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 비엔나 #15
한국에서 살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사계절의 뚜렷함을.
봄과 사뭇 다른 여름의 열기, 한순간 서늘해지는 가을, 시리게 차가운 겨울.
한국에서는 3개월씩 딱딱 끊어가며 계절이 넘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릴 적, 유럽에 관한 동화책이나 시를 읽으며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커튼 너머 창밖은 아직 환한데,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데, 지금 자야 할 시간이라 눈을 꼭 감고 있다는 귀여운 이야기였다. 아무리 해가 긴 여름이라고 해도 한국의 저녁은 당연히 어둡다. 나는 궁금했다. 얼마나 일찍 자길래 아직 훤히 해가 떠 있는데도 잠을 청한다는 거지?
어느 화창한 봄에
유럽살이를 하고 있는 지금. 잠을 청하던 동화 속 아이의 노고에 아주 공감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과 5월, 해가 무려 오후 8시가 되어야 진다! 어디 그뿐인가. 한여름인 8월에는 무려 9시가 지나야 해가 넘어간다. 여름마다 열리는 필름 페스티벌의 스크린도 그때가 되어야 밝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긴 낮을 아무래도 겨울에게 떼어 와서 쓰나 보다. 겨울엔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두워진다는 사실이 웃기고도 슬프다.
천천히 지는 해
5월이 되었다. 4월부터 따뜻한 봄을 기대한 사람에게 유럽의 날씨는 그야말로 제 악명을 제대로 떨친다. 올해 유독 4월초의 날씨가 좋아 벚꽃이 무려 2~3주나 일찍 만개했다. 계획했던 가족 촬영 날짜도 급히 당겼을 정도라 웬일로 이렇게 날이 따뜻해, 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4월이었다.
그랬는데 기온이 4월 중순이 되자마자 뚝 떨어졌다. 독일 어느 지방에서는 눈이 온다는 사진이 올라왔다. 오스트리아도 린츠 쪽에는 진눈깨비가 내린다는 인증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비엔나도 이상기후의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라 전날 20도를 넘나들던 기온이 갑자기 10도 중반으로 하룻밤 새에 뚝 떨어지더니, 다음날은 기어이 10도 밑으로 내려갔다. 어제는 날씨 좋다며 외투를 손에 걸고 다니고 오늘은 패딩을 꺼내 입는 기막힌 반전. 그 덕에 감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4월에도 경량 패딩은 필수
그래서 비엔나의 봄은 사진으로 남기면 참 재미있는 계절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경량 패딩을, 누구는 반팔을 입고 있다.
“아니, 이게 언제예요?”
“맞춰보세요, 어느 계절인지!”
변덕스러운 봄이다.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가 4월 토끼인지 실감이 되는, 기상청도 언제 겨울옷을 넣어둬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비엔나의 봄.
봄비
하지만 분명 바람은 한결 따뜻해졌고, 공기 속에서 분명한 봄 내음도 맡는다. 빗방울도 조금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머리카락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은 덜 반갑지만, 그래도 살이 에이는 듯한 겨울 칼바람에 비한다면야.
바람 속에서, 햇살 속에서 이 계절을 느낀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마이네포토 대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2006년부터 유럽에서 살았고, 2009년부터 시작한 비엔나 스냅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은 일 벌리기 능력자 워킹맘. 주력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아날로그 느낌의 필름카메라 작업도 즐겨하며, 요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 마이네포토(MeineFotos)라는 이름으로 비엔나에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한 마리의 고양이, 내성적인 연하남, 다소 엄마를 닮아 집중 받기 좋아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중이다.
https://instagram.com/photo_by_miri_vienna
https://blog.naver.com/miri_in_vienna
https://mirivienna.com
하루 한 잔 비엔나 #15
한국에서 살 때는 실감하지 못했다. 사계절의 뚜렷함을.
봄과 사뭇 다른 여름의 열기, 한순간 서늘해지는 가을, 시리게 차가운 겨울.
한국에서는 3개월씩 딱딱 끊어가며 계절이 넘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릴 적, 유럽에 관한 동화책이나 시를 읽으며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커튼 너머 창밖은 아직 환한데,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데, 지금 자야 할 시간이라 눈을 꼭 감고 있다는 귀여운 이야기였다. 아무리 해가 긴 여름이라고 해도 한국의 저녁은 당연히 어둡다. 나는 궁금했다. 얼마나 일찍 자길래 아직 훤히 해가 떠 있는데도 잠을 청한다는 거지?
유럽살이를 하고 있는 지금. 잠을 청하던 동화 속 아이의 노고에 아주 공감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과 5월, 해가 무려 오후 8시가 되어야 진다! 어디 그뿐인가. 한여름인 8월에는 무려 9시가 지나야 해가 넘어간다. 여름마다 열리는 필름 페스티벌의 스크린도 그때가 되어야 밝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긴 낮을 아무래도 겨울에게 떼어 와서 쓰나 보다. 겨울엔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두워진다는 사실이 웃기고도 슬프다.
5월이 되었다. 4월부터 따뜻한 봄을 기대한 사람에게 유럽의 날씨는 그야말로 제 악명을 제대로 떨친다. 올해 유독 4월초의 날씨가 좋아 벚꽃이 무려 2~3주나 일찍 만개했다. 계획했던 가족 촬영 날짜도 급히 당겼을 정도라 웬일로 이렇게 날이 따뜻해, 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4월이었다.
그랬는데 기온이 4월 중순이 되자마자 뚝 떨어졌다. 독일 어느 지방에서는 눈이 온다는 사진이 올라왔다. 오스트리아도 린츠 쪽에는 진눈깨비가 내린다는 인증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비엔나도 이상기후의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라 전날 20도를 넘나들던 기온이 갑자기 10도 중반으로 하룻밤 새에 뚝 떨어지더니, 다음날은 기어이 10도 밑으로 내려갔다. 어제는 날씨 좋다며 외투를 손에 걸고 다니고 오늘은 패딩을 꺼내 입는 기막힌 반전. 그 덕에 감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엔나의 봄은 사진으로 남기면 참 재미있는 계절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경량 패딩을, 누구는 반팔을 입고 있다.
“아니, 이게 언제예요?”
“맞춰보세요, 어느 계절인지!”
변덕스러운 봄이다.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가 4월 토끼인지 실감이 되는, 기상청도 언제 겨울옷을 넣어둬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비엔나의 봄.
하지만 분명 바람은 한결 따뜻해졌고, 공기 속에서 분명한 봄 내음도 맡는다. 빗방울도 조금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머리카락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은 덜 반갑지만, 그래도 살이 에이는 듯한 겨울 칼바람에 비한다면야.
바람 속에서, 햇살 속에서 이 계절을 느낀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마이네포토 대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2006년부터 유럽에서 살았고, 2009년부터 시작한 비엔나 스냅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은 일 벌리기 능력자 워킹맘. 주력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아날로그 느낌의 필름카메라 작업도 즐겨하며, 요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 마이네포토(MeineFotos)라는 이름으로 비엔나에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한 마리의 고양이, 내성적인 연하남, 다소 엄마를 닮아 집중 받기 좋아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중이다.
https://instagram.com/photo_by_miri_vienna
https://blog.naver.com/miri_in_vienna
https://mirivien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