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3
졸업이 다가오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하며 교육대학원을 갈 것인지, 시립합창단 오디션을 계속 볼 것인지, 성악 전공으로 대학원에 갈 것인지 기로에 놓였다. 유학은 선택지에 없었다. 오래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있었고, 금전적 부담은 학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어떤 길이 나에게 가장 행복할까 자문했다. 결론에 도달하는 데 다시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합창단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일을 하기도 했다.
교내 연주날
결론은 지도교수님께 노래를 더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흔히 “케미가 잘 맞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교수님과 나의 사이가 딱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갔고 그걸 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을 책임지는 교수라는 자리에서 여러 상황을 고려해 늘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모습도 든든했다. 무엇보다 그분이 음악과 인생을 대하시는 태도에 반해 있었다. 그러니 대학원에 간다면, 옵션은 단 한 가지였다. 모교 대학원에 가는 것. 성악과 교수님 중 한 분이 면접 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왜 다른 학교도 아니고 우리 학교를 선택하셨나요?”
“저는 제가 다녔던 학교를 너무 좋아하고 지금 여기에 계신 교수님들이 저에게는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순간 교수님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셨다는 걸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 좀 잘 봐주세요.’ 하는 아부성 멘트였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진심이 툭 튀어 나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먼 훗날 자랑스러운 선배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국내 석사 졸업연주회에서
대학원에 합격하자 시간은 학부생이었을 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수업 일수는 줄었으나 공부하는 양이 늘었고, 논문 준비까지 하느라 그때 얻은 허리 통증이 아직도 가끔 나타난다. 4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논문 제출과 졸업 연주까지 무사히 마치자 여지없이 졸업이 다가왔다. 이제는 유학까지 선택지에 놓였다. 그러나 노래를 정말 좋아하고 실력이 많이 늘었어도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가능하다고 해도 재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워하는 후배들에게 함부로 ‘도전해 봐’라는 말을 못 하겠다.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깊고 힘든 것인지를 알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유학을 떠나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는 지금 단계에서도 매일매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제 중(좌), 논문 심사 받는 날(우)
마침 상황이 조금 특별했다. 하필 그 시기가 2020년에서 2021년으로 넘어가는 때라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고, 나처럼 반드시 대면으로 일을 해야 하는 직종은 특히 취약했다. 출근하던 학원도 수강생이 현저히 줄어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개인 레슨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서 내가 정말로 잘하고 있는지 확인을 받고 싶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을 슬슬 떠보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에서든 나의 부재는 누군가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긍정으로 의견을 일치하셨고,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옆에서 함께해 준 남자 친구는 나의 가장 큰 지원자였다. 워낙 책임감이 큰 사람이라 본인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것 같은 상황을 꺼리기도 했지만, 연인관계를 떠나 나라는 사람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도리어 나를 강하게 설득했다.
유학 준비 중 학교 뒷산에 올라
“너처럼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걸 열심히 키워야 해. 그게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야.”
이 마음은 13년째 변치 않고 나의 가장 가까이에서 큰 용기를 준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가장 가까이에서 말이다.
이제 가족들의 허락도 맡았겠다, 교수님께 어느 나라로 가면 좋을지 상의를 드렸다.
“혹시 체코 어때?”
“체코…요…?”
정말 생각도 못 했던 나라였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체코에서 유학했다는 성악가는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 나라가 체코어를 쓴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체코로 왔기에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려 보면 당시 교수님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교수님께서는 여러 합당한 이유를 드시면서도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가볍게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그 흥미로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만약 내가 어릴 때부터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라면 달라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게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돌고 돌아온 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옵션을 고르는 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안 하니까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체코 유학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체코 작곡가 드보르작의 악보 공부
체코의 수도가 프라하라는 정도만 알았던 나는 체코에서 어떤 음대가 유명한지, 그 학교에 가려면 어떤 체코어 자격증이 필요한지, 다른 건 뭘 준비하면 되는지 차근차근 알아봤다. 유학원의 도움도, 지인 찬스도 쓸 수 없어 그냥 인터넷과 번역기에만 의존했다. 그리고 체코 음대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석사 재학생 중에서 소프라노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진짜 내가 이 학교에 들어갈 만한 실력인지 궁금했고, 실기시험을 보려면 반주자를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중 딱 한 명에게 답장이 왔는데, 친절하게도 나의 비디오에 매우 긍정적 의견을 보여주며 학교에서 나에게 추천할 만한 교수님과 반주자의 이름,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편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어과의 졸업생이신 선생님을 찾아서 개인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가 만 28살의 일이다.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고 할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벅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도 하고 레슨도 받고 공부까지, 그리고 곧 떨어져 지낼 걸 알기에 데이트까지 하려니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한국에서 재학 중 생일을 맞아
그리고 5월의 어느 날, 아무 지인도 없고, 소속된 곳도 없고, 비자도 없이 오직 에어비앤비 숙소 예약 하나만 들고 체코 프라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LOT 항공. 하도 지연이 잦아서 ‘Late Or Tomorrow’의 약자라고 불리는 폴란드 항공을 타고 난생처음 다른 나라로 출발했다. (그러나 가성비가 좋아서 이후로도 애용했다.)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수학여행 갈 때 탔던 게 다인데 처음 타보는 유럽 비행기라니.
폴란드항공 기내식
비행 내내 긴장이 됐다. 다들 알바 해서 일본이라도 다녀올 때 나는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외국살이에 적응을 못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첫 외국이 체코라니. 그것도 꼭 동화마을 같은 프라하에서 살 예정이라니. 여태 살아온 인생 중 두려움과 설렘을 최대로 느꼈던 시간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16시간쯤 되었을까?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해 체코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예약해 둔 택시를 탔다. 프라하 공항은 인천공항에 비하면 정말로 작은 공항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가 보이는 고속도로에 들어섰고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택시에서 어색한 영어로 와우, 어메이징, 쏘 뷰티풀을 반복했다. 정말 눈 깜짝할 새 프라하성이 보이는 블타바강을 지나 구시가지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꿈같았다. 공기부터 다른 느낌이랄까?
택시에서 바라본 첫 프라하
낡은 콘크리트 건물에서 호스트가 마중을 나왔다. 캐리어를 들어주는 호스트를 따라 숙소로 들어가던 찰나…
‘아니 이게 엘리베이터라고…?’
성인 둘이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에 지어진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소리 나고 느린 고철덩어리가 엘리베이터라는 이름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수세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도시 프라하. 그 중심의 구시가지에는 여행 프로그램에서만 보던 천문시계가 있다. 그리고 그 천문시계처럼 생긴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듯한 기름진 머리의 한국 여자아이는, 근처 허름한 건물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음악의 도시 프라하에서 파는 것
“와우...”
분명 택시에서 내던 감탄사와는 다른 뉘앙스.
호스트는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서와, 유럽은 처음이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의 무대가 될 도시의 첫인상은 이랬다. 2021년 5월의 프라하였다.
프라하성
글·사진 | 강희

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op_hee_
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3
졸업이 다가오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하며 교육대학원을 갈 것인지, 시립합창단 오디션을 계속 볼 것인지, 성악 전공으로 대학원에 갈 것인지 기로에 놓였다. 유학은 선택지에 없었다. 오래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있었고, 금전적 부담은 학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어떤 길이 나에게 가장 행복할까 자문했다. 결론에 도달하는 데 다시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합창단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일을 하기도 했다.
결론은 지도교수님께 노래를 더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흔히 “케미가 잘 맞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교수님과 나의 사이가 딱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갔고 그걸 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을 책임지는 교수라는 자리에서 여러 상황을 고려해 늘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모습도 든든했다. 무엇보다 그분이 음악과 인생을 대하시는 태도에 반해 있었다. 그러니 대학원에 간다면, 옵션은 단 한 가지였다. 모교 대학원에 가는 것. 성악과 교수님 중 한 분이 면접 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왜 다른 학교도 아니고 우리 학교를 선택하셨나요?”
“저는 제가 다녔던 학교를 너무 좋아하고 지금 여기에 계신 교수님들이 저에게는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순간 교수님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셨다는 걸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 좀 잘 봐주세요.’ 하는 아부성 멘트였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진심이 툭 튀어 나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먼 훗날 자랑스러운 선배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대학원에 합격하자 시간은 학부생이었을 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수업 일수는 줄었으나 공부하는 양이 늘었고, 논문 준비까지 하느라 그때 얻은 허리 통증이 아직도 가끔 나타난다. 4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논문 제출과 졸업 연주까지 무사히 마치자 여지없이 졸업이 다가왔다. 이제는 유학까지 선택지에 놓였다. 그러나 노래를 정말 좋아하고 실력이 많이 늘었어도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가능하다고 해도 재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워하는 후배들에게 함부로 ‘도전해 봐’라는 말을 못 하겠다.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깊고 힘든 것인지를 알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유학을 떠나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는 지금 단계에서도 매일매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제 중(좌), 논문 심사 받는 날(우)
마침 상황이 조금 특별했다. 하필 그 시기가 2020년에서 2021년으로 넘어가는 때라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고, 나처럼 반드시 대면으로 일을 해야 하는 직종은 특히 취약했다. 출근하던 학원도 수강생이 현저히 줄어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고, 개인 레슨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서 내가 정말로 잘하고 있는지 확인을 받고 싶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을 슬슬 떠보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에서든 나의 부재는 누군가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긍정으로 의견을 일치하셨고,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옆에서 함께해 준 남자 친구는 나의 가장 큰 지원자였다. 워낙 책임감이 큰 사람이라 본인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것 같은 상황을 꺼리기도 했지만, 연인관계를 떠나 나라는 사람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도리어 나를 강하게 설득했다.
“너처럼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걸 열심히 키워야 해. 그게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야.”
이 마음은 13년째 변치 않고 나의 가장 가까이에서 큰 용기를 준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가장 가까이에서 말이다.
이제 가족들의 허락도 맡았겠다, 교수님께 어느 나라로 가면 좋을지 상의를 드렸다.
“혹시 체코 어때?”
“체코…요…?”
정말 생각도 못 했던 나라였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체코에서 유학했다는 성악가는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 나라가 체코어를 쓴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체코로 왔기에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려 보면 당시 교수님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교수님께서는 여러 합당한 이유를 드시면서도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가볍게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그 흥미로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만약 내가 어릴 때부터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라면 달라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게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돌고 돌아온 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옵션을 고르는 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안 하니까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체코 유학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체코의 수도가 프라하라는 정도만 알았던 나는 체코에서 어떤 음대가 유명한지, 그 학교에 가려면 어떤 체코어 자격증이 필요한지, 다른 건 뭘 준비하면 되는지 차근차근 알아봤다. 유학원의 도움도, 지인 찬스도 쓸 수 없어 그냥 인터넷과 번역기에만 의존했다. 그리고 체코 음대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석사 재학생 중에서 소프라노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진짜 내가 이 학교에 들어갈 만한 실력인지 궁금했고, 실기시험을 보려면 반주자를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중 딱 한 명에게 답장이 왔는데, 친절하게도 나의 비디오에 매우 긍정적 의견을 보여주며 학교에서 나에게 추천할 만한 교수님과 반주자의 이름,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편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어과의 졸업생이신 선생님을 찾아서 개인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가 만 28살의 일이다.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고 할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벅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도 하고 레슨도 받고 공부까지, 그리고 곧 떨어져 지낼 걸 알기에 데이트까지 하려니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그리고 5월의 어느 날, 아무 지인도 없고, 소속된 곳도 없고, 비자도 없이 오직 에어비앤비 숙소 예약 하나만 들고 체코 프라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LOT 항공. 하도 지연이 잦아서 ‘Late Or Tomorrow’의 약자라고 불리는 폴란드 항공을 타고 난생처음 다른 나라로 출발했다. (그러나 가성비가 좋아서 이후로도 애용했다.)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수학여행 갈 때 탔던 게 다인데 처음 타보는 유럽 비행기라니.
비행 내내 긴장이 됐다. 다들 알바 해서 일본이라도 다녀올 때 나는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외국살이에 적응을 못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첫 외국이 체코라니. 그것도 꼭 동화마을 같은 프라하에서 살 예정이라니. 여태 살아온 인생 중 두려움과 설렘을 최대로 느꼈던 시간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16시간쯤 되었을까?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해 체코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예약해 둔 택시를 탔다. 프라하 공항은 인천공항에 비하면 정말로 작은 공항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가 보이는 고속도로에 들어섰고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택시에서 어색한 영어로 와우, 어메이징, 쏘 뷰티풀을 반복했다. 정말 눈 깜짝할 새 프라하성이 보이는 블타바강을 지나 구시가지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꿈같았다. 공기부터 다른 느낌이랄까?
낡은 콘크리트 건물에서 호스트가 마중을 나왔다. 캐리어를 들어주는 호스트를 따라 숙소로 들어가던 찰나…
‘아니 이게 엘리베이터라고…?’
성인 둘이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에 지어진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소리 나고 느린 고철덩어리가 엘리베이터라는 이름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수세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도시 프라하. 그 중심의 구시가지에는 여행 프로그램에서만 보던 천문시계가 있다. 그리고 그 천문시계처럼 생긴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듯한 기름진 머리의 한국 여자아이는, 근처 허름한 건물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와우...”
분명 택시에서 내던 감탄사와는 다른 뉘앙스.
호스트는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서와, 유럽은 처음이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의 무대가 될 도시의 첫인상은 이랬다. 2021년 5월의 프라하였다.
글·사진 | 강희
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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