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1
지금 난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다. 내일모레 있을 콩쿠르 본선 무대를 위해 아침 비행기로 이곳에 왔다. 내가 사는 체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성악가다. 사전에서는 성악가를 ‘성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음악가’라고 정의한다. ‘전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얼마나 숱한 나날들을 보냈던가. 나는 중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야 성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예고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성악 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작년 가을에는 유럽에서 성악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것도 체코 프라하에서, 그것도 체코어로 된 정규 과정에서 말이다.

페트르드보르스키 국제음악페스티벌에서 | 출처: 강희 인스타그램
우리 학교는 체코의 수도에 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음악학교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 학교의 졸업생 중 성악 전공을 한 한국인은 내가 최초이다. 아시아인 졸업생 자체도 나 외에는 다른 일본 사람 한 명뿐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유학을 체코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굉장히 무모한 도전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 체코에 입국을 하고, 어학원을 다니면서 어학 자격증을 따고,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기까지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 나는 체코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끔 지인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어떻게 그 낯선 곳에서 그렇게 잘 지내느냐고 놀란다. 타고난 긍정적인 성향 덕분은 분명하지만, 긍정성이 곧 무언가를 잘하는 능력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럽에서 보낸 지난 4년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잘 안다. 최초라는 수식어도 사실은 과분하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기에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 고군분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용기를 내어 나누어 보려 한다.
EP. 01 노래는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작은 합창단을 꾸려 지휘하시는 선생님이셨다. 성함도 아직 기억이 난다. 까치울초등학교의 안현옥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고학년 합창단 언니들에게 가르치는 노래를 가끔 우리에게도 알려주셨는데, 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슬방울’이라는 동요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와서 불러보라고 하셨다. ‘알알이 이슬 되어 이 아침을 밝혔구나~’라는 예쁜 가사가 있는 동요였는데, 나는 가사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핑계로 손을 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날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희가 불렀으면 참 잘했을 텐데.”
나는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학생이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의 집사님께서 노래를 해달라고 부탁하시면 숨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나였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크게 노래를 부른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눈여겨보셨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친구들이 “너는 높은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내?”, “알토 음정 진짜 잘 맞춘다” 하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고음이나 음감을 훈련했던 것은 아니니 타고났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실 우리 아빠는 가수 활동을 하셨다. 차를 타면 아빠가 녹음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집에는 피아노도 있었다. 나는 아빠가 음악을 하기 위해 사신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가 그 피아노를 우리의 교육을 위해 사셨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침대도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던 당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엄청난 투자이자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나는 음악하기에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났다. 음악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우리는 마음의 부자야’라고 늘 우리를 격려하셨다. 돈은 없어도 웃음이 넘치는 집, 고성 대신 노랫소리가 있는 집. 자라면서 이런 환경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며 모두가 이렇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니란 걸 깨닫고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축복과 그로부터 받은 행복을 다시 음악을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채워주는 것이 내 삶의 의무가 되었다.
동생과 아버지, 그리고 나
학창 시절 내내 음악 과목은 늘 만점이었다. 특히 내게 가창 시험은 어렵거나 떨리는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로 학교를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작됐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은 큰 딸을 음악을 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는 상상을 못 하셨는지도. 하지만 엄마의 한마디는 분명 내 인생을 바꿨다.
“희야, 너는 노래도 잘하니까 피아노보다는 성악을 한번 해보는 거 어때?”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고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듣다 보니 나도 어릴 때부터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다. 그래서 거의 쉬지 않고 피아노를 배우며 피아노로 예고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사춘기가 지나면서 점점 현실의 벽을 마주했다. 그래서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내 목소리는 나만 가졌다는 데 희망을 걸었다. 만성 비염인 줄도 모른 채 나의 성악 인생은 만 15살 겨울에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개인 레슨을 받았거나 합창단 활동을 해왔거나 고3 때 시작했는데 기적처럼 대학교에 합격했다거나 하는 일들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도 레슨 선생님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며 피아노 대신 성악을 선택한 나는 이번에도 정말 큰 현실을 마주한다. 레슨비가 너무 비쌌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이탈리아에서 막 귀국하신 선생님과 연결이 되어 정말 큰 혜택을 받으며 레슨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날 지도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정적이셨고, 그렇게 나를 성악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은사님이시다.
성악 레슨은 3년간 이어졌다. 음대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야자의 기억보다는 레슨을 받으러 왕복 2~3시간을 다니고 지친 몸으로 밤늦게 귀가하는 기억이 전부이다. 레슨이 없는 날은 또 왕복 2시간 거리의 연습실을 다녔다. 하루라도 연습을 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돈이 없어서 연습실을 못 간 어느 비바람 부는 날에는 아무도 없는 중랑천 옆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점점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이 정도 실력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나 자신을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입시 한 달 전에 선생님을 바꾸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지금은 편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지만, 그 당시를 돌이키면 선생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대학 1학년 때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
그런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예상했던 학교에서 모두 낙방했다. 심지어 재수도 아니고 삼수까지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한 학교의 성악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학년 때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는데, 당시 남자 친구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1년 차 직장이었다. 반면 나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계속 돈을 쓰는 흔한 음대생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일을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줄곧 장학금을 받아 왔고 이미 3학년이었지만, 더 이상은 내 인생에서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판단하고 휴학을 감행했다. 사실 그건 성악을 아예 관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컸다. 나는 남자 친구를 따라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서 점심에 디저트까지 먹고 배가 불러서 오후에 바로 노래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내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노량진 학원 앞 노점에서 아침 영어 스터디에서 틀린 영단어를 곱씹으며 허겁지겁 덮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가 내 노래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이었다.
글·사진 | 강희

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op_hee_
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1
지금 난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다. 내일모레 있을 콩쿠르 본선 무대를 위해 아침 비행기로 이곳에 왔다. 내가 사는 체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성악가다. 사전에서는 성악가를 ‘성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음악가’라고 정의한다. ‘전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얼마나 숱한 나날들을 보냈던가. 나는 중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야 성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예고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성악 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작년 가을에는 유럽에서 성악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것도 체코 프라하에서, 그것도 체코어로 된 정규 과정에서 말이다.
페트르드보르스키 국제음악페스티벌에서 | 출처: 강희 인스타그램
우리 학교는 체코의 수도에 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음악학교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 학교의 졸업생 중 성악 전공을 한 한국인은 내가 최초이다. 아시아인 졸업생 자체도 나 외에는 다른 일본 사람 한 명뿐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유학을 체코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굉장히 무모한 도전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 체코에 입국을 하고, 어학원을 다니면서 어학 자격증을 따고,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기까지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 나는 체코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끔 지인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어떻게 그 낯선 곳에서 그렇게 잘 지내느냐고 놀란다. 타고난 긍정적인 성향 덕분은 분명하지만, 긍정성이 곧 무언가를 잘하는 능력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럽에서 보낸 지난 4년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잘 안다. 최초라는 수식어도 사실은 과분하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기에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 고군분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용기를 내어 나누어 보려 한다.
EP. 01 노래는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작은 합창단을 꾸려 지휘하시는 선생님이셨다. 성함도 아직 기억이 난다. 까치울초등학교의 안현옥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고학년 합창단 언니들에게 가르치는 노래를 가끔 우리에게도 알려주셨는데, 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슬방울’이라는 동요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와서 불러보라고 하셨다. ‘알알이 이슬 되어 이 아침을 밝혔구나~’라는 예쁜 가사가 있는 동요였는데, 나는 가사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핑계로 손을 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날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희가 불렀으면 참 잘했을 텐데.”
나는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학생이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의 집사님께서 노래를 해달라고 부탁하시면 숨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나였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크게 노래를 부른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눈여겨보셨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친구들이 “너는 높은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내?”, “알토 음정 진짜 잘 맞춘다” 하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고음이나 음감을 훈련했던 것은 아니니 타고났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실 우리 아빠는 가수 활동을 하셨다. 차를 타면 아빠가 녹음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집에는 피아노도 있었다. 나는 아빠가 음악을 하기 위해 사신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가 그 피아노를 우리의 교육을 위해 사셨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침대도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던 당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엄청난 투자이자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나는 음악하기에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났다. 음악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우리는 마음의 부자야’라고 늘 우리를 격려하셨다. 돈은 없어도 웃음이 넘치는 집, 고성 대신 노랫소리가 있는 집. 자라면서 이런 환경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며 모두가 이렇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니란 걸 깨닫고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축복과 그로부터 받은 행복을 다시 음악을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채워주는 것이 내 삶의 의무가 되었다.
학창 시절 내내 음악 과목은 늘 만점이었다. 특히 내게 가창 시험은 어렵거나 떨리는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로 학교를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작됐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은 큰 딸을 음악을 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는 상상을 못 하셨는지도. 하지만 엄마의 한마디는 분명 내 인생을 바꿨다.
“희야, 너는 노래도 잘하니까 피아노보다는 성악을 한번 해보는 거 어때?”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고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듣다 보니 나도 어릴 때부터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다. 그래서 거의 쉬지 않고 피아노를 배우며 피아노로 예고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사춘기가 지나면서 점점 현실의 벽을 마주했다. 그래서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내 목소리는 나만 가졌다는 데 희망을 걸었다. 만성 비염인 줄도 모른 채 나의 성악 인생은 만 15살 겨울에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개인 레슨을 받았거나 합창단 활동을 해왔거나 고3 때 시작했는데 기적처럼 대학교에 합격했다거나 하는 일들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도 레슨 선생님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며 피아노 대신 성악을 선택한 나는 이번에도 정말 큰 현실을 마주한다. 레슨비가 너무 비쌌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이탈리아에서 막 귀국하신 선생님과 연결이 되어 정말 큰 혜택을 받으며 레슨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날 지도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정적이셨고, 그렇게 나를 성악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은사님이시다.
성악 레슨은 3년간 이어졌다. 음대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야자의 기억보다는 레슨을 받으러 왕복 2~3시간을 다니고 지친 몸으로 밤늦게 귀가하는 기억이 전부이다. 레슨이 없는 날은 또 왕복 2시간 거리의 연습실을 다녔다. 하루라도 연습을 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돈이 없어서 연습실을 못 간 어느 비바람 부는 날에는 아무도 없는 중랑천 옆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점점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이 정도 실력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나 자신을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입시 한 달 전에 선생님을 바꾸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지금은 편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지만, 그 당시를 돌이키면 선생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그런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예상했던 학교에서 모두 낙방했다. 심지어 재수도 아니고 삼수까지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한 학교의 성악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학년 때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는데, 당시 남자 친구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1년 차 직장이었다. 반면 나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계속 돈을 쓰는 흔한 음대생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일을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줄곧 장학금을 받아 왔고 이미 3학년이었지만, 더 이상은 내 인생에서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판단하고 휴학을 감행했다. 사실 그건 성악을 아예 관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컸다. 나는 남자 친구를 따라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서 점심에 디저트까지 먹고 배가 불러서 오후에 바로 노래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내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노량진 학원 앞 노점에서 아침 영어 스터디에서 틀린 영단어를 곱씹으며 허겁지겁 덮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가 내 노래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이었다.
글·사진 | 강희
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op_hee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