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 비엔나][여행] 인생의 시기마다 나는 그에 어울리는 카페에 있었다

2025-05-21

하루 한 잔 비엔나 #24



한국에서도 카페를 자주 갔다. 그게 할리스였던가. 처음으로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부은 마끼아또를 마시고 그날 밤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뛰느라 잠 못 이루던 신입생 새내기가 어느새 카페 투어를 즐기게 되었다니. 



지금은 커피 취향이 진하게 내려진 블랙커피(페어랭어터 Verlaengerter)를 즐겨 마시는 것으로 달라졌지만, 처음엔 커피뿐만 아니라 다양한 카페 메뉴를 섭렵하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한 메뉴에 꽂히면 그것만 질릴 때까지 먹는 버릇이 생겨 어디 가면 지인들이 “미리는 복숭아 아이스티(혹은 체리콕)이지?” 하면서 알아서 시켜주기도 했다. 물론 다양한 디저트도 친구들과의 카페 데이트에서 빠질 수 없었다. 유럽에 오기 전까지 인상 깊었던 카페를 하나 꼽자면 다른 곳도 아닌 경성대 정문 건너편의 스타벅스다. 그때는 캐러멜 마끼아또만 줄창 마시던 시기였는데, 지금도 ‘스타벅스’ 하면 그곳의 인테리어가 떠오를 정도로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아직 잘 있으려나.



유학을 시작했던 독일의 작은 도시에는 스타벅스가 없었다. 물론 대신할 단골 카페를 찾아냈는데, 유학 시절의 어려움이라든가 불안을 틈만 나면 그 카페에서 수다를 떨며 풀었다. 카페 옆으로 좁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고 거길 걸어 내려가면 마치 또 다른 세상인 것처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나와서 더 기억에 남는다. 떠올리면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발밑에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다음으로 살았던 다른 독일 도시에서는 마침내 스타벅스와 재회했는데 강가 바로 옆에 있던 지점을 자주 찾았다.



이제 나는 ‘카페의 도시’ 비엔나에 살고 있다. 처음 비엔나에 와서도 온갖 골목 카페를 찾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남편과 데이트를 하던 곳, 분위기가 좋아 스냅 촬영 때 활용하려고 콕 저장해 둔 곳. 그런 곳들을 내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미리의 방앗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비엔나 3대 카페 중 하나로 관광의 중심이 되어버린 카페 첸트랄 (Café Central) 역시 그중 하나였는데, “라떼는 말이야” 웨이팅을 할 필요가 없던 곳이다. 카페 데멜(Demel)도 마찬가지고, 이제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명소가 되어 버려 단골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다. 그런 곳들은 이제 안녕, 놓아줘야지.



간간이 퇴근 후 촬영을 하지만, 이제는 회사 일이 삶의 메인이 되었다. 룰루랄라 혼자서 다니던 옛날과 달리 실컷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 아들과도 항상 동행해야 한다. 남편도 데이트할 때나 슬쩍 카페에 앉아 줬지, 본성은 “커피 원샷!” 하고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가보고 싶다고 찜해 둔 곳은 많으나 집도 시내 한가운데가 아니고 퇴근 후에는 귀가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진득하게 카페를 다닐 기회가 줄어들어 한동안은 ‘미리의 방앗간’ 업데이트가 늦어질 것 같다.



그래도 내 삶의 분기마다 그에 어울리는 카페가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다. 어떤 시기를 돌이켰을 때 함께 떠오르는 공간이 있음으로써 기억이 더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일과 함께 기억될 카페가 또 나타나리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는다. 자, 그러니까 우리 아들, 언제 엄마와 함께 카페에 앉아서 데이트해 줄래? 엄마 옆에서 얌전히 케이크를 먹는 것보다 자전거를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외쳐본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마이네포토 대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2006년부터 유럽에서 살았고, 2009년부터 시작한 비엔나 스냅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은 일 벌리기 능력자 워킹맘. 주력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아날로그 느낌의 필름카메라 작업도 즐겨하며, 요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 마이네포토(MeineFotos)라는 이름으로 비엔나에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한 마리의 고양이, 내성적인 연하남, 다소 엄마를 닮아 집중 받기 좋아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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