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삶으로]길 위에서 만난 인연 #2

여행에서 삶으로 #2



피곤했지만 친구와 난 첫 번째 알람 소리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오전 8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여행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었기에 우리는 짐을 챙겨 서둘러 체크아웃을 했다.


호텔을 나서 처음으로 발걸음이 향한 곳은 역시나 부르고스 대성당. 어젯밤 어둠속에 홀로 은은히 빛나는 대성당을 눈에 담았으니 이번에는 이른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 있을 모습을 볼 차례였다. 대성당을 마주보는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어떤 카페가 이보다 아름다운 전망을 가지고 있을까? 스페인식 아침 식사, 커피 한 잔과 빵에 올리브유와 생토마토를 갈아 얹은 빤 꼰 토마떼Pan con tomate를 먹으며 800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대성당을 오래 오래 두 눈에 담아 두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결정한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부르고스에서 1시간여 떨어진 스페인 최고의 와이너리 마르께스 데 리스깔Bodegas Marques de Riscal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내 와인 3대 생산국으로 손꼽히는 스페인. 스페인 내에서도 최고의 레드와인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리오하Rioja 지방. (프랑스에 보르도, 이탈리아에 끼안띠 지방이 있다면,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는 바로 리오하다.) 이 리오하에 자리잡은 유명한 와이너리가 마르께스 데 리스칼인데, 물론 와인 그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호텔을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작업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일 년 내내 43개 객실 예약이 꽉 차있다는 유명한 호텔 구경도 할 겸, 무엇보다 마르께스 데 리스깔의 와인도 맛볼 겸 우리는 다시 한 번 스페인 북부 특유의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1시간 20분여를 달리자 우리 앞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프랭크 게리의 작품. 티타늄 강판으로 전체 외관을 뒤덮은 것이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Bilbao에 있는 그의 또 다른 작품 구겐하임Guggenheim 미술관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분명 다른 매력을 가졌다. 넘실거리는 초록빛 포도밭에 보라빛 와인 한 방울이 흐르는 듯한 그의 작품은 역시 프랭크 게리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마르께스 데 리스깔 와이너리에는 아직 한국어 투어가 없기에 우리는 스페인어로 진행하는 현지 투어를 신청해서 들었다. 그래서 가이드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1850년에 세워진 와이너리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시음 시간. 레드와 화이트 와인이 각각 한잔씩 제공되었다. 스페인에 거주한지 이제 4년차로서 수없이 마르께스 데 리스깔 와인을 마셔왔지만 그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가 재배되는 현장에서 마시는 와인 맛은 정말 특별했다. 이렇게 좋은 와인을 매일 곁에 두고 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스페인에 사는 행복 중 하나다. 



마음 같아서는 마르께스 데 리스깔 호텔에서 하루 묵으며 취할 때까지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지만 겨우 몸을 일으켜 최종 목적지를 마드리드로 설정한 후 차를 몰았다. 저녁 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야 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새하얀 양떼가 갑자기 우리 차 주변을 메우기 시작했다. 마치 양떼 목장에 온 것처럼. 차를 세우고 친구와 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가 사진을 찍었다. 목에 딸랑딸랑 방울을 채워 놓은 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정신없이 양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그분이 나타났다. 딱 봐도 이 양들의 인솔자로 보이는 목동 할아버지가.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은 것에 화를 낼까 눈치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환한 웃음을 보이신다. 목동 할아버지의 이름은 안토니오. 평생 이 곳에서 양들을 키우며 사셨단다. 안토니오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왠지 지금 이 순간도 추억이 될 것 같아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순간 안토니오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낯선 사람과 사진은 찍기 싫으신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토니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휴대전화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단다. 그래서 이것으로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모르지만, 너희가 알려준다면 서툴지만 둘의 모습을 찍어 줄게.” 


“찍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한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요.”라고 웃으며 답하자 그제야 안토니오도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함께 찍은 이 사진을 받고 싶다 한다. 그랬다. 안토니오에게 지금이 사진을 건네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이 도로 위를 찾아와야 한다. 아무 이정표도 없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 내가 살고 있는 바르셀로나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곧 다시 찾아와 사진을 선물하고 싶었다. 



“난 언제나 이곳에 있을 거야.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 안토니오를 찾아줘.”  안토니오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그의 인생 동반자로 보이는 양치기 개 두 마리, 그리고 양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1박 2일 짧디 짧은 스페인 북부 여행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버려두었고, 동시에 또 담아간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가이드라는 직업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조금쯤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그 자리에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채워 넣었다. 우리 인생은 사람 때문에 고달프지만, 또한 사람 때문에 행복해진다.





글/사진 이진희

2014년 강렬했던 스페인 여행의 마력에 빠져 무대뽀로 스페인에 터를 잡아버린 그녀. 현재는 스페인 현지 가이드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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