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여행] 같은 듯 다른 듯, 브라티슬라바의 아시아인들

동으로 가는 길목 #6



1996년. 3월 중순 파리의 날씨는 우중충함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우울함을 집어삼킨 듯이 오후 3시의 이 어둑어둑한 파리 시내를, 나는 내 몸집보다 한 뼘이나 더 높은 구식 등산용 배낭을 멘 채로 파리 메트로 역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 당시 유행했던 소위 ‘배낭여행’ 중이었던 나는 아직 어리바리하고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1996년 파리 외곽 주택가 메리 디브리Mairie d’Ivry 지역. 유학생들과 태권도 체육관들이 모여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파리 북역Gare du Nord에 도착한 나는 메트로역을 찾아 들어갔다. 이제 7호선을 타고 메리 디브리Mairie d'Ivry역에 가야만 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에게 받았던 민박집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


파리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자신의 작업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여름휴가철 아르바이트 삼아 민박을 하고 있다고, 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기분 좋으면 라면도 끓여 준다고 한다.


당시는 한인 민박집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그동안의 숙소가 유스호스텔과 장거리 이동구간의 기차 안이 대부분이었던 나에게 머나먼 타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을 만난다는 게 여간 설레지 않았다.


너무나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파리의 뒷골목 길모퉁이에서 하이델베르크의 한국인 여행자가 광고지 뒷면에 대충 그려준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내 앞에 웬 동양인 아저씨가 신라면 박스를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찾으세요? 유학생 민박집 찾으세요?”


한 달만에 들어보는 한국말이었다. 유학생 민박집 옆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태권도 사범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민박집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모두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그 모습에서 안도감과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한국인과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야릇한 떨림이 있었다.


지금 이곳 브라티슬라바에도 제각기 사연을 가진 아시아인들이 눈에 띄지 않게 각자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나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인을 보면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며 ‘남의 나라에서 기죽지 말고 잘 살자고요.’ 무언의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   *   *


3년 전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아파트 앞 공원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나에게 한 동양 여자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너, 저기 앞 아파트 C동에 살지? 나 너희들 알아. 너 한국 사람이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다는 베트남 여학생 Lihn. 유재석과 런닝맨의 팬이라고 했다. 그녀는 하노이 출신으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슬로바키아에 넘어온 지 10년이 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활고가 찾아왔고, 마침 슬로바키아에서 네일숍을 하고 있는 사촌형제들의 초청으로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10대 소녀지만 너무나 어른스럽고 생활력이 강해 한인잡지 표지모델, 한국 레스토랑 등에도 소개를 해 주었다. 슬로바키아어, 영어, 독일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 친구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고, 한국식 제과점을 콘셉트로 조만간 슬로바키아에 제과점을 오픈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Lihn에게 응원을 보내며!


동유럽 한인잡지 ‘코리안라이프’의 표지모델 및 슬로바키아 무역박람회장에서 베트남 홍보대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슬로바키아의 한국인들이 마음속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레스토랑은 한국 식당도 일본 식당도 아닌 중국 식당 ‘자스민Jasmin’일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슬로바키아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열악한 시절. 몇몇 한국인 주재원이나 출장을 온 사람들에게 그나마 우리 입맛에 비슷한 사천식 중국 음식으로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가운데가 Linda Ching. 타이완에서 온 린다는 한국 식당보다 더 한국의 향수를 달래준다.


언젠가부턴 김치, 소주, 한국식 짜장면 등이 메뉴에 올라가 있었고, 이내 한국의 정마저 느끼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이 주 고객층이 되어 버렸다. 영업시간 종료를 앞두고 급하게 고객 접대를 하게 된 한국인을 위해 퇴근을 미루고 주방을 풀가동해 주었던 이야기는 이곳 한국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정감 어린 추억이다.

2000년대 초반 당시 학교를 마치고 식당에서 숙제를 하던 그녀의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레스토랑 경영에 관여하고 있고, 주방보조로 힘을 보탰던 남편은 시내 중심부에 또 다른 레스토랑을 오픈하였다. 만취해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그저 한국 음식이 있는 중국 식당이 아닌 그 이상의 안식처로서 각인되어 있다.

가녀린 외모이지만 단단하면서 믿음직스러운 우리의 친구 ‘린다’


낡고 오래된 외관과 깔끔하고 정갈한 실내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작년 초, 집 근처에 푸드 코트가 들어섰다. 주로 지역주민과 인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점심 비즈니스 건물이다. 베트남, 인도, 태국 등 아시아 음식과 멕시코, 수제 햄버거, 슬로바키아 전통음식, 스테이크 등 전세계 음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 와중에, 한쪽 구석에 아주 작은 일본 라멘집이 있다. 처음 그곳에 들른 날, 남녀 일본인 3명이 현지인에게 제작과 서빙 교육을 하면서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종종 그 집을 드나들며 그들과 눈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그 집은 슬로바키아인들이 경영하기 시작했고, 역시 맛도 바뀌어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지난달 즈음. 그날 점심은 시내에 있는 일본 가정식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가끔 이용하곤 하는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 자리를 찾으러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가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최라고 합니다만…….”

“아! 맞다 최 상이었죠. 저예요, 푸드코트 라멘 집에서 일했던…….”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온 엔도


그녀의 이름은 ‘엔도’. 라멘 식당 일을 그만둔 뒤 원래 직업인 화가로 돌아가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고양이 전문’ 화가였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꽤 많았다. 슬로바키아에 처음 도착하여 비자를 받은 해가 2005년이라든가, 브라티슬라바에 은행 론으로 집을 구입해서 최근에 모두 완납을 했다든가, 슬로바키아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던가 하는. 일본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슬로바키아에 온 이유까지는 모른다. 그저 처음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IBM에서 ‘Japanese Desk’로 비자를 받았고, 퇴사하면서 라멘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지금은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했다.


주 수입원은 고객이 직접 가격을 책정해서 작품 의뢰를 해 오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100유로짜리로 고양이 5마리가 나오는 작품 A4 사이즈로 만들어 주세요.”라거나, “우리 카페에 어울릴 만한 엽서를 고양이 디자인으로 만들어 주세요.” 같은. 유럽뿐 아니라 한국, 일본에서도 주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일본 영화 아니 일본 소설 속 여주인공 같았다. 그녀가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를 바라길 응원하며!


브라티슬라바 주택가에 위치한 그녀의 작업실. 항상 고양이와 함께 한다


브라티슬라바 고양이 카페에서 사용되는 홍보엽서 디자인들. 더 많은 작품감상은 아래 주소에서.
https://www.facebook.com/pg/cimipainter/photos/?tab=albums




글/사진 최동섭

슬로바키아 14년차로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 근무 후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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