등되어 6구역까지 커버하는 일주일 권 요금보다 약 21파운드 정도 비쌌다. 


9347a6cccf6fe.jpg다트포드는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키스 리차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Explore Kent


다트포드 역 바로 뒤에 위치한 아파트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다소 노후해 보이는 주변 건물들에 비해 깨끗하고 신식이었다. 내부도 제법 근사했다. 방은 두 개였는데, 남는 방 하나를 에어비앤비로 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스트 애디는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개인 욕실이 딸린 방을 제외하고는 공유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내 집처럼 여기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물론 애디에게는 호들갑으로 맞장구를 치며 “이미 내 집 같다”고 말했다.


애디의 집에는 중년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저녁에 돌아오면 늘 둘이 붙어 앉아 한참을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길래 엄마나 이모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도 숙박객이었다. 그러니까 애디는 두 개의 방을 모두 게스트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거실 소파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애디가 외출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 전업으로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개의 방을 한 달 내내 돌리면 한 달에 육백만 원 이상 벌 수 있을 테니 월세를 내고 생활비도 충분할 것이다. 어쨌든 애디의 집은 깨끗하고 넓었으므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좋은 호텔 룸이라 여기면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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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까지 나가려면 한 시간이나 걸리는 데다 숙소에서 내 집처럼 여유를 부리며 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일단 우리 동네 다트포드에 아지트 삼을 공간을 찾아 두어야 했다. 잠시 머무르다 떠날 여행자가 ‘우리 동네’, ‘아지트’ 운운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숙소가 있는 동네에 정을 붙이는 과정은 내게 의식에 가깝다. 단 하루를 지내도 생활인이 되어 지내고 싶은 것이다. 생활인의 루틴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단 두 가지. 편안한 카페와 안전한 산책로뿐이다.


d1899e0f4de26.jpg다트포드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 ⓒExplore Kent


구글맵에 ‘카페’를 검색했는데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번화가 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제법 큰 규모의 몰이 나타났다. 몰에는 코스타 커피, 막스앤스펜서 식료품점(M&S Simply Food), 티케이 맥스(TK Maxx) 등 체인점이 입점해 있었는데 크기만 컸지 ‘쇼핑몰’ 특유의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축축 늘어졌다.


몰 건너편으로는 낡고 오래된 건물과 간판들, 문을 열고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식당과 펍, 특색 없는 상점들이 이어졌다. 인도 식당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을 보니 인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모양이었다. 거리 전체가 몇십 년 전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고여 있는 것 같았는데, 고풍스럽다기보다 쇠락한 읍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생기가 없었다. 맥주병을 들고 벤치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중년의 세 남자가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활기차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한 블록 한 블록 지날 때마다 내 마음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날 저녁에는 인도 식당에서 도사(Dosa)를 먹었다. 인도에서 먹은 도사와 똑같은 맛이 나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맥주까지 한잔 마시고 식당을 빠져나오니 밖은 벌써 어둑했다. 활기 넘치는 남자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잔뜩 취해 이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는 이 동네 다트포드를 사랑하게 될 거야’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아니, 사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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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장례 기간, 런던 시내 곳곳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문을 닫은 상점이 많았고, 도로 곳곳이 통제되었다. 나는 런던의 추모 분위기를 존중했고 심지어 경이롭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활기가 사라진 런던의 거리를 몇 날 며칠 걷는 것은 고역이었다. 파리가 낭만의 도시라면, 런던에서 기대하는 것은 넘치는 활기, 다이내믹 그 자체였으니까. 꾸역꾸역 런던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매일 2만 보씩 걸었다. 소진된 체력과 정신력은 부지런히 잠으로 채웠다. 애디의 집에 머물던 중년의 여성이 나가고 커플이 들어왔다. 새로운 게스트 역시 시끌벅적했고, 나는 가끔 마주치는 애디와 간단한 안부 인사만 나누며 쥐 죽은 듯 지냈다. 나의 주문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리 동네 다트포드는 내 마음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c018dafe45dc5.jpge680b3d5ff444.jpg여왕 추모 기간 중의 런던


아무 일정이 없었던 나른한 주말, 런던까지 나갈 기운이 도저히 나지 않아 쇠락한 읍내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늘 지나치는 길에 위치한 작고, 낡고, 후줄근한 그 카페의 이름은 커피 팟. 여덟 개의 테이블은 아침 식사 중인 동네 사람들로 거의 만석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주인 할머니가 반갑게 맞으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인사말에 묻은 하이톤의 경쾌한 영국 악센트가 노래처럼 들렸다. 홀과 주방을 오가며 손님들과 미소와 눈빛을 교환하는 그녀 덕분에 카페 안은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메뉴판 앞뒤로는 다양한 구성의 마침 메뉴와 샌드위치, 버거, 오믈렛, 샐러드, 그릴 메뉴가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그 가격이 런던 시내의 절반 수준이었다.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와 샌드위치, 새우 샐러드, 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금세 커피를 가져다주며 주인 할머니가 다시 노래했다.


“우유 필요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나도 노래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등 뒤에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과 마음에 묻은 피로가 서서히 씻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손과 입을 움직이는 사람들,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는 사람들, 안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다트포드에서 남은 시간이 단 사흘뿐이라는 사실이 문득 슬퍼졌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ec01ce056328b.jpg커피 팟에서 먹은 브런치


“샐러드 크림 드릴까요?”
“네. 마요네즈도 주세요!”


큼지막한 샐러드 크림과 밥공기만 한 볼 가득히 담겨 나온 마요네즈가 내 앞에 놓였다. 그 맛은 집에서 만든 음식처럼 소박하고 다정했다. 그때쯤 나는 이미 그곳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남김없이 그릇을 비우고 만족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다가왔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 맛있었어요. 저는 이곳이 정말 좋아요. 내일 또 올 거예요.”


할머니는 자못 감동스럽다는 듯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외쳤다.


“러블리!”


그녀가 미소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하마터면 “당신도 러블리하다”고 말할 뻔했다. 아아! 나는 다트포드를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아지트를 발견하고 마침내 다트포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친근한 표정과 상냥한 말을 건네는 방법을 알고 있는 커피 팟의 주인 할머니 덕분. 이것이 상냥한 사람들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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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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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전세계를 누비며 도착한 땅에 그 다음을 위한 씨앗을 뿌리는 봄의 아이. 꿈, 가능성, 도전, 연대,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일, 현대인에게 의미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모든 말을 사랑한다. 현실이 되는 꿈, 결과를 낳는 가능성, 성공을 위한 도전, 함께 성장하기 위한 연대, 남이 아닌 진짜 내가 되는 일을 추구한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 젠젠과 공저한 『카페, 라다크』를 썼다.
https://www.instagram.com/choonza_is_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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