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오는 로마]시가 오는 로마

시가 오는 로마 #1



안녕하세요? 로마에 살고 있는 박무늬입니다. 제가 로마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비가 오는 봄날이었습니다. 어느새 반년이 지나 이제는 가을비를 마주하고 있네요.


스물여섯, 어리다면 어리겠지만 사회에서 한 사람 분의 역할이 기대되는 나이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며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을 찾다가 저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기록하는 소설가가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잊히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멈춰서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함께 등단하자고 약속했던 시를 쓰는 친구에게 “너는 시인이 되어라, 나는 그 시의 영감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겠다!”라고 허세 가득한 편지를 남기고 해외에 취업을 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관광객들에게 투어를 하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두 달 반 동안 신입 사원 교육을 받고, 6월부터는 바티칸 시국에서 투어를 진행하는 가이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름 동안은 뜨거운 지중해의 햇빛을 받으면서 이곳에 올 때의 목적대로, 사람과 삶에 몸을 부딪치며 많은 것을 느끼고 나름대로 해석하려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활이 익숙해지고 여행이 일상이 되니 관찰하는 시선은 날카로움을 잃고 마음이 게을러졌습니다. 무거워지는 발걸음과 도무지 책상 앞에 앉을 생각이 없는 엉덩이를 이대로 두면 곧 겨울잠에 빠질 것 같아서 스스로를 다그치며 글을 쓸 준비를 했습니다.


글감을 찾기 위해 로마에서의 봄과 여름을 돌이켜 봤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더군요. 심지어 일기도 꾸준히 쓰지 않았습니다. 일기를 쓰겠다고 꾸준히 일기장을 샀을 뿐입니다. 반년을 허송세월한 것인가 스스로 책망하며 다시 책상 앞을 떠났습니다. 침대에 누워 내 인생에는 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아 허무함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켭니다. 트위터를 켜고 다른 사람들의 명민함을 지켜보며 부러워할까 하다가, 추워지니 코트나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캡처했었던 ‘키작녀를 위한 코트 스타일’을 다시 보기 위해 사진첩의 스크린샷 폴더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폴더에는 제가 반년 동안 마음에 남는 시를 캡처한 화면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사실 반년 동안 저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로마에 와서 달라진 점은 바로 시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그리 시적이지는 않았지만요.



시는 읽기 시작한 것은 5월입니다. 그전까지는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친구 덕에 ‘시’라는 것과는 얼굴만 아는 사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친하지는 않지만, 친구의 친구로 아는 사이 정도라고 말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미 제 마음속에는 소설을 향한 동경이 가득 차서 시와는 그다지 친해질 마음도 없었습니다(반대로 시도 저에게 호감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사실 제가 시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김승일 외 11인, 서랍의 날씨, 2016)』라는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책은 젊은 시인 12명에게 공통의 질문지를 주고 답한 것을 모아 놓았습니다. 시를 읽지도 않는 주제에, 시인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을 읽는다는 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늘 그렇게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시가 오는 순간이 언제이냐”라는 공통 질문에 대해서 김현 시인이 대답했습니다.


“혼자가 되는 순간 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순간이지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도 불현듯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리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는데 나 홀로 천천히 움직이는 멍해지는 순간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를까요. 특별한 순간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저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외국에 살고자 했던 것은 혼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더 멍해지기 위해 떠나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 이후에 모든 것은 시가 되었습니다.



일상이 되어 빠르게 지나가던 로마는 시가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아침에는 조금 더 날 선 감각으로 눈을 뜹니다. 하루에 한 편, 혹은 두 편의 시를 읽으며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지를 깨닫습니다. 예전에 소설을 쓰려고 공부를 할 때 과외 선생님이 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무늬 씨, 저도 어디에서 읽었는데 시는 말이고 소설은 행동이래요.”


선생님은 시는 제가 가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이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시를 읽을 때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 듭니다. 입 밖으로 시어를 꺼낼 때 제 감정과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제가 배운 언어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없고, 해석의 깊이는 얕습니다. 그저 제가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읽었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여행이라는 칼이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할 때, 언제까지고 짐을 꾸려서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어디에도 내 마음의 안식처는 없다는 것에 절망할 때, 그때 시를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2019년 10월 21일

로마에서 박무늬 씀





글/사진 박무늬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이 막막하고 의욕도 없어서 작은 카페와 독립출판사를 차렸다. 친구와 함께 첫 번째 책 『매일과 내일』 을 내고, 출판사 사업 신고한 것이 아까워서 두 번째 책 『오늘도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굽습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왔다. 현재 유로자전거나라 회사에서 투어 가이드로 일하며, 사람과 삶에 부딪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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