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여행] 아그리젠토, 그리스 신전을 만나다.

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 #6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섬으로 외세의 침략이 워낙 잦아 아프리카, 아랍, 이슬람, 그리스 등 다양한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리스 문화뿐만 아니라 신전 유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장소들이 곳곳에 있는데 우리는 대표적인 셀리눈테(Selinunte), 세제스타(Segesta), 아그리젠토(Agrigento)를 모두 방문했다. 오늘은 규모가 가장 크고 방문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아그리젠토를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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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태양이 내리쬐는 시칠리아에서도 농지가 비옥하기로 유명하여 다양한 작물들이 자라는 아그리젠토로 가는 길에는 너른 밀밭과 알록달록한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기원전 582년에 건설된 고대 그리스 도시, ‘신전의 계곡(Valle de Templi)’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는데 시칠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유네스코로 지정되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한 달 여행으로도 시칠리아를 깊이 살펴보기 부족할 만했다.



덩그러니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신전의 계곡’ 유적지는 입구가 여럿 있으므로 미리 입구와 주차장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는 모습은 지금은 무너져버린 그리스 신전의 부산물들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주인 행세를 하는 개들이었다. 관광객들은 유적지보다 개에게 더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헤라, 콩코르디아, 제우스, 헤라클레스 등 신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신전들은 많이 훼손되어 돌덩이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소가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콩코르디아 신전만큼은 시칠리아가 기독교화 되었을 때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덕분에 많은 관광객의 가장 유명한 사진 포인트가 될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를 다루는 여행 책자, TV 프로그램의 대표 이미지로도 많이 사용된다. 강인숙 선생이 그의 저서에서 아그리젠토의 콩코르디아 신전을 마주했을 때 “광대한 천지에 홀로 서 있는 신전 하나가 거대한 도시와 맞먹는 듯 웅장하여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서술했는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신전 앞에서 감탄을 내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스보다 그리스 신전 유적을 더 완벽에 가깝게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시칠리아라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유적을 이곳에서 만나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샘이 나서 다시 돌려달라고 떼쓰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신전의 계곡 끝자락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눈부시게 투명한 푸른빛 바다가 햇살을 머금은 채 반짝이고, 노란색 신전 사이사이 올리브 나무가 머리카락처럼 가지를 휘날리고 서 있다. 인간들은 인간이 만든 신전 앞에서 마치 진짜 신을 본 것처럼 존경과 감탄 섞인 눈길을 보낸다. 북으로는 너른 벌판을, 남으로는 지중해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에 건설된 고대 그리스 도시는 지금은 인간들이 사는 도시의 발밑에 있다. 우리는 신전의 계곡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더 높은 언덕,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아그리젠토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숙소에서 내려다보면 신전의 계곡이 발밑에 펼쳐지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신전의 계곡에서 올려다보던 인간들의 마을과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계곡에서 바라본 아그리젠토


아그리젠토에서 내려다본 신전의 계곡


아그리젠토 마을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 밀집도가 높아 어마어마하게 높은(그래봤자 15층 정도) 건물과 빼곡히 불법 주차된 차량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무료 주차장은 물론이고 유료주차장도 한참을 돌다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중심 광장에 도착하자 신전의 계곡과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세련된 분위기의 식당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크리스마스가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성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조명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저녁이 되자 노란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내 의지대로 길을 걷기조차 힘들었다. 서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젤라토를 먹거나 쇼핑 봉투를 하나씩 들고 재잘재잘 소리를 내며 커다란 보폭으로 바쁘게 걸어 나갔다. 모두가 벅차게 행복한 표정이었으나 나만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발밑에는 다 쓰러져가는 그리스 신전을 두고 인간들은 높은 건물 사이에 틈틈이 자기 공간을 마련하여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곳이 내가 사는 세상임을 깨달았다. 불빛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이곳은 마치 불이 꺼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같았다. 잔뜩 멋을 부렸으나 신들의 도시가 가지는 웅장한 분위기까지는 흉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글/사진 김혜지(이태리부부)

파리, 로마를 거쳐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기록하고 콘텐츠를 생산해 내며 삶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투브 채널 '이태리부부' 운영 중. 『이탈리아에 살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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