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새내기 성악가][라이프] 프라하의 소프라노가 되기까지 - EP #2 이토록 학교를 사랑할 수 있을까?

2025-09-26

프라하 4년 차 새내기 성악가의 도전기 #2



수험생활은 말 그대로 고됐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고시원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영어 스터디를 하고 늦은 오후까지 수업을 듣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공부를 이어갔다. 항상 어두울 때 나가서 어두울 때 들어왔기에 3개월 수강이 끝나고 처음으로 한낮에 버스를 타고 들어온 날, 밝은 우리 동네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빛을 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해 6월 중에 시험이 있었기에 사실 공부를 시작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시점에 첫 시험을 보는 셈이었다. 공무원 시험이라는 게 2년 만에 합격해도 빨리 합격했다고 하는 시험이라지만,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학창시절에도 공부를 좋아했던 터라 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일이 음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지 못했던 나에게 약간의 보상 같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음악을 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했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런 의문을 품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5월의 프라하


그러나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시험에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함보다 만약에 합격하더라도 이제 나는 음악가로 살 순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더 가슴 아팠다. 심장을 짓누르는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성악 콩쿠르 영상을 보며 ‘내가 저기에 있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과 그로 인한 눈물의 날들이 점점 잦아졌다. 그렇게 시험 날짜가 가까워오던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음악을 선택해서 집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더라도 나는 꼭 음악을 해야겠다.’


물론 지금 돌이켜 보면 허무맹랑한 생각이다. 노래를 하며 살다보니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게 필수인 성악가에게 생활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당시의 간절하고 애달파 하던 나를 응원하고 싶다. 그 허무맹랑한 결심 덕분에 음악이, 노래가 얼마나 내게 소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헤어진 후에 깨닫는 연인의 소중함처럼 나는 음악을 한 번 잃어봤기에 이제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재미없지.


그날의 결심은 그야말로 나의 인생을 바꿨다. 나는 주변분들에게 이 시험까지만 치르고 성악과 편입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사람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였기에 아마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냈던 순간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수험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시험을 끝내자마자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편입을 위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선생님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노래를 안 한 지 수개월이나 지난 상태에서 고작 몇 개월 만에 한두 명 뽑는 편입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심을 돌이킬 순 없었다. 놀랍게도 친척의 사돈댁에 성악가가 계셨고, 그분께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비교적 저렴한 금액으로 레슨을 받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차근차근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서울의 한 사범대학교에서 1차 필기시험을 합격한 상태로 2차 실기를 보았고, 또 다른 학교에서는 편입 실기시험을 보았다. 공무원 공부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사범대학교에 합격할 확률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최종 합격한 곳은 실기시험만 봤던 서울의 한 성악과였다.


‘축하드립니다. 강희님은 20××년도 ××대학교 일반편입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그날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캄캄한 암흑 속에 있다가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될 일이지만, 그때의 합격이 더 감사한 것은 그 학교에서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을 뵙게 됐기 때문이다. 그분을 통해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내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나의 모교


편입생이라서 차별받거나 주눅 드는 상황은 없었다. 내 나이의 학번보다 2년이나 늦은 학번이었지만, 동기 동생들은 예쁘고 착했고 동갑인 친구들도 꽤 있었다. ‘군대 갔다 왔다고 생각하지 뭐.’ 입시 때는 보기 좋게 떨어진 학교였는데 경쟁률이 더 치열한 편입에서 합격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학교생활을 참으로 열심히, 참으로 재밌게 했다. 학교에서 성악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연주 오디션에는 전부 응시했고, 심지어 1학년 때부터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보다 학교의 건물 구석구석, 주변의 맛집, 도서관, 공원 등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카페에서 파는 달달한 아이스크림라떼를 참 좋아했다. 그걸 마시면 어떤 스트레스도 다 날릴 수 있었다. 교수님께도 소개해 드릴 만큼 좋아해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후배들에게 나의 아이스크림라떼 사랑 이야기가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었단다. 체코 유학 중 한국에 잠시 나왔을 때 가 보니 그 카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의 아이스크림처럼 진득한 내 미련만 잔뜩 남았다.


신나게 학교 다니며


우리 집과 학교는 서울의 끝과 끝에 있어서 왕복 3시간은 거뜬히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다니는 게 즐거웠다. 합창수업에서는 협동심을 배웠고 시창청음, 성악문헌 시간에서는 음악가가 얼마나 준비가 많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음악사는 내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지 깨닫는 시간이었고, 해부학 같은 음성학 시간에는 ‘나는 공부로 진로를 정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서 레슨을 받기 전, 교수님과 티타임을 가지며 잠깐 나누었던 대화들은 나에게 열정과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대학교 합창단 연주를 앞두고


물론 모든 레슨이 도전이었다. 다양하고 많은 레퍼토리를 공부하기로 유명했던 우리 클래스는 욕심이 많은 나에게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교수님께서 어려운 곡들을 내주시면 바로 다음 레슨까지 어떻게든 음정, 박자를 익혀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정도까지 만들어가는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밤을 새기까지 할 정도로 절실했다. 매 레슨을 들어가기 전에 ‘그래, 설마 죽기까지야 하겠어?’ 각오를 하고 들어가니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집중하고 또 집중할 수 있었다. 얼마나 교수님을 많이 따라했으면 석사 졸업연주 마지막 레슨 때는 교수님께서 거울을 보는 것 같다며 크게 웃으시기도 하셨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모든 면을 닮고 싶었기에 행복했고, 그렇게 학생의 삶으로 살 수 있다는 것도 감사했다.


2년이란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아르바이트에 학업에 주말엔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일주일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사 졸업시즌, 연구실에 다 같이 모여 교수님, 클래스 후배들과 대화를 하는데 교수님께서 “이 언니는 필기도 잘 하고 실기도 이번에 1등으로 졸업했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후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려고 하신 말씀인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빈말은 안 하시는 성격이시기에 그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 된 것만 같았다. 매번 콩쿠르에서도 떨어지고 입시도 번번이 실패했던 내가 이렇게 인정을 받는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이었다. 하지만 졸업은 코앞이었고, 나는 또 한 번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글·사진 | 강희

강희는 프라하 음악 예술 아카데미 성악과 최초 한국인 졸업생이다. 체코어와 고군분투하며 체코를 넘어 전세계를 정복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sop_he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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