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 비엔나 #16
오늘도 바깥에는 한바탕 비가 내린다. 생각해 보면 요 몇 년 새 여름에 내리는 비가 늘어난 느낌이다. 선풍기 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헉헉대면서 “아, 이제 선풍기 하나 사야겠다.” 마음먹은 날 밤에는 으레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기 마련이었고, 창문을 열어두면 금방 시원해져서 선풍기 사겠다는 말이 다시 쏙 들어가곤 했다.

언제였더라? 비엔나 필름페스티벌을 보러 갔었으니 7월 아니면 8월이었다. 필름페스티벌에서 내가 좋아하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한다고 해서 원피스 위에 7부 카디건을 걸쳐 입고 룰루랄라 시청사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해가 지며 점점 쌀쌀해지더니 보랏빛 카디건도 ‘여름밤의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추위를 견디며 가장 좋아했던 2막 테너의 아리아를 겨우 들은 다음, 엔딩도 보지 못하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며 자리를 뜸과 동시에 나도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가는 트램을 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여름밤의 추위’는 옛말이 되었고 그 자리에 열대야가 들어섰다. 비엔나도 이제 열대야를 느낄 정도로 무더워졌다. 여름 열기를 가라앉히던 밤의 소나기는 낮까지 침범하여 아침부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빗줄기가 퍼붓는 날도 많고, 촬영할 때 스콜처럼 갑작스레 퍼붓는 비를 맞닥트리는 날도 많아졌다. 출근길, 퇴근길 창밖을 때리며 지나가는 빗방울들, 비엔나의 비, 비, 비.

그래도 한국의 습도에 비하면 비엔나는 건조한 편이다. 많이 습해졌다곤 하지만, 한국의 장마철에 비할 바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비엔나는 쨍한 날과는 다른 매력을 보인다. 소나기를 피해 우산도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 돌을 깐 길에 가득 고여 또 다른 반영을 만들어주는 물웅덩이. 그런 풍경을 나도 모르게 프레임에 담는다. (이 물웅덩이 때문에 시내 한복판의 풀숲과 공원에 모기가 많아지긴 했다. 여름 촬영을 나가 공원 같은 데라도 다녀오면 여지없이 다리에 서너 방 물려 있다.)

젖은 머리를 탁탁 털고 들어온 비엔나 카페에서 아주 약하게 틀어둔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한순간 서늘해진 몸을 따뜻한 멜랑주 한 잔으로 녹이면서 비엔나의 새로운 여름을 실감한다. 그간 바짝바짝 건조하게 타들어 가던 여름을 보냈다면, 이제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묵직하게 서 있는 옛 건물들을 보는 날이 많아지는 색다른 여름을 느낄 차례인지도.

비엔나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고, 20년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재작년, 작년, 그리고 올해의 비엔나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마이네포토 대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2006년부터 유럽에서 살았고, 2009년부터 시작한 비엔나 스냅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은 일 벌리기 능력자 워킹맘. 주력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아날로그 느낌의 필름카메라 작업도 즐겨하며, 요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 마이네포토(MeineFotos)라는 이름으로 비엔나에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한 마리의 고양이, 내성적인 연하남, 다소 엄마를 닮아 집중 받기 좋아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중이다.
https://instagram.com/photo_by_miri_vienna
https://blog.naver.com/miri_in_vienna
https://mirivienna.com
하루 한 잔 비엔나 #16
오늘도 바깥에는 한바탕 비가 내린다. 생각해 보면 요 몇 년 새 여름에 내리는 비가 늘어난 느낌이다. 선풍기 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헉헉대면서 “아, 이제 선풍기 하나 사야겠다.” 마음먹은 날 밤에는 으레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기 마련이었고, 창문을 열어두면 금방 시원해져서 선풍기 사겠다는 말이 다시 쏙 들어가곤 했다.
언제였더라? 비엔나 필름페스티벌을 보러 갔었으니 7월 아니면 8월이었다. 필름페스티벌에서 내가 좋아하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한다고 해서 원피스 위에 7부 카디건을 걸쳐 입고 룰루랄라 시청사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해가 지며 점점 쌀쌀해지더니 보랏빛 카디건도 ‘여름밤의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추위를 견디며 가장 좋아했던 2막 테너의 아리아를 겨우 들은 다음, 엔딩도 보지 못하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며 자리를 뜸과 동시에 나도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가는 트램을 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여름밤의 추위’는 옛말이 되었고 그 자리에 열대야가 들어섰다. 비엔나도 이제 열대야를 느낄 정도로 무더워졌다. 여름 열기를 가라앉히던 밤의 소나기는 낮까지 침범하여 아침부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빗줄기가 퍼붓는 날도 많고, 촬영할 때 스콜처럼 갑작스레 퍼붓는 비를 맞닥트리는 날도 많아졌다. 출근길, 퇴근길 창밖을 때리며 지나가는 빗방울들, 비엔나의 비, 비, 비.
그래도 한국의 습도에 비하면 비엔나는 건조한 편이다. 많이 습해졌다곤 하지만, 한국의 장마철에 비할 바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비엔나는 쨍한 날과는 다른 매력을 보인다. 소나기를 피해 우산도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 돌을 깐 길에 가득 고여 또 다른 반영을 만들어주는 물웅덩이. 그런 풍경을 나도 모르게 프레임에 담는다. (이 물웅덩이 때문에 시내 한복판의 풀숲과 공원에 모기가 많아지긴 했다. 여름 촬영을 나가 공원 같은 데라도 다녀오면 여지없이 다리에 서너 방 물려 있다.)
젖은 머리를 탁탁 털고 들어온 비엔나 카페에서 아주 약하게 틀어둔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한순간 서늘해진 몸을 따뜻한 멜랑주 한 잔으로 녹이면서 비엔나의 새로운 여름을 실감한다. 그간 바짝바짝 건조하게 타들어 가던 여름을 보냈다면, 이제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묵직하게 서 있는 옛 건물들을 보는 날이 많아지는 색다른 여름을 느낄 차례인지도.
비엔나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고, 20년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재작년, 작년, 그리고 올해의 비엔나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글/사진 비엔나의 미리작가(마이네포토 대표)
피아노를 전공했고, 스냅작가로 활동 중이다.
E로 오해받지만 사실 I가 2% 더 많은 INFP. 2006년부터 유럽에서 살았고, 2009년부터 시작한 비엔나 스냅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은 일 벌리기 능력자 워킹맘. 주력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아날로그 느낌의 필름카메라 작업도 즐겨하며, 요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 마이네포토(MeineFotos)라는 이름으로 비엔나에서 다양한 고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한 마리의 고양이, 내성적인 연하남, 다소 엄마를 닮아 집중 받기 좋아하는 아들과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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