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새내기 성악가][라이프] 체코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대, 그 높은 문턱을 넘기까지

2026-03-05


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4


괜찮아,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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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살게 된 첫 숙소는 신기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묵는 방에는 샤워실이 따로 있었지만 화장실은 공용이었고, 방 한 쪽에 전자레인지가 있는 자리가 부엌을 대신했다. 나는 숙소를 둘러보고 난 뒤에 대충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철푸덕 누웠다.


‘아, 내가 지금 외국에 있다니…. 그것도 첫 외국이 체코…?’


1년 전이라면 꿈도 못꿨을 상황이었다.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른다는 게 이런 거란 말인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프라하에 도착하면 읽으려고 참았던 가족들과 남자친구, 그리고 은사님의 편지를 캐리어에서 꺼냈다. 출국하기 직전에 받은 것들이었다. 그 편지들을 읽는데 눈물이 났다. 고마움과 막막함이 섞인 몇 방울의 눈물이 편지 위에 떨어져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이 눈물자국을 보며 웃을 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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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다음 날, 숙소 창가를 바라보며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은 늘 하던 것이라 혼자 지내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하러 온 사람으로서 앞으로 해 나가야할 일들이 막막했다. 한국에서 빠르게 기초는 배우고 왔지만, 어느 정도 말을 할 줄 아는 것과 내가 원하는 수준의 자격증을 마감 기한까지 따야하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체코 교수님께 레슨도 받아야 하며 실기시험까지 준비해서 무사히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차라리 다른 나라였으면 조금 덜 막막했을까? 성악 유학생들이 유학을 많이 가는 독일 같은 경우 각 지역마다 음악대학교가 있다. 그래서 소위 ‘입시여행’이라고 해서 기차를 타고 여러 지역을 돌며 실기시험을 보기도 한다. 물론 전 세계에서 유학생이 오는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체코도 성악전공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적다는 면에서는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나에게 선택지는 수도인 프라하와 제2의 도시인 브르노에 있는 학교, 딱 두 곳뿐이었다. 심지어 나는 프라하에 있는 음악학교에만 도전할 생각이었다. 만약 떨어지면 말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막막한 생각 속에서 편지를 다 읽어가던 즈음, 혹시나 하고 뒤집어 본 남자친구의 편지 마지막장 뒷면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힘들면 그냥 돌아와, 내가 다 책임질게.’


정말 그 사람다운 멘트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물러나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 덕에 2021년 5월부터 현재까지 나는 이 낯선 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정말로 가고 싶으면 내일이라도 비행기 표 끊어서 갈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진짜로 안 되겠으면 돌아가자.’ 이 말은 누군가 나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하는 답변이 되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유럽, 체코, 프라하에 적응하기


첫 숙소에서의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는 처음 만난 유럽 마트였다. 정말 다양한 치즈, 요거트 등의 유제품들을 맛보며 신세계를 경험했고 체코의 질긴 소고기에 된통 당한 날도 있었다. 이곳의 소는 우리나라처럼 지방이 많이 없어서 주로 푹 끓여 먹는 요리가 많다. 한국인들에게는 갈비찜처럼 보인다는 굴라쉬(Guláš)가 대표적이다. 그것도 모르고 그 질긴 고기를 스테이크처럼 구워먹으려고 샀다가 턱 근육이 빠질 뻔한 일화는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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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모르고 샀던 소고기와 냉장고가 없어서 양조절을 실패했던 요리의 추억


마침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연습실이 숙소 근처라 도착한 첫 주부터 연습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또, 역시 한국에서 미리 연락이 닿은 반주자님과 내가 진학하고자 하는 학교의 교수님을 만나 한국에서의 석사 졸업연주 레퍼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주할 기회도 갖게 됐다. 유럽은 음악학교를 들어가려면 미리 그 학교 교수님과 연락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 교수님이 학교에서 자신의 제자로 받아줄 수 있느냐 마느냐는 이런 사전 레슨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된다. 한국에서 석사 졸업연주 할 때 불렀던 40분이 넘는 레퍼토리를 다 들으신 교수님께서는 정말 신기하단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체구로 이 길고 어려운 레퍼토리들을 다 소화할 수 있지? 정말 흥미롭구나. 분명 다른 교수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그리고 나에게 지금 네 실력으로는 학교보다는 극장으로 가야할 거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한국의 성악교육이 세계적이라고 하더니 한국에서 성악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처음으로 그 말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교수님께서는 오페라 극장에서 여는 프라이빗 오디션을 추천해 주셨고, 다른 나라에서 운영하는 극장의 오페라스튜디오에 도전해 보라는 격려도 해주셨다. 오페라스튜디오란 인턴과 비슷한 제도이다. 프로페셔널한 오페라 가수가 되기 전에 극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교육생으로 지내는 프로그램인데 나라와 극장마다 급여나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성악도들이 가장 밟고 싶어 하는 경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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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실제로 나는 두 군데 정도의 오페라스튜디오에 도전을 했었는데 한 군데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한 군데에서는 2차에서 떨어졌다. 교수님이 제안해 주셨던 극장 오디션도 미리 보내야 하는 내 오디션 영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도전하지 못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교수님의 칭찬에 마음이 들떠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연이은 도전에서 일이 잘 안 풀리자 여태껏 잘 숨겨왔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바싹 다가왔다. 나는 우선 학교 입시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이도저도 안 될 바에야 원래 목표에 충실하는 것이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일 같았다.


나는 체코어 공부와 노래 레슨에 집중하며 서서히 체코 생활, 아니 프라하 생활에 적응했다. 그 사이 이사도 몇 번 다녔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숙소는 어학원 숙소였는데,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베드버그에 물리기까지 했다. 화장실과 샤워실, 주방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화장실과 샤워실에 남녀 구분이 없는 것은 한국에서 온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남녀공용 화장실의 깨진 변기와 열려 있던 샤워실 반투명 유리문에 비쳤던 남학생들의 뒷모습은 알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fcaf12a4b2a4.jpg허름한 어학원 기숙사


그렇게 서서히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의 조화는 더없이 아름다웠으나 길을 걸으면 마주치는 노상방뇨 현장과 출처를 모를 이상한 냄새들은 유럽의 이면을 보여줬다. 짜고 냄새난다고 생각했던 치즈도 어느새 입에 맞았고, 자극적인 맛이라 몇 개 먹지 못했던 감자칩은 어느새 한 봉지를 순식간에 비울 정도가 되었다. 어학원, 도서관, 연습실을 다니며 늘 일정한 생활 패턴을 유지했고, 그렇게 평일을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교회에 가서 한국사람들도 만나고 한식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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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프라하 풍경


어느덧 어학원에서 두 학기를 보내게 됐다. 체코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감사하게도 입학 일정에 맞춰 체코어 B1 어학자격증을 취득했다. 또 학교에서 보는 실기시험에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중에 교수님께로부터 들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입학 실기시험에서 수석이었다고 한다. 체코 음악의 핵심 커뮤니티이기도 한 가장 권위 있는 음대에 이렇게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다니! 심지어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까를교와 프라하성 사이에 위치한 학교라 매일 매일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마주하니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결국 해낼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 긍정적인 성격 안에 숨겨져 있던 안일함이라는 녀석이 나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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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시험을 마치고 학교 복도에서 한 컷




글·사진 | 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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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op_he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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