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낯선 땅에서 받는 위로, 테니스

동으로 가는 길목 #9




2005년 여름, 어느 금요일.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슬로바키아 회사를 컨설팅하던 동갑내기 한국인 회계사가 술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혹시 테니스 칠 줄 아세요? 제가 테니스를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같이 칠 사람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라켓조차 잡아본 적이 없었다.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 주말에 라켓 사러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매주 이용하는 테니스 코트의 별관 카페. 벽에는 슬로바키아를 대표하는 선수들 사진이 걸려있다.


그렇게 라켓을 잡은 지 16년. 2021년, 나는 슬로바키아 한인 테니스 동호회에서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매주 코트에 나가 땀을 흘리고 있다. 동호회 인원은 남녀 포함해서 15명 정도. 회장이라고 대단할 건 없다. 다들 나보다 조금 더 바쁘고, 나보다 애착이 조금 덜 할 뿐이다.


아무튼 나는 테니스를 아주 사랑한다. 서른 넘어서 시작한 테니스 실력이 이 정도 수준급이라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도 자주 빠진다. 가끔 부모님에게 살짝 서운하기도 하다. 나 어릴 적 뭐하시느라 바빠 테니스를 안 가르치셨나. 그래서 슬로바키아 코치들에게 레슨을 받았고 급기야 백핸드를 양손으로 잡게 되었다. 라켓은 320g이며 헤드사이즈는 100sq inch를 사용한다.


슬로바키아에 살다 보니 한국에는 없는 앙투카 코트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플레이하고 있다. 한국은 앙투카가 아닌 클레이 진흙 코트가 대부분이다. 앙투카 코트뿐 아니라 하드 코트, 잔디 코트, 카페트 코트에서 뛰기도 한다. 게다가 코트와 코트 사이가 한국과 비교해 넉넉한 편이라 옆 코트로 공이 넘어갈 일은 거의 없다.


2007년 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된 데이비스컵 플레이오프. 이형택 선수의 활약으로 3:2로 승리했으며, 팬에 대한 매너도 너무나 훌륭했다.


이곳 한국인들 중에서 나의 실력은 ‘중간~상급’ 정도라고 자평한다. NTRP(National Tennis Rating Program)라고 하는 자가 능력 평가를 해보니 3.5~4.0 정도 나오는 듯하다. 물론 당일 컨디션에 따라 약간 차이를 보이기는 한다.


10월말이 되면 야외 앙투카코트(위)는 에어돔을 씌워 실내 테니스장(아래)이 된다.


이곳 테니스가 재미있는 것은 동호회 국제 교류전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 중에선 베트남 동호회가 가장 활성화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이 맞닿은 옆 나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한인 동호회와 주로 교류하고 있다. 연간 2회씩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교류전을 열며 단체전을 기본으로 한다. 오스트리아 동호회는 우리보다 구력이 오래된 분들이 많아 가끔은 미묘한 자존심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한동안 닫혔던 국경이 얼마 전 다시 열리면서 네 번째 슬로바키아–비엔나 교류전이 열렸다. 동호회 공식 명칭은 우리는 ‘슬로바키아 한인 테니스 동호회’. 상대팀은 ‘비엔나 한인 테니스 동호회’이다.


*   *   *


지난 8월 하순 어느 토요일. 늦더위가 조금씩 사라지면서 쾌적함마저 느껴지는 날이었다. 슬로바키아 진영으로 비엔나 동호회 분들을 초청한 네 번째 교류전 당일. 지금까지 성적은 1승 2패. 이번에는 우리가 홈코트로 불러들인 상황이라 2:2 타이를 만들 수 기회였다.


교류전은 실내 하드 코트에서 열기로 했다. NTC라고 해서 슬로바키아 국립 테니스 코트로 사용되는 곳이라,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슬로바키아 선수 다니엘라 한투코바, 마르티나 치불코바, 도미닉 흐르바티 같은 선수들을 오가며, 스치며, 가볍게 인사도 나눌 수 있는 장소다.


NTC라고 불리는 국립 테니스 코트. 하드 코트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예약하고 이용가능하다


실내 하드 코트뿐 아니라, 야외 앙투카 코트도 따로 10면이 구비되어 있다.


야외 앙투카 코트에서는 로컬 주니어 토너먼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10대 중반 선수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고, 주변에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파이팅을 연발하면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붉은 색이 인상적인 앙투카 코트. 붉은 벽돌(불에 구운 흙)을 갈아서 모래처럼 만든 후 물을 충분히 뿌리고 굳혀 테니스 코트로 사용한다.


비엔나에서 10여 명의 남녀선수들이 도착했다. 모처럼의 야외 활동인지라 다들 살짝 들떠 있었다. 커다란 테니스 가방을 등에 메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정성스레 싼 김밥, 샌드위치, 각종 음료수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하지만 교류전이 열릴 실내 하드 코트에 들어서자 화기애애함은 싹 가시고 다들 결연한 의지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전원 실내 코트용 신발로 갈아 신고서 몸을 풀었다. 따, 따, 따, 촥아악, 경쾌하게 테니스공 캔 따는 소리가 나고, 다들 코트로 나선다. 교류전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하다. 인사할 때의 우호적인 느낌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경쟁심에 불타 용맹하게 최선을 다한다. 발리하는 상대방 몸에 대고 때리기도 하고 전진해 있는 상대팀 머리 위로 로브를 올리며 슬쩍 약을 올리기도 한다.



네 시간 뒤. 우리는 인근 베트남 식당에서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뒤풀이를 했다. 치열했던 모습은 벌써 간 데 없었다. 매치 스코어 7:6으로 우리 슬로바키아 팀이 승리했다. 하지만 경기를 마치고 나면 승패는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는 테니스를 즐겼다. 우리 모두 이곳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이고, 위안 받을 곳이 필요하며, 치열하게 테니스 경기를 하는 동안 후련하다고 할까, 깊이깊이 위로 받는다. 




글 최동섭

슬로바키아 14년차로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 근무 후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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