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오는 로마 #4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중략)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 지성사, 2014)


요즘 저는 한가합니다. 10월 초에 있었던 개천절부터 한글날까지의 황금연휴가 끝나면서 여행 비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손님들이 없어지니 가이드는 일이 줄어듭니다. 일주일에 여섯 번씩 일하던 것이 이제는 세네 번밖에 안 나갑니다. 다른 투어를 공부하는 준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대외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일 뿐입니다. 누군가 ‘요즘 뭐하니?’라고 물어보면 ‘요즘은 다음 투어 준비하면서 공부해요!’ 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공부는 하루에 30분 정도입니다. 하루는 24시간, 잠자는 시간 8시간, 남은 16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요?



시간이 많아지니 외로워집니다. 이곳에서 저는 남아돕니다. 주로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보내는데, 아주 조금씩 침대에 어떻게 누우면 더 편안한지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 침대는 퀸 사이즈도 아니고, 킹 사이즈입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뼈대에 킹 사이즈의 매트리스, 하지만 그 위에 올라간 전기장판은 1인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전기장판을 가로로 놓았습니다. 제 몸을 웅크려 반으로 접으면 발 빼고는 온몸이 따뜻해집니다. 저는 몸을 둥글게 해서 옆으로 굴러다니며 자기를 택했습니다. 이렇게 둥글게 말고 왼편으로 돌면 창문이 있습니다. 왼쪽 벽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창문이라 겨울에는 조금 걱정입니다만, 누워서 창밖을 보면 나무들이 보입니다. 집 바로 앞이 공원이라 나무밖에 없습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옷을 발가벗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옷을 입고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창문을 닫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겨울에는 창문만 닫고 커튼은 치지 않습니다. 바깥 풍경이 보여야 하거든요. 한국에서 살 때는 옷을 벗고 자지는 않았지만, 자꾸 커튼을 안 치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창밖에 나무밖에 없다는 조건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11월이 되며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탈리아는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비가 오고, 거친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을 견디며 비를 맞는 나무들을 봅니다. 오후 네 시, 이때 나무들의 흔들림을 보며 이 시를 읽습니다.



한가로운 날들이 계속되자 조금 답답해졌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해봤습니다. 밥을 해 먹는데 시간을 들이고, 먹는 데에도 시간을 투자하면 하루가 빨리 흐르겠다는 기대에서 요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재료가 별로 없습니다. 장을 보러 가고 싶지는 않아서 있는 것만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일단 스파게티 면이 있습니다. 면을 삶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야채를 꺼냅니다. 그런데 파프리카와 당근에 곰팡이가 폈습니다. 산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왜 벌써 곰팡이가 피었는지……. 그것보다 늦게 샀던 주키니 호박과 가지는 다행히 무사합니다. 주키니 호박과 가지를 토막 내 자릅니다. 제대로 된 칼이 없어서 그냥 식사용 나이프로 대충 썹니다. 볶음팬은 없으니 그냥 프라이팬을 꺼내고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페페론치노를 먼저 볶습니다. 그리고 썰어 둔 야채를 넣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크게 썰었나 봅니다. 프라이팬 밖으로 야채들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그 야채들을 꾹꾹 누르며 작게 만듭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토마토소스 병을 꺼냅니다. 친한 선배가 추천해준 브랜드의 토마토소스라 볼 때마다 그 선배가 떠오릅니다. 뚜껑을 열어서 야채들에 토마토소스를 붓습니다. 소스를 다 썼습니다. 이젠 프라이팬에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느낌입니다. 넘쳐흐르기 일보직전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그 상태를 지켜봅니다. 그러면 졸아듭니다. 다만 가스레인지가 좀 더러워질 뿐이에요. 그리고 계속 삶아지고 있는 스파게티 면을 젓가락으로 꺼내서 바로 소스에 넣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면수도 함께 들어갑니다. 또 한 번 프라이팬이 폭발할 것 같습니다. 또, 지켜봅니다. 가스레인지는 오염되고 있습니다. 이걸 닦으며 치우는 재미가 또 기대됩니다.


소스를 졸이며 섞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주변을 정리합니다. 야채의 끝부분들, 그리고 마늘 껍질을 먼저 버립니다. 그다음에 야채를 썰었던 도마와 칼을 설거지해서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면을 삶았던 냄비도 닦아서 넣습니다. 그리고 다 쓴 토마토소스 유리병을 버리기 전에 물에 헹구는데, 병 안쪽이 잘 안 헹궈집니다. 자세히 보니 병 안쪽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엄지도, 새끼도 아닌 검지만큼의 곰팡이… 빨간 토마토소스 위에 희고 검게 피어 오른 균. 옆에 가스레인지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파스타를 봅니다. 저걸 버려야 할까요?   

 


설거지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프라이팬 채로 식탁으로 가져옵니다. 젓가락을 꺼냅니다. 그리고 먹기 시작합니다. 입안에 곰팡이가 퍼지는 느낌입니다. 곰팡이 인간이 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시인 친구는 “무늬는 요리를 잘하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찜닭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습니다. 친언니와 함께 살 때도 먹을 만한 요리들을 했습니다. 더 옛날에 두 언니들과 원룸을 쓸 때, 그때는 심지어 오꼬노미야끼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들의 시간 속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의 음식은 남고, 식재료에는 곰팡이가 핍니다.




글/사진 박무늬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이 막막하고 의욕도 없어서 작은 카페와 독립출판사를 차렸다. 친구와 함께 첫 번째 책 『매일과 내일』 을 내고, 출판사 사업 신고한 것이 아까워서 두 번째 책 『오늘도 손님이 없어서 빵을 굽습니다』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왔다. 현재 유로자전거나라 회사에서 투어 가이드로 일하며, 사람과 삶에 부딪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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