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시칠리아, 밤 굽는 냄새의 시작

시칠리아에서 보낸 한 달 #2

 


베네치아에서 시칠리아 카타니아 공항까지 4.99유로. 초특가 항공권은 들뜬 마음에 살랑 설렘을 불어넣었다. 공항까지 30분 걸리는 시내버스 10번은 월정액 교통권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을 위해 찾았던 마르코폴로 공항에는 꼭 1년 만이다. 작년에는 세상이 모두 무너진 듯 절망적이었으나 지금은 활짝 웃을 수 있구나. 조금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여전히 적막한 공항 풍경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여행객이 없으니 비행기 출,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에서 내 비행기를 한 번에 찾을 수 있었고, 바나 식당은 최소한으로만 운영되고 있었다. 그마저도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대폭 줄여 그린 패스(Green Pass)라 불리는 백신 접종 증명서 소지자들에게만 착석을 허용하였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감상에 젖고 있을 무렵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가 90분 연착됐다는 알림이 떴다.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길거리 음식을 먹고 갓 짜낸 신선한 석류 주스를 마셔야겠다고 동선도 짜두었는데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비싼)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뉴스에서는 위드 코로나를 떠들어대도 여전히 텅 빈 공항이라니. 헛헛한 마음에 괜히 창밖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세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비행기에 오를 즈음엔 나보다 더 저렴한 좌석을 구매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공항은 텅 비어 있었는데 어디에서 나타난 사람들인지 한 좌석도 빠짐없이 꽉 찬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창가 좌석은 가격이 비싸 통로 좌석을 배정받은 나는 창밖을 내다보기 위해 온몸을 커다랗게 휘젓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창가에 앉은 승객은 나를 위해 몸을 의자 쪽으로 최대한 밀착해 주었다.



비행기가 연착된 90분. 그 시간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 드디어 시칠리아일 것이다. 포근한 구름 위를 날면서 문득 이 모든 상황이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행기는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시칠리아섬이 내려다보이고, 수평선 위로는 뿌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곧 배와 가슴이 쑥 꺼지는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거의 1년 만에 느껴보는 비행기 착륙의 설렘이었다.


*   *   *


카타니아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고 예약해둔 차량을 인도받기까지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느려터진 나라 이탈리아에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다니 낯설기도 하면서 이번 여행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카메라 배터리를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 생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가 찾는 기종의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카타니아 시내로 진입해야만 했는데 남편은 그 짧은 거리를 운전하면서 시칠리아에서의 운전에 벌써 겁을 먹기 시작했다. 길이 좁고, 차가 많은데다가 가관인 것은 사람들이 운전할 때 앞을 거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고개를 옆이나 뒤로 돌리고 이야기를 하는 게 핸들은 폼으로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가벼운 접촉사고에는 서로 쿨하게 ‘안녕!’ 하며 헤어져 버린다. 어디서 갑자기 자동차나 스쿠터가 튀어나올지 모르고, 사이드미러도 없는 차가 손가락 하나 틈만 겨우 남겨두고 끼어든다. 사람으로 치면 눈 한 쪽에 안대를 찬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정말 자신 있게 속도도 늦추지 않고 치고 들어온다.


온 감각을 집중하느라 이미 도로에서 기운이 빠져버렸고, 해가 지면 운전하기 더 힘들겠다고 판단하여 오후 일정은 취소하고 숙소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이번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까. 첫날부터 도로 위에서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다가 넋이 나간 우리 둘은 침대에 쓰러져 피식하고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첫날 우리가 머문 곳은 트레 카스타니(Tre Castagni)였다. ‘밤 세 개’라는 뜻을 가진 귀여운 마을이다. 내일 에트나(Etna) 화산에 오를 예정이라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곳에 숙소를 구했다. 자그마한 마을은 좁은 길을 따라 낡은 집과 거의 문을 닫은 상점들만 늘어서 있고 바쁠 것 없는 사람들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구태여 찾지 않을 것 같은 동네였다.


‘밤 세 개’라는 마을 이름답게 중심 광장에는 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금을 한주먹씩 뿌려가며 마치 기술자처럼 밤을 굽는 사람 주변으로 군밤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잘 구워져 노란 속살을 드러낸 군밤 500g이 단돈 6유로였다. 달콤하고 텁텁한 군밤과 붉은 와인은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인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레드와인 한 잔은 1유로에 판매한다. 고소하고 텁텁한 군밤이 적포도주 한 모금에 정화되는 느낌. 은근 중독성이 강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시칠리아에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군밤 냄새를 맡았다. 앞으로 내가 기억하게 될 아주 달큰하고 고소한 시칠리아의 냄새이다.





글/사진 김혜지(이태리부부)

파리, 로마를 거쳐 현재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기록하고 콘텐츠를 생산해 내며 삶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투브 채널 '이태리부부' 운영 중. 『이탈리아에 살고 있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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