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삶으로]길 위에서 만난 인연 #1

여행에서 삶으로 #1



아침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만큼만 어두운 시간, 마드리드Madrid행 기차에 올랐다. 요 며칠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건지. 이방인으로서 이곳 스페인에 얼마나 더 머무를 수 있을까. 다양한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어느덧 바르셀로나Barcelona가 일상이 되어서였을까? 일단 바르셀로나를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친구에게로 향했고, 그곳에서 함께 자동차를 렌트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운전면허증이 없었기에 스페인에서도 기차나 버스만 이용해 봤지 이렇게 자동차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앞에 말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이 한국의 다섯 배라는 스페인이란 게 조금쯤 실감이 났다.


첫날 목적지는 부르고스Burgos였지만 몇 시에 도착하든 상관없었다. 지도를 따라 가다가 ‘여기에 멈출까?’, ‘저기에 가볼래?’할 때마다 그때그때 목적지를 바꿔 차를 몰았다. 1박 2일 주행거리 980km가 나온 건 그래서였겠지. 요 며칠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980km 때문인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먼저 차를 멈춘 곳은 파라도르 데 레르마Parador de Lerma였다. 파라도르는 스페인에 있는 호텔 체인의 한 형태인데 일반적인 현대식 호텔이 아니라 수도원이나 성, 요새 등을 개조하여 만든 역사적인 건물들이다. 부르고스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라도르 데 레르마는 17세기 스페인의 작은 궁전을 개조한 곳으로, 17세기 초반 스페인 문화 부흥기를 치세하던  펠리페 3세가 이용한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커피나 한 잔 할까 싶어 그곳으로 가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은 공사 중이라 더 이상 자동차가 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좁은 골목길 한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다급히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길에 있던 할아버지 한분께 도움을 청했다. 할아버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우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냉큼 차 뒷문을 열고 앉으신다. 길을 가르쳐줄테니 한번 같이 가 보자신다. 우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 미소만 믿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차를 다시 후진시키란다. 집에 안경을 두고 왔으니 가서 안경을 가지고 가자신다. 우리는 고분고분 차를 뒤로 몰아 할아버지 집 앞에서 서서 안경을 가지러 들어간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동네 터줏대감답게 내비게이션은 찾지 못하는 골목골목을 안내하셨고. 금세 우리가 찾던 파라도르에 도착했다. 우리는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고, 할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쿨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셨다. 할아버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웃음이 났다.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따뜻함, 고마움. 하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이 상황을 어쩌지 못해 마주보며 웃을 뿐이었다.


인적 드문 시골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400년 전 고궁. 어렵게 찾은 이곳에서 마신 커피 한 잔에 어느덧 집 떠날 때의 멜랑콜리를 까맣게 잊었다. 내가 단순한 사람이라서였을까? 아니면 이 파라도르의 커피 맛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길을 알려준 할아버지의 유쾌함 때문인 걸까?



스페인 북부 특유의 끝없이 이어진 밀밭 길을 따라 달리고 달렸다. 어느덧 주위가 어둠에 잠기면서 우리에게 두 번째 문제가 찾아왔다. 친구 역시 오랜만에 운전을 하는 것이었기에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시골길에 긴장을 한 것이다. 긴장 속에 운전을 하던 중 뒤에서 경적 소리가 났다. 창문을 내려 보니 뒤에서 달리던 아저씨가 우리 옆으로 와서 하는 말. 어두운 길에서 조명도 없이 달리면 위험하단다. 그랬다. 우리는 자동차 미등만 켠 채 위험천만하게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웠고,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킬 겸 차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밖으로 나온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 언제고 다시 한 번 그 하늘을 볼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까만 하늘에 무수한 별들.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밤하늘이었다. 행복해졌다. 내가 스페인 북부 한 시골길 위에서 이 별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른 아침 출발하여 커피와 젤리, 군것질 외엔 먹은 게 없었지만,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친구도 그렇다고 했다. 마음이 온기로 충만해서 그런 거겠지. 여행이 주는 최고의 장점이 이 따뜻함이겠지 생각했다.


부르고스에 도착해 체크인 후 바로 숙소를 나섰다. 부르고스는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부르고스 대성당은 역시 낮이나 밤이나 아름답다. 스페인에서 세비야Sevilla, 톨레도Toledo 대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성당답게 그 웅장함이 밤에도 빛을 발했다. 대성당을 따라 가벼운 산책을 한 후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식당으로 향했다. 부르고스의 전통 음식은 모르시야Morcilla와 양고기 구이다. 모르시야는 우리나라의 순대와 아주 비슷한데, 올리브유에 살짝 튀겨 빵과 함께 나온다. 순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푹 빠질 만한 맛이다.



부르고스 주변 산지에서 대규모 양 목축을 하고 있어 양고기도 대표 음식 중 하나인데, 양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에 나는 경험 삼아 한입 먹어 본 후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여행 중 특별히 그 지역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지만, 현지 사람들과 그 지역 음식을 함께 먹는 ‘경험’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특유의 향이 났던 양고기마저 내 추억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남겨두고 싶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잠들 때 행복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이어져서였을까? 다음날에도 길 위에서 소중한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사진 이진희

2014년 강렬했던 스페인 여행의 마력에 빠져 무대뽀로 스페인에 터를 잡아버린 그녀. 현재는 스페인 현지 가이드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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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생생한 여행기. 저도 부르고스에 꼭한번 가보고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