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여행] 나라는 작지만 경험할 것은 많은

동으로 가는 길목 #3



“우리 슬로바키아는 이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노력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저희 SAS 정당에 힘을 실어 주십시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주말 저녁. TV속에서 낯익은 남자가 뉴스 스튜디오에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결연하게 말한다.


‘어? 요셉Jozef 아냐? 요즘 TV에 자주 나오네…….’


STV(Slovak TV)의 메인 뉴스에 어느덧 단골 게스트 정치인이 되어버린 친구 요셉.


요셉 라이타르Jozef Rajtar.


슬로바키아 제1야당(SAS. ‘자유와 연대’ 라는 뜻) 소속 국회의원이며, 당내 넘버3의 위치와 함께 국회 경제위원회의 리더이기도 하다.


또한 이 친구, 슬로바키아 사람 중 한국말을 잘하는 세 명 중 하나인 것이 특이한 점이다. 과거 한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학당을 다녔었고, 슬로바키아로 돌아오자마자 대우 슬로바키아와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 몸을 담은 경력이 있다.


그리고 2006년 봄.


이 친구가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생산법인에서 근무 중이었던 우리는, 나는 회계팀에서, 이 친구는 구매팀에서 정신없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나지만, 이 친구는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이 친구의 주요 업무는 삼성전자 협력업체의 생산라인에 가서 슬로바키아 작업자들에게 잘못된 업무를 지적하는 것을 통역하는 일이다.


한국인 관리자의 말을 슬로바키아 말로 통역을 해서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지적하는 것이 주요업무 라니…. 분명히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나에게는 정을 주었다.


“동섭. 너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슬로바키아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 다른 한국 사람들도 너 같았으면 좋겠어..”


나는 언젠가 회사를 그만 둘 것이고 그럴 경우 어차피 슬로바키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게 될 것을 알기에, 한 마디로 멀리 보면서 회사생활을 했기에, 적당한 타협과 중도를 지켰던 것이다.


그 와중에 위치 좋은 곳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치자면 송파구 정도의 느낌과 위치였다.) 우리 둘은 ‘함께 같은 아파트를 사서 이웃으로 지내보자’라며 10년 할부로 같은 아파트, 같은 동으로 입주했다.


그리고 그는 삼성전자를 떠나 MBA를 마친 후, UNI CREDIT이라고 하는 글로벌 은행에 입사했고 홍콩주재원으로 파견근무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이듬해. 갑자기 길거리 포스터에 이 친구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병행했던 정당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2015년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제 1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한국수퍼에서 사온 불닭볶음면을 시식하기 직전. 셀카로 급히 찍어 탁자와 내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친구이며, 내가 말이 안 통할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같이 따라가서 통역해주는 친구임에는 변함이 없다. 김치전과 신라면을 좋아해서 같이 끓여먹기도 하고, 장기여행을 떠날 때 기르던 거북이를 맡아 주기도 했다. 함께 길을 걸을 때, 술집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며 “우리를 위한 정책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 인사하고 박수를 보낸 적도 있다.


외국에, 특히 슬로바키아처럼 작은 나라에 살면 한국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건 꽤 즐거운 일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친구를 사귈 수 있고, 경제적 상황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하며, 생각만 조금 유연하게 할 수 있다면 40대 나이에도 정상적인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수 있다.


유명한 국회의원 친구와 라면을 끓여먹고, 스무살 KPOP 소녀 댄싱팀으로부터 자신들의 매니저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적지 않은 나이에 슬로바키아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는 등……. 아무튼 즐겁고 고마운 요즘이다.


각각 슬로바키아 KPOP 커버댄스 팀들이며, 소규모 공연을 한다.
모두 20대 초반의 학생, 직장인 등으로 본인의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약 1년간 이들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좋은 추억을 남겼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동유럽 슬로바키아에 살면서 생각을 유연하게 가진다는 것, 나를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인 다는 것……. 한 번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글/사진 최동섭

슬로바키아 생활 14년 차.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간 근무하다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 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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