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해방 맥주 일지][여행] 마르틴 루터,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는다

2025-07-11

인간 해방 맥주 일지 #1



6eb45eceea518.png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성당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성당 건축비로 재정난에 절절 매기 전부터도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사역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혜안을 보여주었던 말. 


“동전이 바구니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가 나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 테첼이라는 가톨릭 수도사가 한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라는 게 이런 거다, 아주 명쾌한 정의였지요. 돈 소리가 나면 인간의 영혼이 구제된다는 말은 일말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명언이지요. 돈의 유용성을 당장의 밥벌이가 아니라 영혼과 죄에까지 적용하였으니 요한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가졌어도 매우 간악한 인간이었던 게 틀림없고요. 사실 면죄부는 교회에서 받게 될 벌을 면제해 주는 일종의 보석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면죄부라기보다 면벌부라 해야 하지요. 교황 레오10세는 요한 테첼의 설교가 교회를 넘어 연옥까지, 주교를 넘어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걸 묵인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티칸에서 가장 성과가 높은 영업 사원이었거든요.


15bc403221622.png면죄부를 팔던 모습. 2+1 행사는 없었겠지요. | https://lutheranreformation.org/


작센 영주 프리드리히는 테첼이 자신의 영토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테첼의 불경, 오만을 눈 뜨고 봐 줄 수 없었기도 했지만, 그보다 테첼의 면죄부 판매가 자신의 성물 관광에 위협이 될 수 있었거든요. 예수가 마지막에 입었던 옷의 한 조각이라든가, 베드로의 정강이뼈, 바울이 쓰던 지팡이, 어떤 성인이 꼈다는 반지 등 귀족이라면 이런 식의 성스러운 유물 하나쯤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성물을 보여주는, 지금으로 치면 개인 박물관이 꽤나 성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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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영업 사원' 요한 테첼 | https://lutheranreformation.org/


1517년 10월 31일 작센 주 비텐베르크 시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와 교황청을 비판하는 95개의 반박문을 작성해 마인츠 대주교에게 보내고 테첼의 일탈행위를 금지해 달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반박문을 대학교회 문에 붙여 학생들의 학문적 토론을 유도하지요. 정치적 분별없이 신실하기만 했던 루터는 자신이 보낸 편지가 대주교와 교황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교회 내부에서는 아무런 논쟁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무시된 거지요. 교회가 요구한 것은 테첼이 아니라 루터의 입단속이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 논쟁을 일으켜 보려는 시도를 거듭했고, 그럴수록 정치적 문제에 깊게 발을 들이게 되었지요. 그때까지 루터는 자신의 신학 지식과 믿음에 우쭐해 있던 사람이라 주교에게 자신의 틀린 점을 지적해 달라며 과시하는 행동까지 합니다. 


89ca1daaa1ec9.png마르틴 루터

 

신학적 논쟁 같은 건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들은 말은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고, 교황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뿐이었지요. 1520년 6월 교회는 루터의 오류를 밝히는 <교황교서>를 내리고 60일 내로 로마로 출두하라 명령합니다. 교황이 지적한 오류를 안고 로마로 간다는 것은 파문과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교황교서> 유예기간 60일째 되던 날 루터는 동료 학자, 학생들과 함께 교서와 중세 법전을 불태워 버리는 의식을 벌입니다. 도전이었지요. 그리고 1521년 1월 3일 교황은 루터를 파문한다는 문서를 발부하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는 루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더 주기 위해 보름스에서 열리는 회의에 루터를 부르기로 합니다. 그에게 요구된 것은 단 한 마디, ‘철회합니다’였습니다. 


회의 첫 날, 루터는 회의장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문서, 책과 마주합니다. 모두 루터 자신이 쓴 글들이었지요. 이것들 모두 네가 직접 쓴 것들이 맞는가? 여기 적힌 말들을 다 철회하겠는가? 황제의 질문은 명령처럼 단호했고, 루터는 하루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합니다. 황제는 루터에게 다음날 이 시각 이곳으로 나오라며 유예시간을 줍니다. 


34ab1fbf5bee8.png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 앞에 95개의 논제를 못 박는 모습 | 페르디난드 포웰스(Ferdinand Pauwels) 그림


다음 날 아침, 법정 앞에 서서 떨고 있는 루터에게 한자동맹 상인들이 보낸 아인베크 맥주 1리터가 도착합니다. 루터는 아인베크 맥주를 한 잔을 쾌활하게 들이켜지요. 그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황제 앞에 섭니다.


“성경이나 명확한 이성이 제 죄를 증명하지 않는 한 저는 성경을 따를 것이며, 제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5de3c7b625781.png1378년, 아니 그 이전에 세워졌다는 아인베크 양조장은 현재까지도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이 병 디자인은 1884년부터 이어져 왔다고 하네요.


루터는 철회 요구를 세 번 거부합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자로 규정했지요. 이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돌아가 황제의 파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순간 인간을 교회에서 해방시켜 성도와 신이 직접 만나는 길을 열어젖히는 투쟁, 종교개혁 전쟁이 시작됩니다. 루터는 승리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민족마다 자신의 언어로 된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자기들 일상 언어로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교황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신에게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지요. 대리청정에서 직접 지배로 복종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었지요. 루터는 인간이 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신을 사랑하며 그의 은총을 기다리는 일이었지요. 


1591년 바이에른 궁정 공식 양조장이던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루터가 마셨던 아인베크 길드의 맥주를 생산하기로 합니다. 이 아인베크 맥주에 복 맥주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1589년 만들어진 이 양조장은 1610년부터 일반인에게도 맥주를 판매하는데, 크뤼크라는 도자기 잔을 들고 한 줄로 서서 맥주를 받아 마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신분, 직위에 상관없이 한 줄로 서서 한 잔을 채워 자리로 돌아와야 했지요. 이것이야말로 해방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저는 기독교인들이 때마다 성찬 의식을 치르듯 인간 해방을 완성한 공간, 호프브로이 하우스로 가야했습니다.


c8af34936fbb9.png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




글 | 이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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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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