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겨울의 비엔나에서 만난 음악과 미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살다 보면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데 순응하게 된다. 프라하에서 체스키로, 체스키에서 잘츠부르크로 닷새 만에 세 도시를 보겠다고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쌓이는 피곤에 비엔나에 대한 기대는 가벼워졌다.


사람에 대한 환멸과 스트레스로 피폐해진 나의 영혼을 달래고자 습관적으로 들어간 항공권 검색 앱에서 나도 모르게 특가 항공권을 결제했다. 특가라 환불도 안 된단다. 그럼 어쩌겠는가, 비행기에 몸을 실어주는 수밖에.


2018년 쿠바 여행을 기점으로 나의 MBTI는 선택적 ‘J’가 된 듯하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준비한 것이라곤 프라하 3일 숙소 예약 밖에 없었다. 머물렀던 프라하 한인 민박집에 휴가차 오신 사장님 친구분이자 전직 가이드께서 각자 여행 온 우리 방 3명의 여성 동지들을 이끌고 프라하 구석구석을 탐방해 주셨다. 체스키는 워낙 작은 도시여서 볼 곳이 딱 정해져 있었다. 잘츠부르크는 순전히 모차르트 때문에 들른 거라 금방 목적을 다하였다.



그런데 비엔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모를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 비엔나로 가는 기차에서 벨베데레와 쇤부르크 궁전, 구시가지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동유럽이라고 해야 할지 서유럽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게 잘 사는 나라, 클래식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오스트리아의 역사나 지정학적으로 유럽사에 끼치는 영향력 등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투어 가이드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굉장히 많이 언급했는데 그들은 정략결혼을 통해 자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수백 년 간 근친혼을 하며 주걱턱 같은 유전병으로 고생했으나 “다른 이들은 전쟁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니,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무섭다. 특히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서 본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온갖 전시품과 미술품은 경외감을 넘어서 약간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매번 여행을 다니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조상을 잘 두면 후대가 대대손손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앞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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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벨베데레 궁전을 찾는 이유는 단언컨대 클림트의 〈키스〉를 보기 위함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림트의 황금빛에 나의 눈을 물들일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내 돈 쓰고 고생해서 누리는 여행의 맛 아니던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


벨베데레 궁전에는 클림트의 작품뿐만 아니라 클림트에게 영향을 받은 - 그를 추앙했던 - 문제적 작가 에곤 쉴레의 작품도 많았다. 실제로 클림트와 주제는 같지만 에곤 쉴레만의 스타일로 그려낸 몇몇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 롤 모델을 추앙하다가 결국 자기만의 화법과 스타일을 찾는다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의 바람직한 항로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에곤 쉴레는 똑똑한 예술가였던 거 같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엄마와 두 아이〉, 에곤 쉴레의 〈어머니와 두 아이들〉


특히 놀랐던 것은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보았던 에곤 쉴레의 초창기 작품들이었다. 퇴폐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면이 전혀 없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미술학도의 그림이었다. 짧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화풍의 변화는 본연의 그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을까, 아니면 인생의 굴곡과 시대의 흐름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이 두 예술가에게는 작품에 흐르는 본능적 에로티시즘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자유분방한 연애사,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것까지 평행이론처럼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이렇게 비슷한데 저렇게나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생에 있어서 같은 시대, 같은 사건, 같은 불행과 영광을 겪어내면서도 각자 삶의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실로 무한하고 다양한, 인간이라는 함수 F(x)의 알고리즘 때문에 두 예술가 사이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본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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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하는 나는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그곳의 라이브 클럽을 경험하려 한다. 비엔나에서 고른 곳은 ‘ZWE’라는 곳이었는데, 이름은 ‘Jazz We’에서 비롯됐다 한다. 비엔나의 관광 중심지인 슈테판 대성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빈시가지 야경


슈테판 대성당 앞은 우리나라의 명동 성당 앞에 홍대나 강남 거리가 펼쳐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온 시민들, 그리고 나 같은 관광객들로 매우 붐비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한 달이나 남았음에도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유럽인들이 세운 커다란 트리 덕분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내장을 보관해 놓은 항아리와 흑사병 때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이 지하에 잠들어 있는 슈테판 대성당에 비친 조명과 그 주위에서 들뜨고 행복해 보이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한 화면에 담으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슈테판 대성당 앞에서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작은 다리를 지나 목적지인 클럽에 도착했다. 클럽은 여기가 맞나 싶어 그냥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 간판을 내걸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벽이 온통 재즈 악보였다. 조그만 무대에 4줄 정도의 객석이 보이고 그 반대편으로 바가 있었다. 4~5명의 중년 외국 남자들이 혼자 혹은 둘씩 앉아 있었고 2열 중간에 자리 잡은 나에게 바텐더로 보이는 여성분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한두 명씩 더 들어오더니 이내 좁은 클럽이 꽉 찼다.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다.


비엔나의 라이브클럽 ZWE


오늘의 공연은 ‘Kristian Lind’라는 베이스 연주자의 트리오 공연이었다. 피아노와 드럼에 앉은 연주자는 젊어 보였고, 베이스 연주자는 시니어 급의 연주자로 보였다. 주로 베이스 연주자의 창작곡 위주로 진행됐는데, 중간 중간 곡 설명을 해 주었다. 젊은 여성 재즈 피아니스트는 정통 스윙이라기보다는 브래드 멜다우 느낌의 지적인 솔로 연주를 들려주었고, 드럼 연주자 또한 각각의 솔로에 잘 반응하여 다이내믹을 만들어주었다. 세 사람의 인터플레이가 듣기 좋았다.



2부 공연은 잼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베이스 주자를 중심으로 피아노 연주자와 드럼 연주자가 바뀌었고, 트럼펫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와 〈All the Things you are〉, 〈Stella by starlight〉 등 익숙한 스탠다드 재즈곡을 들려주었다. 이때쯤 관객들 사이로 자유롭게 공연비를 걷는 모자가 마치 교회 헌금 주머니처럼 돌아다녔다. 서울 상수동에 인디 뮤지션들이 즐겨 연주하는 ‘제비다방’도 이런 시스템을 지녔는데 내가 그곳에서 공연 후 받았던 개런티를 생각해 성의껏 페이를 했다.


이후 피아노 연주자가 다시 바뀌고, 무대 위에 또 다른 트럼펫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가 올라왔다. 무슨 곡을 할지 무대에서 짧게 얘기하다가 서로의 신호로 엔딩을 맺는 모습이 마치 학교 앙상블 느낌도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에 올라온 연주자들이 거의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베이스 연주자가 학교 선생님이라 학생들의 무대 경험을 더해줄 겸 이 클럽에서 잼 세션을 여는 듯했다. 그들의 연주는 나이에 비해 모두 훌륭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지하 클럽에서 서툴지만 열정적으로 연주했던 나의 지난날을 상기시켰다. 


ZWE의 무대


그러고 보니 일주일 넘게 한국의 뉴스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심란하고 답답한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새로운 경치와 풍경에 매혹 당해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내가 다소 우습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여행에 ‘여기서 잠깐 스톱’의 효능이 있다는 점에서 분명 나의 영혼은 회복되고 있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생경한 빈의 지하철로 향하며 ‘아! 내가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다시 느꼈다. ‘언제까지 이 직업을 계속 할 것인가?’ 코로나 기간 내내 빈곤했던 창작 활동으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에 답을 얻은 것도 같았다.





글/사진 고진수(뮤지션 로켓트아가씨)

싱어송라이터. 싱글 《노래나 부르자》로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하여 정규 《Chapter_01》, 싱글 《Lady Rocket》, 《눈이 부시게》, 《자니? 잘자!》, 드라마 〈러;브로큰〉OST인 《러;브로큰》  등을 냈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oul_of_r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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