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조각들]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물랭 루주와 르픽 가

파리의 조각들 #1



물랭 루주(Moulin rouge)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보불전쟁(1870-1871)이 끝난 후 프랑스에는 평화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산업, 문화가 크게 발전하고 1889년에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려 에펠탑의 탄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파리 우안에 있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한 카바레가 문을 연다. 1년 전 문을 연 올랭피아 뮤직홀의 주인 조제프 올레르와 그의 공연기획자 샤를르 지들러가 이미 축제 분위기가 만연한 파리에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흥행물을 제공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장소는 블랑슈 광장Place Blanche 앞에 있던 거대한 방앗간이었다. 당시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던 30채의 방앗간 중 하나였는데 특이한 점은 파리에서 최초로 전기가 설치된 건물이라는 것이다. 산책자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그곳이 무얼 위한 장소인지 궁금해 하다가 해가 지고 아이들이 잠든 밤 10시 경 물랭 루주로 모여들었다. 사업가, 부르주아, 사교계나 화류계 여자, 평범한 종업원, 유명한 예술가들도 섞여 있었다.



물랭 루주에서는 코믹한 것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쇼가 제공됐는데, 그중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무희들의 요란한 춤이 그 유명한 프렌치 캉캉의 선조이다. 당시에 “최초의 여성 궁전”이라고 불리던 물랭 루주의 여왕은 ‘라 굴뤼’라는 별명을 가진 댄서였다. 그녀는 친구 툴루주 로트렉이 그린 수많은 포스터에 등장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주인도 쇼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물랭 루주의 공연은 늘 환상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끔찍한 화재에도 불구하고 물랭 루주는 긴 세월을 살아남았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역사적 기념물이자 여전히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카바레로 꼽힌다. 이곳의 쇼는 일종의 시간여행이다. 서민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아이러니. 그런 파리의 분위기가 바로 벨 에포크 정신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오르는 르픽 가(Rue Lepic) 


모든 일은 1809년, 어느 안개 낀 아침에 시작되었다. 그날 이른 시각 황제 나폴레옹 1세는 몽마르트르 언덕 정상에 있는 생 피에르 성당에 가고자 했다. 교회의 종탑 위에 막 설치된 신호기 전신소를 보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옛길(현 라비냥Ravignan 가街)’을 이용해 언덕을 오르는데 땅이 진창이고 미끄러워서 결국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행차 이후 황제는 다니기 편한 길을 하나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곧 이 길은 ‘황제의 길’이라고 불린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기의 르픽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인 르픽 가로 다시 이름이 바뀐다.



블랑슈 광장Place Blanche에 있는 물랭 루주의 오른쪽에서 출발하여 활처럼 휘어지며 가파르게 올라가는 르픽 가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상징적인 길 중 하나이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 구역의 중심에 있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이 대성당이 완공되기 이전부터 활기찬 장소였고, 애초부터 많은 글, 그림, 사진에 등장했다. 19세기에는 르픽 가에만 12개의 방앗간이 있어서 곡물, 옥수수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석고도 빻았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서 성업 중인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르픽 가는 각 번지마다 역사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독특한 분위기를 음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천히 걸으며 건물 정면에 붙은 설명문을 읽는 것이다. 블랑슈 광장에서 출발하든 르픽 가의 종점인 장-바티스트 클레망Place Jean-Baptiste Clément 광장에서 출발하든 이렇게 걷다보면 가이드를 동반한 산책을 하는 셈이다. 루이-페르디낭 셀린이 대작 『밤 끝으로의 여행』을 썼으며 유명한 여가수 달리다에게 팔리기도 했던 아파트가 있는 98번지,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인 옛 방앗간 물랭 드 라 갈레트가 있는 83번지, 또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살았던 54번지 등 멈추어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다. 이브 몽탕의 노래 〈Rue Lepic〉를 들으며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지!



카페, 레스토랑, 시장, 특산물들을 파는 가게들이 넘치는 이 길은 축제 중인 도시 분위기고, 파리지앵들도 관광객들에 섞여 크림 탄 커피 한잔 즐기는 곳이다. 유명한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카페 드 2 물랭Café de 2 moulins도 우리를 기다린다. 혹시 아멜리에가 서비스를 하지는 않을까? 혹시 유명 인사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 길에선 당신도 유명인사도 그저 산책 나온 주민일 뿐이다. 역사, 문화적 풍요함에 이끌려서든 단순한 호기심에서든 르픽을 걷기만 한다면 그 길은 당신을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맞을 것이다.





글/사진 기욤 / 번역 정미혜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파리 시내 중심부에서 쭉 자라온 파리지앵. 대학에서 언론을 공부하고 패션 포토그래퍼로 2년간 일하다가 현재는 파리 카톨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철학 교수이자 소설가를 꿈꾸며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또 다른 취미이자 특기는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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