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 비엔나][여행] 왜 비엔나에 살게 되셨어요?

하루 한 잔 비엔나 #2



왜 비엔나에서 살게 되셨어요?


 2009년부터 비엔나에 살았어요, 라는 대답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되묻는다. 왜 비엔나에 살게 되셨어요?

 


처음부터 비엔나에 살 생각은 없었다. 이민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남들보다 일찍 유학을 떠나왔고, 독일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내려왔는데 뭔가 여기가 더 편한 느낌이라 일 년, 이 년 살다 보니 어느새 14년 차에 접어들고 있달까.

 

그 긴 이야기가 번거로울 때는 그냥 “전공이 음악이에요.” 하고 말한다. 그러면 대체로 “아!” 하는 공감이 돌아온다. 비엔나가 괜히 음악의 도시가 아니다.

 


2006년, 제주도 한 번 가보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월드컵으로 들썩이던 독일에 입성했다. 유학이었다. 겨울이 되자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와 야심 차게 야간 기차를 탔다. 첫 행선지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였다.

 

왜 비엔나였지? 왜 하필 비엔나로 떠났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23일 밤 기차를 탔다는 것, 24일 비엔나에 도착했다는 것, 우리 앞에 펼쳐진 비엔나의 크리스마스는 너무나도 고요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때는 크리스마스의 유럽이 그야말로 ‘닫힌 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적북적한 한국의 크리스마스만 생각했던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른 아침 트램을 타고 도착한 음악가의 중앙묘지를 걸으며 “묘지에서 산책을 하다니!”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곳의 고요함이 너무 좋아 “나도 죽으면 여기에 묻혔으면 좋겠다” 웃었는데, 그때의 내가 상상이나 했을까. 3년 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중앙묘지를 매일 산책하듯 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그 해, 문 닫힌 케른트너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 프라우엔후버*’가 지금은 지인들과 손쉽게 찾는 장소가 되리라는 것을. 흔들리는 셀카로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미술사 박물관이 지금은 연간회원권을 끊어 자유로이 다니는 곳이 되리라는 것을. 2006년의 나는 정말 상상이나 했을까.

 

독일에서 지낸 3년이 힘들거나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왠지 다른 나라를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무작정 들었다. 스위스도 괜찮았다. 하지만 마침 독일 남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투리도 비슷하지!” 하는 생각으로 오스트리아행을 결정했다. 이사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2009년부터 오스트리아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키면 나의 ‘첫 해외 여행지’가 비엔나였다. 그 의미가 더 특별하게 와 닿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비엔나 생활 중에 남편을 만났고,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코로나라는 상상도 못할 대 위기를 겪었고, 출산이라는 터닝포인트를 거쳐 지금은 비엔나의 집 거실에서 타자를 치고 있다. 등 뒤에서 고양이가 고롱고롱 겨울 햇살을 만끽하는 소리를 들으며.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비엔나 라이프

 

어렸을 적 부모님은 다양한 가게를, 주로 먹는 것 위주로 차리셨다. 참기름 짜던 가게도 어렴풋이 기억나고,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통닭집으로 연결되던 작은 집도 생각난다. 그리고 마지막 내 기억에 남아있는, 큰삼촌네와 함께 꾸려왔던 시장 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동네 슈퍼. 외할아버지도 내가 다녔던 중학교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셨다. 통닭집에 슈퍼집 딸, 게다가 분식집 손녀라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어린 시절이었다.

 

남동생과는 애증의 관계였다.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 유학길에 올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내 기억 속의 동생은 아주 어릴 적에 멈춰있다. 나보다 작은 키에 삼촌 댁에 갈 때에도 초인종을 혼자 누르기 싫어 내 뒤에서 쭈뼛거리던. 이제 30대 중반이 가까워진 동생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훌쩍 커진 키에 아주 능글맞고, 넉살이 백배가 되었다. 동생은 자동차 관련 공부를 했고 현재는 기술직으로 항공사에 취직을 했다. 비행기 장난감 하나 날려 본 적도 없는 녀석이 항공사라니, 굉장히 의아했지만 동생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 사는 딸네 부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야하는 부모님도 직원 가족 할인을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 사진 작업


나는 지독한 김치파였다. 그것도 묵은지. 신맛이 터져 반찬으로도 못 먹겠다 싶을 정도로 푹 익어버린 김치는 모조리 우리 집에 왔다. 어릴 때에도 간식 대신 밥 없이 배추김치 꽁무니를 입에 넣고 사탕처럼 우물우물거렸다. 그런 사람이 ‘하루 세끼 빵과 고기와 감자’를 먹는 바다 건너 나라에서 산다고 했을 때, 가족이며 친척까지 “쟤가 김치를 못 먹어서 어떻게 버티나”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김치를 간식으로 입에 달고 살던 아이는 커서 비엔나에서 한인마트 매니저와 유통업까지 함께 하는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프로포즈 중에는 “살면서 음식 걱정은 없게 할 것”이라는 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비엔나 집 냉장고에서도 김치가 떨어질 날은 없다. 2020년, 코로나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던 락다운 시기에도 남편은 생필품 분야에 종사하는 덕에 단축 영업이나마 마트 문을 매일같이 열 수 있었다. 쌀과 라면 사재기 현상이 있었음에도 그의 프로포즈대로 집에 쌀과 라면 떨어질 일은 없었다.

 

남편이 일하는 한인마트


남편과는 통성명한 지 한 달 만에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7개월 후에 혼인 신고를 올렸다. 결혼식은 연애 1주년에서 며칠 더 지난 날이었다. 스냅 작가로 활동하는 나는 결혼사진도 직접 찍었다. 비엔나 스냅으로 드레스 대여까지 하고 있기에 촬영 드레스도 차고 넘쳤다. 남편을 만나기 훨씬 전에 “결혼 안 하면 입은 채 땅에 묻히겠다”며 몇 년간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구매했던 베라왕 드레스는 혼인신고하고 돌아오던 비행기 편에 가져와 코르셋으로 리폼한 뒤 입었다. 청첩장의 일러스트는 미술을 전공한 시누이가 그렸다. 청첩장 디자인도 직접, 인쇄도 직접 했다.

 

결혼식 장소도 시어머님이 남편 어릴 때부터 다니시던 동네 성당이었다. 그야말로 단독으로 빌려 동네잔치처럼 결혼식을 올렸다. 시어머님께서 주춧돌 나를 때부터 함께 쌓아올린 성당이기도 해서 아들이 내심 여기서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셨다는데, 나 역시 웨딩홀 말고 무조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겠다는 로망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의 결혼은 마치 누군가 미리 정해 놓은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드레스부터 소품까지 셀프 웨딩 작업


게다가 비엔나에서 만나 10년 넘게 진심으로 사귄 소중한 지기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한 명은 남편의 거래처 한식당의 오너, 또 한 명은 안목을 살린 앤티크 전문가로 나의 비엔나 스냅들을 희귀하고 아름다운 콘셉트로 꾸며주고 있다. 이제는 정말 비엔나를 뜨고 싶어도 뜰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지인의 앤티크 소품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운명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아귀가 맞으려고 그 모든 일이 있었나? 이젠,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국에 자주 가지는 못한다.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은 힘들다. 스냅 촬영 때문에 2시간 정도 걸리는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만 다녀와도 비행기 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다. 게다가 2살짜리 꼬마 아들도 생겼으니 3년에 한 번 오르던 한국행은 더 뜸해질 것 같다.

 

그래서, 그만큼 비엔나가 좋으세요?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진심으로 대답할 것이다. 네, 좋아요. 어떤 점이 좋은지는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토요일 저녁부터는 쇼핑도 못하고, 김밥천국도 없고,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도 아니고……. 그러나 나는 비엔나가 좋다. 걷다가 시선만 살짝 돌리면 보이는 비엔나의 오래된 골목이 좋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하나둘 켜지는 주황색 조명이 좋다. 나비넥타이에 정장 조끼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은 쟁반에 날라오는 작은 커피잔과 물 한 잔이 좋다. 사람들의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낡은 나무 테이블과 시간이 흘러 빛바랜 소파 위로 내리쬐는 창가의 햇살도 좋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엔나에서 살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비엔나를 좋아하면서.

  

 

* 카페 프라우엔후버: 18세기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방에서 직접 연주를 했고, 1791년 모차르트가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으로 공개 연주를 한 장소를 1891년 현재의 레스토랑으로 오픈하였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여기저기 다니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일 벌리기도 좋아하지만, 잔잔한 음악 틀어두고 집에서 작업하는 것도 좋아한다. 언젠가 사진을 담은 책을 내어보고 싶다. 오늘도 스냅을 찍고, 클래식을 듣고, 글을 쓰고, 엄마껌딱지 아들과 성격 정반대의 남편과 느긋한 두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비엔나에서 살아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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