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1박 2일 동유럽 3개국 여행

동으로 가는 길목 #2



주말 오전.


트렁크 속에 골프가방을 싣고 시속 80Km 구간을 60Km로 천천히 달린다. 차량 내비게이션에는 80Km로 표시되어 있지만, 여기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넘어가는 2Km 구간은 시속 60Km로 달려야 한다. 가끔 내비게이션 속도만 믿다가 벌금을 내기도 한다.


12월 하순이지만 아직 날씨가 따듯하다.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자마자 나오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인부르그(Hainburg). 이 국경 마을에 있는 골프장은 아직 폐장하지 않았다. 무료한 주말, 나는 오늘도 SUV 차량으로 국경을 넘는다.


골프장 17번 홀에서 바라보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성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국경을 넘는다’는 말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국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경을 통과한다는 것은 뭔가 복잡한 이미지다. 여권을 준비하고, 긴 줄을 서며, 입국 심사대를 거치며, 때로는 말 안 통하는 입국 심사관들이 무슨 질문을 할까…, 본능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슬로바키아는 모두 5개 나라와 국경을 맞댔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우크라이나. 유럽 생활 초반, 차로 기차로 버스로 가끔은 걸어서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고 신기해서 호들갑을 떨곤 했지만, 이제는 그저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슬로바키아는 EU 멤버이자 솅겐 협약국(Schengen agreement)이다. 국경엔 먼지만 수북이 쌓인,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검문소만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솅겐 협약에 가입한 건 2007년부터다.


슬로바키아 - 헝가리 국경도시인 에스테르곰(Esztergom)에서 바라본 헝가리 국경. 이 다리를 이용하여 걸어서 또는 차량으로 국경을 넘는다. 물론 자유롭게.


가입 이전에는 EU 멤버라도 국경을 통과할 때 여권검사를 받았다. 까다롭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하고 위축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다니는 슬로바키아 - 오스트리아 국경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는, 혹은 애인과 싸운) 입국 심사관에 걸리면,


- 어딜 가느냐? (비엔나에 밥 먹으러)

- 왜 가느냐? (비엔나에 한국식당이 새로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가 고파져서)

- 얼마나 머물 거냐? (머물긴 뭘 머무느냐? 밥만 먹고 바로 올 거다)


등등 꼬치꼬치 캐물었다. 물론 뒤차들에도 민폐였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차창을 열고 여권을 내밀면 표지의 국가 명만 흘깃 보고는 귀찮다는 듯이 빨리 가라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당일치기이건 여러 날 머물건 슬로바키아 국경을 통과하면 꼭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익숙한 도로와 낯익은 푯말들….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가 된다.


그러다 12월이 되면 국경을 통과하는 일이 더욱 잦아진다. 슬로바키아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크리스마스 마켓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더 화려하다. 그리고 그곳들을 매년 경험하는 것이 어느새 연중행사가 되어 버렸다.


브라티슬라바 크리스마스 광장 모습. 소박하고 차분한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정감 있게 느껴진다.


수제 팬케이크를 팔고 있는 크리스마스 상점. 상냥하고 예쁜 슬로바키아 점원들로부터 기분 좋은 인사를 받았다.


친구를 찾아 머나먼 슬로바키아에 도착한 H는 나와 고등학교 절친이다. 치과의사이자 노총각인 H는 어제 온종일 비엔나 시내를 걸으면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동유럽을 일주일 만에 모두 섭렵하겠노라며 큰소리친다. 어쩌면 20년 전 그대로인지. 우리는 어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비엔나를 즐기다 택시를 타고 슬로바키아 집에 도착했다. 자고 일어나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택시는 내가 업무용으로 자주 사용하는 벤츠 자가용 택시회사이고, 비엔나 슈테판 성당 앞에 나와 어리숙한 다른 한국인이 서 있을 것이라고 하니, 이내 우리를 태우고 비엔나를 떠나 5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이제 저녁 6시까지는 잠을 더 자든지, 어디 나가서 밥을 먹고 오든지 알아서 해라” 친구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저녁 6시, 나는 다시 SUV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어디 가냐?" 라는 친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 주고 나는 다시 국경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슬로바키아 - 헝가리 국경 고속도로다.


"어제 보았던 비엔나 야경은 저리 가라야. 진짜 야경을 보여주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향해 액셀을 밟는다. 이곳에서 부다페스트 여행을 하기 위해선 그다지 많은 고민이 필요 없다. 저녁 먹고 난 후, 그저 부다페스트로 향하기만 하면 된다. 헝가리 국경까지 30분, 그리고 한 시간 남짓 더 가면 멋진 부다페스트의 크리스마스 야경을 볼 수 있다. 역시 대도시답게 자정이 가깝도록 카페와 식당들이 영업을 멈추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부다페스트 크리스마스 광장에 도착하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트램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슬로바키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헝가리 - 슬로바키아 고속도로의 국경엔 여전히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초라한 검문소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이로써 1박 2일간의 3개국 여행이 마무리된다.





글/사진(2-7) 최동섭

슬로바키아 생활 14년 차.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간 근무하다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 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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